“그 넓디넓은 홋카이도는 우리 선조의 자유의 땅이었습니다.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들처럼, 아름다운 자연에 안겨 생활했던 선조는 진정으로 자연이 낳은 자식들이었고 행복한 사람들이었지요.” 아이누족 소녀가 지은 구전문학 신요의 한 구절이다. 자연을 사랑한 일본의 원주민 아이누족, 찬란함부터 비극까지 그들을 배겨갔던 역사를 따라가 본다.
 

아이누족은 쌍꺼풀이 짙은 서양인과 유사한 외모를 가졌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인과는 사뭇 다르다. 아이누족 여성은 입가에 조커를 연상하게 하는 특이한 문신을 새긴다. 이는 입가 문신이 병을막아준다는 믿음에서 기인한다. 사진출처 BBC
아이누족은 쌍꺼풀이 짙은 서양인과 유사한 외모를 가졌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인과는 사뭇 다르다. 아이누족 여성은 입가에 조커를 연상하게 하는 특이한 문신을 새긴다. 이는 입가 문신이 병을막아준다는 믿음에서 기인한다. 사진출처 BBC


  자연과 함께 살아갔던 사람들
  아이누족은 일본 국가가 출현하기 전부터 일본 땅에 살아왔던 민족이다. 아이누족은 홋카이도를 중심으로 남쪽으로는 혼슈 지역, 북쪽으로는 사할린과 쿠릴열도 일대에 거주했다. 이들은 스스로를 아이누어로 ‘사람’이라는 뜻의 ‘아이누족’이라 칭했다.

  아이누족은 자연과의 공생을 추구한 동시에 자연을 극진히 섬겼다. 아이누족의 자연 숭배는 자연 안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범신론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다. 아이누족은 자연물에 영적인 존재인 ‘카무이’가 깃들었다고 믿었다. 아이누족에게 있어 모든 자연은 카무이가 일시적으로 모습을 바꾼 것이기에 자연을 섬기는 삶은 당연한 이치였다.

  이러한 범신론적 세계관은 신의 이야기를 담은 신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신요 <올빼미의 노래> 중 “나도 인간들 뒤에 앉아 언제나 인간들 나라를 지켜 주고 있었지”라는 올빼미 신의 노랫말은 자연신에 대한 아이누족의 믿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김미숙 연구교수(전북대 고고문화인류학과 BK21교육연구단)는 <올빼미의 노래>에 깃든 자연 숭배 사상은 현대 사회에 시사점을 지닌다고 설명했다. “아이누족에게 올빼미는 마을의 수호신이죠. 올빼미를 모시는 인간에게 복이 오는 서사는 자본주의 사회에 자연과의 공생을 위한 마음가짐을 일깨워줍니다.”

  의례에서도 이들의 범신론적 세계관은 독특하게 드러난다. 아이누족의 대표적인 전통 의례 ‘이요만테’는 불곰의 영혼을 신들의 세계인 카무이모시르로 돌려보내는 불 축제다. 아이누족은 의식을 위해 새끼 곰을 한두 살 때까지 자식처럼 키우다가 때가 되면 곰을 죽여 그 영혼을 기린다.

‘이요만테’는 불곰을 죽여 영혼을 신의 세계인 카무이모시르로 돌려보내는 아이누족 축제다. 아이누족의 범신론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전통 의례로 곰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전한다. 아이누족에게 곰은식량을 줌과 동시에 다른 카무이를 불러오는 존재다. 사진 출처 한겨레
‘이요만테’는 불곰을 죽여 영혼을 신의 세계인 카무이모시르로 돌려보내는 아이누족 축제다. 아이누족의 범신론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전통 의례로 곰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전한다. 아이누족에게 곰은식량을 줌과 동시에 다른 카무이를 불러오는 존재다. 사진 출처 한겨레

 
  점철된 아픔의 기승전, 결(結)은 없다

  아이누족이 걸어온 역사에 꽃길은 없었다. 1400여년 전 나라·헤이안 시대부터 일본 본토의 야마토인은 아이누족을 쫓아내기 위해 지속해서 군대를 파견했다. 에도 막부 시대에 야마토인의 아이누족을 향한 지배 욕구는 더욱 극심해졌다. 김시덕 도시문헌학자는 야마토인이 아이누족을 부른 명칭을 통해 그들이 아이누족을 어떻게 인식했는지 알 수 있다고 전했다. “아이누족을 부르는 단어였던 ‘에조’의 이전 발음은 ‘에미시’였습니다. 이는 원래 ‘시골의 용감한 사람’을 이르는 일본어였으나 점차 ‘오랑캐’와 유사한 의미를 지닌 말로 바뀌었죠.”

  메이지 시대에 이르러 아이누족 탄압은 본격화됐다. 메이지 정부는 에미시의 땅이라는 의미의 ‘에미치’라는 명칭을 ‘홋카이도’로 개정하며 지배의 의도를 내비치기 시작했다. 급기야 1871년부터는 아이누족의 전통·종교 문화를 금하는 정책을 제정하고 1876년 창씨개명을 공표했다. 1899년 「홋카이도 구토인 보호법」을 제정해 아이누어 사용을 금지하고 그들의 토지를 관유지로 몰수했다.

  김미숙 연구교수는 아이누족의 탄압은 조선의 일제강점기와 유사한 측면이 많다고 밝혔다. “일제가 보호를 명목으로 조선 문화를 말살하려 했듯이 메이지 시대부터 아이누족을 대상으로 본격적인 동화정책을 펼쳤는데요. 이 과정에서 아이누족은 노동력 착취를 비롯해 독립 투쟁에 참여한 이의 희생 등 다양한 측면에서 유사한 아픔을 겪었습니다.”

  1997년에 제정된 「아이누 문화 진흥법」 역시 그들을 경계 밖으로 몰아냈다. 차현숙 한국법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해당 법의 문제점을 설명했다. “「아이누 문화 진흥법」은 아이누족의 전통 계승을 목적으로 하지만 아이누족이 선주민임은 인정하지 않았는데요. 선주민 인정이 홋카이도에 대한 영유권 인정으로 이어지며 이것이 그들의 독립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 이후의 상처가 가시기도 전에 아이누족은 욕망으로 점철된 제국주의 질서 아래 다시금 희생양이 됐다. 19세기 초반 남진하는 러시아와 북진하는 일본은 아이누족의 지역인 쿠릴열도에서 맞닥뜨리며 영유권 분쟁을 이어갔다. 분쟁이 지속되던 와중 2019년 일본은 돌연 아이누족을 일본의 선주민으로 인정했다. 이러한 일본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는 목적이 분명했다. 아이누족을 자신의 선주민으로 인정함으로써 쿠릴열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데에 있어 더 이점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픔의 결(結)을 짓기 위해서
  오랜 시간 지속된 동화정책으로 아이누족의 정체성은 대거 말살됐다. 2017년 인구조사에서 홋카이도에 사는 아이누족은 1만 3천여 명이라고 파악됐고 아이누어를 구사할 수 있는 자는 거의 없다. 현재에도 아이누족은 취업과 결혼 등 일상에서 차별을 경험하고 있다. 2016년 일본 정부의 설문조사에 의하면 아이누족의 약 72%는 아직 아이누족에 관한 차별이 존재하느냐는 물음에 동의했다.

  차현숙 선임연구위원은 아이누족의 문화를 보존하는 정책의 필요성을 밝혔다. “선주민의 문화를 진흥하려는 정책이 지속돼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문화의 다양성 인정이라는 헌법적 가치의 실현에 있죠.”

  김미숙 연구교수는 아이누의 정체성 보존을 위해 일본 정부의 노력이 중요함을 언급했다. “소수민족의 차이를 인정하는 시대로 변하고 있습니다. 이에 힘입어 한때 자신의 존재를 밝히지 못했던 아이누족이 1994년부터는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기도 했죠. 동시에 아이누의 전통에 관심을 가지는 일본인 또한 늘고 있는 만큼 일본 정부도 아이누의 복지와 인권 문제 등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아이누족 말살 정책은 역사에 반드시 기억돼야 할 아픈 손가락이다. 일본 정부는 허울뿐인 선주민 인정을 넘어 아이누족의 정체성 회복과 차별 철폐를 위해 부단히 움직여야 한다. 이러한 노력이야말로 ‘아이누’다운, ‘사람’다운 그들의 이야기를 위한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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