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정홍수 선생님이 쓴 『마음을 건다』(창비, 2017)를 다시 읽었다. 문학 평론가에 대한 외경심을 품고 천천히 책장을 넘기는데 「어른 되기의 힘겨움」이란 제목의 글을 읽고 생각이 많아졌다. 문학에는 분명 힘이 있다고 말하며 소설집과 평론집을 뒤적거리던 스물한 살 가을 이 글을 읽고 붙여둔 포스트잇을 발견했다.

  언젠가 이 글을 다시 펼치게 된다면 그땐 어른이 되어있길. 

  단정히 쓰인 몇 년 전의 글씨체를 보자 아끼는 볼펜으로 한 자씩 꾹꾹 눌러쓴 그때의 기억이 선명해졌다. 가장 존경하는 문학 평론가의 솔직한 고백 앞에서 나 또한 그런 어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지금처럼 문학 동네를 기웃거리다 보면 언젠가는 그 근처에 가 있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기대감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때는 꾸준히 정진하면 어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강했었던 듯싶다. 오만하게도 내 생각과 역량을 믿었고 나 정도면 괜찮은 사람이 될 거라는 철없는 생각에 절여져 있었다.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온몸으로 문학을 해야 한다고 호기롭게 말하던 시절이었다. 문학을 전공하는 사람이었으니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괜스레 마음 한편이 씁쓸해진다. 어른이 된다는 건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꾸 고개를 들이민다.

  최근 우리 사회를 경유한 어떤 슬픔 앞에서 나는 어른이 없는 세상에 대해 생각했다. 수많은 사람에게 동시에 밀려온 슬픔을 두고도 철저히 배타적인 사람들과 타자의 지위를 유지하는 것을 정도 正道로 추구하는 사람들을 보고 어른의 부재를 체감했다. 누군가의 슬픔이 다른 누군가를 경유하지 못하면 슬픔은 스스로 몸집을 키우기 마련이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지면 터지게 된다. 터진 후에 그 조각들을 하나씩 살피는 건 많은 힘이 들 듯하다. 이성이라는 탈을 쓴 무배려가 만연한 세상이 두렵다. 

  이해가 환대의 조건이 되는 세계에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 갈수록 파편화되는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人間이다. 필연적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어쩌면 어른이란 사람과 사람, 그 사이에서 스스로가 틀릴 수도 있다는 작은 확신을 지닌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닐까. 그런 마음으로 서로의 틈을 메울 수 있다면 좋겠다.

  시간이 흐르면 어른이 되어있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쉽지 않다. 어른 되기의 힘겨움이 손끝으로 느껴지는 추운 날이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 깊숙이 느껴지는 계절이다. 다시 돌아올 겨울을 맞을 때는 조금 더 다감한 세상이길 바라며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얼굴을 마음으로 그려본다. 더 많은 사람과 함께 누군가의 얼굴을 그려보길 소망한다. 울퉁불퉁한 조건보다 온전한 마음을 믿어보는 일. 불가능한 일은 아닐 테다. 온 마음을 쏟은 일에는 큰 힘이 남아 있을 거라는 작은 믿음으로 어쭙잖은 글을 남겨본다.

 김세실 학생 
문예창작전공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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