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과 여성이 만나 생기는 설렘만이 사랑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같은 성별의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는 특별한 로맨스가 아니다. 이 또한 설레고, 아프며, 감동을 줄 뿐이다. 여기 달콤하면서 씁쓸한 사랑을 하는 남성과 남성이 있다. 남성 간의 로맨스 이야기, 바로 ‘BL(Boys’ Love)’이다.

공개된 후 8주 연속 왓챠 TOP 10 1위를 달성한 BL 드라마 '시맨틱 에러'. BL은 점점 대중화돼 다채로운 콘텐츠로 소비층을 넓혀가고 있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시맨틱 에러: 더 무비'
공개된 후 8주 연속 왓챠 TOP 10 1위를 달성한 BL 드라마 '시맨틱 에러'. BL은 점점 대중화돼 다채로운 콘텐츠로 소비층을 넓혀가고 있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시맨틱 에러: 더 무비'

  남자끼리 연애하는 게 뭐가 그리 좋아서 
  BL은 ‘소년애’를 영어로 표기한 용어다. 한국의 경우 1990년대에 일본 BL 만화 『절애』(오자키 미나미 씀)가 해적판으로 소개되며 BL을 본격적으로 수용했다. PC 통신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BL 문화가 확산됐고 이후 남성 아이돌 그룹 팬픽, 동인지 등이 아마추어리즘을 기반으로 창작됐다.

  BL 웹툰과 소설을 즐겨본다는 대학생 A씨(21)는 BL을 보게 된 계기가 팬픽이라고 답했다. “중학생 때 제가 좋아하던 남자 아이돌 팬픽을 통해 BL을 접했습니다. 당시 인터넷 소설이나 아이돌 팬픽, 빙의글 같은 콘텐츠가 많았는데요. BL을 보려고 한 건 아니었지만 접하고 보니 BL이었죠.”

  류호현 연구교수(고려대 4단계 BK21 중일어문학교육연구단)는 팬픽 창작물과 BL의 관계에 관해 이야기했다. “한국의 아이돌 문화가 크게 발전하면서 팬덤 사이에 아이돌을 소비하는 방식 중 하나로 팬픽이 등장했는데요. 팬픽 창작물은 일본의 야오이 문화, 나아가 BL 문화에 매우 큰 영향을 받았죠. 이후 아이돌과 BL 문화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 속 함께 성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BL이 쏘아 올린 작은 공 
  왓챠 오리지널 BL 드라마 <시맨틱 에러>는 공개 후 8주 연속 왓챠 TOP 10 1위를 달성했다. <시맨틱 에러>는 ‘컴공과 아싸 추상우’와 ‘디자인과 인싸 장재영’의 캠퍼스 로맨스를 다룬 작품으로 현재(5일 기준)도 왓챠 TOP 10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2022년에 열린 APAN Star Awards에서는 <시맨틱 에러>의 두 주인공 박재찬 배우와 박서함 배우가 ‘아이돌 챔프 베스트커플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김원 문화평론가는 <시맨틱 에러>가 BL 흥행의 분기점이 됐다고 설명했다. “<시맨틱 에러>의 성공으로 BL이 음지에서 양지로 확실히 이동한 모양입니다. 드라마의 만듦새가 탄탄하고 배우들이 매우 매력적이었어요. 또한 화면 자체가 밝고 환해 드라마로 즐기기에 손색없었죠. 장르에 대한 인식을 달라지게 한 중요한 분기점이 된 셈입니다.”

  남성과 여성의 사랑을 다룬 로맨스와 달리 BL이 가진 매력은 무엇일까. A씨는 로맨스 속 여성의 행동과 관련한 불편한 요소가 없다는 점이 좋았다고 이야기했다. “이성애물을 보면 여성의 사회적 안전이 미약함을 남자 캐릭터와의 관계 형성을 위한 장치로만 사용된다는 게 불편했어요. 그러나 남자-남자와의 관계로 보니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사회적 위치가 동등한 성별끼리의 사랑이기에 어떤 장면이든 편하게 볼 수 있었죠.”

  김원 문화평론가는 이성애에서 비롯되는 갈등이 필요 없다는 점이 BL의 차별적인 매력이라고 언급했다. “남성과 여성이 사랑에 빠지기까지는 걸림돌과 갈등이 부지기수죠. 인간에 관한 다각도의 탐구, 분석과 관찰을 해야만 나와 다른 상대를 이해하고 강도 높은 포용력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BL에는 같은 몸, 같은 마음인 두 주인공이 등장해요. 서로에 대한 기쁨과 만족감이 얼마나 큰지를 묘사하는 데 주력하면 되는 거죠.”

  유료 웹툰 플랫폼이 생기기 전까지 BL은 동인 문화의 일부로 존재했으나 2013년 유료 웹툰 플랫폼 ‘레진코믹스’가 등장하며 연재되는 BL 웹툰도 증가하게 됐다. 과거 동인지로 소비됐던 인기 작품들은 e-Book으로 출간되거나 웹툰으로 만들어지기도 했고, 레진코믹스와 전자책 플랫폼 ‘리디’는 BL을 하나의 장르로 분류했다. 또한 OTT 서비스 왓챠도 ‘궁금해, 너라는 BL’이라는 이름으로 BL 콘텐츠를 구성하고 있다.

  류호현 연구교수는 대형 OTT 플랫폼이 BL 콘텐츠에 질적 변화를 일으켰다고 밝혔다. “BL 콘텐츠는 보다 많은 대중을 타깃으로 고려하게 됐어요. 그리고 텍스트보다 대중파급력이 더 강한 영상 콘텐츠로 제작되면서 그에 맞게 소재가 다양해지고 스토리 구성이 정교해졌죠. 장르적인 결합과 확장에 이어 섹슈얼리티 묘사에 있어 수위가 조절되는 등 내적인 변화 양상이 나타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불편함을 딛고 나아갈 두 사람의 로맨스 
  로맨스 장르에서 폭력적인 요소를 미화할 수 있다는 우려는 여러 차례 제기되는 문제로 BL도 예외는 아니다. 웹툰 <킬링 스토킹>에서는 좋아한다는 이유로 스토킹하는 장면이나 성추행, 성범죄 등의 요소가 그대로 나타나 있다. 해당 작품은 잔인하거나 충격적인 장면에 대한 주의 문구를 달았다. 류호현 연구교수는 BL 속 폭력성이 정형 BL의 문법에서 비롯됐다고 말했다. “강제성 높은 섹슈얼리티는 ‘정형 BL’에서 중요한 서사적 장치로 기능했습니다. 원래 이성애자인 남성을 그렇지 않은 상태로 진입시켜야 하는데 그런 계기는 보통 강제적인 상황에서 발생하도록 그려졌죠. 이러한 선을 넘는 장치에는 윤리적인 쟁점이 떠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 대중화된 BL, 특히 영상화된 BL 콘텐츠에서는 강제적 섹슈얼리티 요소가 잘 보이지 않는 듯해요.”

  BL 콘텐츠와 실제 성 소수자의 삶을 구분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예능 프로그램 <남의 연애>에 출연한 이정호 출연자는 한 언론사 인터뷰에서 ‘BL과 퀴어는 다르다’며 ‘지금 저희가 하고 있는 건 BL물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이어 ‘그건 판타지고 퀴어는 저희 인생’이라는 말로 BL과 실제 성 소수자의 삶을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고 말했다.

  류호현 연구교수는 BL 콘텐츠와 현실의 차이를 고민할 필요는 있다고 밝혔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냥 판타지라는 태도로 넘기기엔 실제 당사자가 우리 사회에 엄연히 존재하니까요. 물론 BL이 완전히 성 소수자 당사자의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는 말은 억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대중화된 BL은 이를 의식하고 성 소수자의 현실을 반영하려 노력하는 것 같아요.”

  대중화의 영역으로 퍼지는 BL은 이제 양지로 떠오르고 있다. A씨는 BL 콘텐츠의 양지화에 적극 찬성하는 입장이다. “BL 세계관은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는 게 너무 당연한 세계관이어서 그런 세계관을 많은 이들이 꼭 느껴봤으면 좋겠어요. 레즈비언이든 게이든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세상이 오면 좋겠습니다.”

  모든 로맨스 작품에는 누군가의 환상이 반영되기 마련이다. BL도 어떤 사람의 환상 속에서 탄생했을 테다. 그 환상이 지나치지 않고 아름다운 로맨스로서, 작품을 보는 모든 이들에게 설렘으로 남아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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