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용태 시인은 아직도 왕성한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 시집 『그리하여 너의 섬에 갈 수 있다면』을 출간해 제59회 한국문학상을 받았다. 중대신문은 시인을 만나 그의 섬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들었다.
권용태 시인은 아직도 왕성한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 시집 『그리하여 너의 섬에 갈 수 있다면』을 출간해 제59회 한국문학상을 받았다. 중대신문은 시인을 만나 그의 섬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들었다.

 

서울특별시 시내에 탱크가 돌아다니던 시절이 있다. 5·16군사정변 때다. 그 시절 가슴 뜨거운 한 청년이 쓴 저항시는 검열로 인해 결국 신문에 실리지 못했다. 그래도 청년은 계속해서 시를 썼다. 어느덧 6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지금, 원로가 된 권용태 동문(행정학과 55학번)은 아직 시를 쓴다. 순수한 아이의 마음으로 바람을 감각하고 사랑을 관찰해 아름다운 시어로 빚어낸다. 이제 무엇도 함부로 검열되지 않는 서울특별시 시내에는 그의 시구가 바람을 타고 자유롭게 흐른다. 그 바람의 한가운데서 그의 지난날을 함께 반추해봤다. 정해균 기자 sun_virus02@cauon.net
 

“문학은 항상 숙명처럼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지난해 11월 한국문학상을 수상한 권용태 동문의 『그리하여 너의 섬에 갈 수 있다면』에 실린 시인의 말이다. 60년이 넘는 세월을 문학과 함께한 그는 아직도 원고지를 펴들 때면 막막하다고 말한다. 바람을 사랑한 그의 시구들은 바람결을 따라 많은 이들의 마음에 닿는다. 시인 사무엘 울만이 말하길 청춘은 시기가 아닌 마음가짐이다. 80대 중반을 훌쩍 넘은 노인의 눈빛에는 여전히 상상력이 흘러넘친다. 춘풍 가득한 노(老)춘기를 맞은 그의 형형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행정학을 전공했다고.
  “1955년 중앙대에 원서를 접수하기 위해 부산역에서 기차를 탔습니다. 한글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어머니가 배웅을 나오셨는데요. 기차가 출발하는 순간까지도 절대로 시인이 되면 안 된다며 꼭 판검사가 되라고 간절히 부탁하셨습니다. 시인에 대한 의식이 전혀 없을 때였는데 어머니께서 그 말을 누구에게 들으셨는지 아직도 의문이에요.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를 묻지 못하고 헤어진 게 지금도 한이 됐죠. 그렇게 어머니의 간절한 소망으로 법정대학 행정학과에 진학했습니다. 학점을 위해 법정대학에서 공부는 했지만 국어국문학과 강의를 여러 개 도강하다시피 했어요. 당시 저를 동문으로 알던 국어국문학과 학생도 많았죠.”

  -중대신문에서도 활동했는데.
  “신문사 기자를 꿈꾸며 취재부장을 거쳐 편집국장까지 지냈습니다. 당시 학생들 사이에선 이전 편집국장이 대학신문에 학생들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는다는 불만이 많았어요. 그래서 학생회 측은 제가 편집국장이 되길 원하기도 했죠. 비판 의식이 강한 저라면 학생 편에서 대학신문을 이끌고 갈 수 있겠다는 기대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4·19 혁명 시기 편집국장 자리에 있었는데요. 학생들의 요구로 편집국장이 됐으니 ‘4·19 국장’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당시 신문 발행을 위해선 발행인의 결재가 필요했어요. 국장이 된 이후 학생들의 여론을 신문에 반영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해 학교 측과 갈등을 겪기도 했습니다. 교수회의에 불려 가 사표를 내라는 말을 듣기도 했죠. 어용화된 신문을 만드는 편집국장은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신문을 찢다시피 날리며 사임했던 기억이 납니다.”

  -학생회 활동도 했다고.
  “당시 명칭은 학생회가 아닌 ‘학도호국단’이었습니다. 학도호국단 부회장 겸 학예부장을 맡아 전국 고등학교 대상 문예 현상 공모를 열었죠. 대학 문단을 선도하겠다는 소명의식을 갖고 리더십을 발휘했어요. 조병화, 최인욱 등 당시 시 부문의 거물들을 초청해 심사를 부탁드렸습니다. 그분들이 저에게 예심을 맡기셨는데요. 거물들이 심사하는 대회의 예심을 맡았다는 사실에 자부심도 느꼈죠”

  -재학 시절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면.
  “문단의 3대 기인으로 불린 천상병·김관식·이현우 시인과 술을 마시며 문학을 논하곤 했습니다. 야간통행금지 시간이 있던 시절 저는 흑석동에서 하숙하고 있었어요. 하숙집은 한옥 가옥처럼 돼 있어 외부 소음이 다 들렸죠. 술에 거나하게 취한 세 친구를 데리고 귀가하는데 하숙집이 쑥대밭이 된 거예요. 천상병은 시를 낭송하고 김관식은 연설하고 이현우는 경상도 사투리로 떠들어 댔습니다. 다음날 주인 할머니가 하숙집에서 나가달라고 말씀하셨고 결국 방을 빼게 됐죠. 이 일화가 가장 기억에 남는데요. 지금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난장판이었어요.(웃음)”

  -그간의 작품 활동을 자평하자면.
  “1958년 문예지 『자유문학』을 통해 시<바람에게>로 문단에 등단했어요. 저는 갈대밭이 펼쳐진 경상남도 김해에서 태어났습니다. 학창 시절부터 갈대밭에 부는 바람을 보며 바람이 어디서 불기 시작하는지, 바람은 왜 부는지, 바람의 끝은 어디인지 궁금했어요. 바람을 잡아보려고 쫓아갔던 기억도 납니다. 문단 초창기엔 바람의 감촉과 상징, 색감, 질감에 몰두해 연구하기도 했죠. 그러다 시의 다양성을 위해 바람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대학 시절 바빠서 연애를 못 했습니다.(웃음) 그래서 사랑을 작품화해보기로 했죠. 사랑한다는 것은 상처받는 일이고 그늘진 일입니다. 아픔이 없는 사랑이 있을지 생각하며 시를 썼어요. 자신의 시에 대해선 자기만족이 없어요. 전부 미완성이죠. 요샌 지금까지 쓴 시를 소각하고 싶기도 한데요. 당시엔 최선을 다한 작품이니 태울 순 없죠. 시는 완성
도 없고 만족도 없다고 생각해요.”

  -검열로 활자화되지 못한 작품도 있다.
  “1961년 5월 16일 군사정변이 일어났습니다. 서울특별시 시내에 군대가 진주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던 시대였죠. 검열 없이는 기사를 쓸 수가 없었는데요. 민주주의 사회에서 쿠데타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 저항시 <구름은 아직도>를 썼습니다. 이 시는 군사정변 이틀 뒤인 5월 18일 <민족일보>에 실릴 예정이었으나 비상 계엄령으로 발행되지 않았죠. 1961년 5월 18일 자 <민족일보>엔 제 시가 들어갈 공간이 빈 여백인 것을 볼 수 있어요. 어느 날 다방에서 차를 마시는데 중앙정보부가 들어와 절 지프차에 태웠습니다. 남산에 있는 모텔에 데려가 해당 시를 쓴 동기 등을 집요하게 따져 물었죠. 큰 고문을 당하진 않았지만 일주일 동안 수모를 겪고 나온 기억이 있습니다.”

병실 같은 / 그늘진 조국의 하늘 아래서 / 나는,/ 서러운 식민지의 밤을 걸을 때처럼 어두운 가슴으로 살아간다. // (중략)// 바람의 시위 속에 싸여 / 굴욕을 숙명처럼 마시고 살아가는 / 부조리의 권태 속을 / 우리는 태연하게 헤쳐간다. // 언제고 꼭 한 번은 / 파도처럼 일어 올 분화구의 / 최후를 기억하며 / 우리는 외로운 언어들을 지니고 살아간다.
권용태, <구름은 아직도> 中

  -문화 분야에서도 활동했는데.
  “제 인생의 전반부는 문학으로, 후반부는 문화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국회 문화관광위원회 수석전문위원을 지냈고 지역 문화 발전을 위해 강남문화원장 자리에 있기도 했는데요. 저는 자신이 사는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강남의 대모산성과 삼성토성 등 향토 문화를 발굴해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죠. 사람들은 강남을 부촌으로만 알고 있지만 문화 소외 계층이 많은 동네입니다. 문화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을 방치해선 안 되죠. 대치동장에게 대치동에서 문화 행사를 개최하자고 제안하기도 했어요. 제가 가는 곳엔 문화가 살아 숨 쉴 수 있도록 만들고 싶습니다. 제 문화적 지식과 전문성을 발휘해 문화 진흥에 기여하겠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죠.”

  -한국문화원연합회장으로 활동했다.
  “현재 한국문화원연합회장은 전국 231개 문화원을 지휘·감독합니다. 문화가 정치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노력했죠. 2003년 대한민국 국회와 한국문화원연합회가 공동으로 제1회 ‘국회 시 낭송의 밤’을 주최하기도 했는데요. 국회의원들이 서로 멱살을 잡고 싸우는 모습을 보며 낮은 목소리로 시를 낭송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당시 국회의장에게 1년에 한 번씩 여야를 불문하고 시 낭송을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렇게 국회 시 낭송의 밤을 끌어왔는데요. 그 무대에 서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어요. 시 낭송 후에는 서로 얼싸안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새로운 시 형식에 도전했다고.
  “<그리하여 너의 섬에 갈 수 있다면> 작업을 하며 힘이 많이 들었는데요. 나이가 드니 문학의 정통성에 입각한 모범적인 작품보다는 내 목소리로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가 읽어도 감동적인 시, 누구에게나 위로가 되는 시를 쓰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도 긴 글을 읽지 않아요. 그래서 짧은 사행시 형식을 시도했습니다. 이후 한국문인협회 한국문학상에 선정됐다는 연락이 왔고 많은 나이에도 상을 받을 수 있어 감사했죠.”

  -꿈을 찾아 방황하는 후배들에게 한마디.
  “준비된 삶에 기회는 언제든지 옵니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을 했으면 해요. 잘못된 학과 선택으로 시행착오를 겪었다면 지금이라도 원했던 과에 진학해 공부했으면 좋겠습니다. 기적은 스스로 찾아오지 않아요. 반드시 노력한 이후에 오죠.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만으로는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노력이 뒷받침돼야 간절히 기도한 것도 이뤄질 수 있
죠. 인생을 살면서 기적은 성실히 노력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온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권용태 시인은 1960년에 중대신문 편집국장을 지냈다. 편집국장 시절 그의 모습이다.
권용태 시인은 1960년에 중대신문 편집국장을 지냈다. 편집국장 시절 그의 모습이다.


  - 당신에게 중앙대란?
  “중앙대에 대한 애정이 각별해요. 중앙대 덕분에 성장했고 명사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중앙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몰라요. 중앙대를 향해 절을 하고 싶을 정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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