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세계를 다룬 작품에 관해 아시나요? 이승과 저승을 소재로 한 작품과 콘텐츠는 많이 나오고 있지만, 과거부터 길이 이어지고 있는 작품은 단연 『신곡』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기서 똑똑, 단테가 문화예술의 문을 두드립니다. 『신곡』이라는 희대의 명작을 남긴 단테는 문학청년을 넘어 정치가이자 행정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활은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정쟁에서 밀려나 망명 생활을 하기도 했고,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의 죽음을 일찍 맞이해야 했죠. 그는 이러한 고난을 문학으로 승화하고자 했습니다. 단테가 예술을 만났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궁금하시다면 지금 바로 펼쳐봅시다! 권지현 기자 rnjswlgus1103@cauon.net

우리의 인생 여정의 중간에서, 
나는 캄캄한 숲(una selva oscura)에 부닥쳤네. 
올바른 길을 잃고서 
-『신곡』(단테 씀) 中 
 
  예술가란 고통 속에서 피어난다고 했던가. 자신의 고통을 문화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킨 예술가들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과 감동을 주기도 한다. ‘단테 알리기에리’는 자신의 고통스러운 삶을 문학 속에 온전히 담아냈다. 문학청년이자, 정치가로 활동했으며, 죽을 때까지 한 사람을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을 보여주기도 한 단테. 그가 그려간 아름답고도 슬픈 삶을 따라가 보자.

  피렌체에서 피어난 단테 
  1265년 이탈리아 북부 피렌체에서 태어난 단테는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전환되던 시기에 활동했다. 피렌체는 12세기부터 코무네(자치도시)로 발전해 시민들이 대표자를 선출하여 통치하는 공화제로 운영됐다. 이후 경제적·정치적으로 눈부신 성장을 했으며 이를 토대로 르네상스가 피어났다.

  김효신 교수(대구가톨릭대 한국어문학과)는 단테의 고향인 피렌체와 르네상스의 관계에 관해 논했다. “르네상스는 페트라르카, 보카치오 등의 르네상스 대표 작가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등의 르네상스 대표 예술가를 가리켜요. 그들을 후원한 예술 후원가들의 경제력과 정치적 뒷받침, 그에 따른 문화적 개방성 등도 포함하죠. 당시 피렌체는 새로운 문화, 정신 그리고 생활이 뻗어나가던 정치적·문화적 중심지였고, 그 속에서 단테는 새로운 사회적 이상과 의식에 눈을 뜰 수 있었습니다.”

  평생의 사랑, 베아트리체 
  1274년, 단테는 ‘베아트리체’라는 여인을 만나게 된다. 베아트리체와의 첫 만남에서 단테는 그녀에게 사랑을 느낀다. 그러나 단테는 다른 여성과 결혼해야 했고 베아트리체 역시 다른 이와 결혼했다. 그러다 9년 후 다시 베아트리체와 만난 단테였으나 베아트리체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지 않고 오히려 감추려 했다고 한다.

  변형택 교수(동아대 기초교양대학)는 단테의 삶 속 베아트리체가 어떤 존재였는지 그의 저서를 들어 이야기했다. “단테는 자신의 저서 『새로운 삶』에서 베아트리체를 9살에 처음 만나 사랑에 빠졌으며 평생 흠모했다고 고백하고 있어요. 그녀는 단테 문학에서 절대적이면서 성스러우며, 플라토닉한 사랑의 뮤즈로 자리 잡게 되죠. 또한 『신곡』에서 단테가 지옥과 연옥을 경험한 후 천국으로 향할 때 그를 인도하러 온 이가 베아트리체인데요. 그녀를 통해 신이 인도하는 해피엔딩에 이른다는 점에서 단테에겐 다름 아닌 구원의 상징입니다. 이후 고뇌와 고통을 겪는 모든 인류에게 베아트리체란 희망과 구원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했다 볼 수 있죠.”

  그러다 1290년 베아트리체는 24세의 나이에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후 단테의 고통은 매우 극에 달했다고 한다. 김효신 교수는 베아트리체의 죽음이 단테에게 미친 영향력에 관해 말했다. “단테의 사랑은 고통을 통해 오히려 더 강렬해졌고 더욱 이상적으로 고양됐죠. 그녀는 단테의 삶과 작품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는 이상적인 여인으로 승화됩니다. 단테에게 베아트리체는 살아있는 현실적인 여인이자, 매혹적인 시적 창조물, 그리고 종교적 상징이 혼합된 모습으로 나타나죠.”

헨리 홀리데이의 '베아트리체를 만난 단테'(1883). 단테는 그의 저서에 베아트리체를 사랑의 뮤즈, 천국 인도자 등으로 등장시켰다. 베아트리체가 자신을 포함해 고통받는 인류에게 희망과 구원의 대상이 되길 바랐을 것이다.
헨리 홀리데이의 '베아트리체를 만난 단테'(1883). 단테는 그의 저서에 베아트리체를 사랑의 뮤즈, 천국 인도자 등으로 등장시켰다. 베아트리체가 자신을 포함해 고통받는 인류에게 희망과 구원의 대상이 되길 바랐을 것이다.

  신곡이 탄생하기까지 
  1295년 전후 단테는 본격적으로 정치 생활에 뛰어들었다. 당시 피렌체에서는 일반 소귀족이 공직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조합 가입이 의무적이었기에 단테는 피렌체의 ‘의약 조합’에 가입했다. 단테가 현실정치에 참여하기 전 이탈리아 내 정치적 상황은 정쟁으로 혼란한 상태였다. 13세기 초부터 ‘겔프당(Guelfi)’, ‘기벨린당(Ghibellines)’라는 두 당파로 나뉘어 정쟁이 벌어지던 상태였고 피렌체도 마찬가지였다.

  변형택 교수는 정치적 갈등이 단테의 문학에 영향을 미쳤다는 입장이다. “당시 정치와 종교는 서로 영향력을 키우기 위한 극심한 갈등, 권모술수와 부정부패가 만연했어요. 이로 인한 최대 피해자가 단테라고 할 수 있죠. 환멸과 좌절을 뼈저리게 겪은 후 단테가 정치 대신 펜을 든 것은 필연적 결과로 보이며 이를 통한 이상의 실현, 즉 신의 구원에 대한 모색이 『신곡』의 주제로 구체화 된 것이죠.”

  아버지를 시작으로 단테의 집안은 겔프당에 속해 있었는데 1260년 전투에서 두 당 중 겔프당이 결정적으로 승리하게 된다. 그러나 단테가 정치 활동을 하던 시기에 겔프당은 다시 백당과 흑당으로 양분돼 서로 치열하게 대립했고, 백당에 속한 단테는 이후 자치도시의 최고 통치기구인 집정관, 100인 평의회 일원 등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노동욱 교수(삼육대 기초교양부)는 정치인으로서의 단테의 면모에 관해 언급했다. “단테는 『신곡』과 같은 문학 작품 외에도, 황제와 교황의 이상적인 관계를 설파한 『제정론』과 같은 정치적 논문을 집필했어요. 또한 정쟁 상태에 있던 피렌체 공동체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현실정치에 뛰어들었죠. 단테는 시급한 정치적 현안에 대해 소신 있는 발언을 하는 것이 ‘지식인의 책무’라고 생각했습니다. 교황과 황제의 지도력이 이상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세계를 정치적 이상향이라 꿈꿨죠.”

  그러다 1301년 단테가 로마에 체류하는 동안 샤를의 도움을 받은 흑당이 피렌체를 장악하게 됐다. 단테는 1302년 궐석 재판에서 뇌물 수수, 각종 비리 혐의 등으로 기소돼 유죄 선고를 받게 됐고 단테는 고향 피렌체를 그리며 망명을 하게 된다.

  1309년 신성로마제국에 하인리히 7세가 등극했을 때, 이탈리아의 정치적 혼란을 끝내고 새 정치적 꿈을 실현시킬 거라 믿었다. 이후 1312년 마침내 하인리히 7세가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에 들어왔지만 교황의 개입으로 피렌체는 열외가 되고 말았다. 이에 더해 1313년 황제가 나폴리를 향해서 진군하던 중 말라리아에 걸려 급사하는 불운을 겪으며 그의 귀향은 좌절된다.

  김효신 교수는 망명 생활 중 느낀 고난이 『신곡』의 탄생을 불러왔다는 입장이다. “단테가 망명 중 품었던 희망과 염원은 그의 작품들 속에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어요. 『신곡』 역시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죠. 망명 생활은 단테에게 헤아릴 수 없는 고난이었지만 한편으로 『신곡』이라는 불후의 걸작을 남기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를 기억하는 이유 
  단테는 망명 생활 중 현대에도 길이 남는 작품을 남기게 되는데 바로 『신곡』이다. 1314년 『신곡』의 제1편에 해당하는 ‘지옥’ 간행 후 단테의 명성이 크게 올랐다고 한다. 당시 대중은 왜 지옥의 이야기에 열광했던 걸까. 변형택 교수는 욕망과 이익에 더 끌리는 대중의 관심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했다. “지옥편은 『신곡』의 제1편이었기에 작품성으로 명성을 얻었다고 볼 수 있어요. 또한 대부분 인간은 선한 측면도 지니고 있지만 반대로 이익과 욕망에 더 자주 휘둘리기 마련입니다. 아마 천국보다 지옥에 관한 대중들의 관심이 훨씬 컸기 때문이겠죠.”

  현대에도 단테가 남긴 작품들은 다양한 예술 작품과 콘텐츠로 다시 재탄생하고 있다. 김효신 교수는 『신곡』을 들어 단테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전한 인물인지 이야기했다. “ 『신곡』의 경우 전환기 중세 유럽의 사상을 총체적으로 집약했을 뿐만 아니라 현대 이탈리아어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그러나 국적과 시대를 불문하고 단테가 우리에게 의미를 주는 점은 700여 년 전에 죽음 이후의 세계인 저승 여행 이야기를 통해서 삶의 의미를 되짚어보게 했다는 점이라고 볼 수 있죠.”

  노동욱 교수는 『신곡』을 통해 단테가 현대인들에게 깨달음을 준다고 설명했다. “단테의 대표작 『신곡』의 경우 자신이 경험한 세속적역사적 세상을 저승으로 옮겨 와 재현한 것이라 볼 수 있는데요. 각 인물이 지닌 세속적·역사적 특징들은 희석되지 않은 채 입체적이고 역동적으로 남아있습니다. 현대 독자들은 각자의 상황에 따라 『신곡』으로부터 다양한 메시지를 이끌 수 있고 무엇보다 독자 자신의 현세의 삶을 성찰할 수 있다고 볼 수 있죠.” 모두에게 회자 되는 작품을 피워낸 단테는, 사랑과 사회로부터 고통을 겪으며 아스라이 졌다. 그의 작품 너머에서 들리는 그의 외침, 비치는 그의 눈물을 기억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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