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틸리티 플레이어’는 각 포지션마다 구분이 명확한 야구에서 다양한 수비 위치를 소화할 수 있는 선수를 뜻하는 말이다. 야구장뿐만 아니라 야구계에서 다양한 위치에서 능력을 인정 받은 유일한 ‘유틸리티 플레이어’가 있다. 장정석 동문(경영학과 92학번)은 야구계 내에서 다양한 직책을 거치며 그 누구보다 많은 도전과 경험을 쌓았다. 어느 자리에서든 팀의 승리를 위해 살아온 그. 다시 한번 성공의 득점을 위해 달려가고 있는 장정석 동문을 만나봤다.  

장정석 동문이 기아 타이거즈 선수 시절 타격을 하고 있다.사진 제공 기아 타이거즈
장정석 동문이 기아 타이거즈 선수 시절 타격을 하고 있다. 사진 제공 기아 타이거즈

“모든 게 다 배움이에요. 장점을 배우는 것도 배움이지만 단점이 무엇인지 배우는 것도 배움이거든요. 성공하기 위해서는 좋은 것은 따르고, 안 좋은 것은 하지 않아야 하니까요. 다양한 경험을 통해 배운 부분들이 제 삶에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야구장 위에서 직접 경기를 뛰는 선수부터 야구단의 살림을 도맡는 운영팀장, 긴 시즌을 치르며 경기를 지휘하는 감독, 시청자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해설위원, 그리고 야구단을 이끄는 단장까지. 야구계에 몸담았던 이들 중 장정석 동문보다 다양한 자리에서 야구 경기를 지켜본 사람은 없다.  
그야말로 야구장 속 만능 살림꾼의 모습을 보여준 장정석 동문은 어느 위치에서나 자기 능력을 백분 발휘했다. 모두가 부러워할 자리를 거쳤지만 그가 꿈을 펼치는 경기장의 불은 여전히 꺼지지 않았다. 지금 장정석 동문이 때린 타구는 담장 넘어 더 멀리 날아가고 있다. 그가 지금까지 치러온 인생 경기의 하이라이트를 따라가 보자. 

  -야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어릴 적부터 운동 신경이 좋았어요. 초등학교에서 달리기, 공 던지기 육상 대표 선수도 했었죠. 그러면서 야구부 감독님이 저를 좋게 봤던 것 같아요. 제게 야구 한번 해보지 않겠냐고 물으셨죠. 일종의 스카우트인 셈인데요. 그때부터 야구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원래도 야구를 좋아했어요. 어릴 때 동네에서 형들이 야구 하는 걸 구경하기도 했죠. 커서는 당시 인기가 많았던 고교야구도 많이 보러 다녔습니다.” 

  -중앙대에는 어떻게 입학하게 됐나. 
  “저를 중앙대로 스카우트한 감독님이 고등학교 은사님이에요. 원래 다른 대학으로 입학할 수도 있던 상황이었는데 고등학교 은사님을 따라 중앙대에 가게 됐죠. 제가 입학할 때 체육 총괄 부장님이 과거 중앙대 농구부 감독이셨던 정봉섭 감독님이셨는데 입학 후 정봉섭 감독님께서 저에게 잘해주셨던 기억이 남네요.” 

  -중앙대 야구부 생활은 어땠나. 
  “재밌는 추억이 많아요. 체육부가 안성캠에서 합숙했거든요. 그 당시에는 축구부, 야구부 합숙소가 붙어있고 농구부는 체육관에 합숙소가 있었어요. 3개 운동부가 안성캠에서 매주 합숙 생활하고 주말에만 외박을 나가며 운동했습니다. 3개 운동부 간 교류도 있었죠. 야구부와 축구부가 농구 경기를 하는 등 서로 다른 종목을 겨루기도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3개 부가 1년에 한 번씩 체육 행사를 했어요. 되게 재밌었죠.” 

  -안성캠에서 추억이 많겠다. 
  “안성캠 예술대, 체육대 체육대회와 가을 축제가 기억에 남아요. 유명 가수들도 많이 왔었는데요. 제가 중앙대를 다닐 때 김희선, 고소영, 염정아 등 스타 연예인들이 중앙대에 많이 재학 중이었습니다. 연예인이 오면 학교 근처 떡볶이집 사장님이 친구들에게 삐삐를 칠 정도였죠. 그러면 친구들이 우르르 배우들을 보러 가기도 하고요.” 

  -중앙대 재학 시절 기억 남는 순간은.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잘한 것만 기억하잖아요.(웃음) 중앙대 선수 시절 포지션이 외야수였어요. 대학교 1학년 때부터 단 한 경기도 후보였던 적이 없었죠. 그때는 야구 잘했답니다. 4학년 때는 경기도 대학 대표로 전국 체전에 나갔었던 적이 있습니다. 준결승에서 제가 역전 홈런 쳤던 게 기억나네요. 학교에서 정말 좋아했죠. 고기도 엄청 사줬어요. 결국 결승에서 졌지만, 결승 진출할 당시에는 매우 좋아했습니다.” 

  -선수 생활은 어땠나. 
  “야구 유니폼을 벗고 되돌아봤을 때 프로 선수 10년은 대학 시절 프로에 진입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만큼 열심히 하진 않았던 것 같아요. 프로 선수라는 꿈을 꿨지만 정작 프로에 가서는 노력을 안 했던 것이 후회되더라고요. 신인 때는 운이 좋아서 3년 정도는 계속 1군에만 있었어요. 행운을 갖고 프로 생활을 시작한 건데 그때 제가 노력을 조금만 더 했다면 더 좋은 성적, 선수로 팬들에게 기억에 남지 않았겠느냐는 생각이 들어 아쉽습니다.” 

  -선수 생활 중 기억 남는 순간은. 
  “1998년도에 우승한 것이 기억에 남아요. 신인 시절이었죠. 입단했던 현대 유니콘스가 삼성 라이온즈와 재계 라이벌이었습니다. 그래서 삼성과 붙으면 프런트에서도 공격적으로 투자할 때였어요. 그 팀과 혈전을 벌이고 있던 날이었는데 제가 역전 만루 홈런을 쳤었습니다. 지금도 제 선수 생활을 기억하는 팬이라면 그 경기는 다 기억할 것 같아요.” 

  -선수 생활을 마무리한 이유는. 
  “현대 유니콘스에서 7년을 선수로 뛰고 지금 단장으로 있는 기아 타이거즈로 트레이드가 됐어요. 이곳에서 선수 생활을 3년하고 은퇴했습니다. 사실 은퇴라기보다는 방출이라는 단어가 어울렸죠. 하지만 방출이 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어요. 당시 아이들도 있었기 때문에 선수를 그만두고 뭘 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프런트, 코치, 선수 등 다양한 제안이 들어왔어요. 선수 생활을 계속 이어갔다면 돈은 더 많이 벌었겠지만, 가정이 있었기에 안정적인 프런트 업무를 선택했죠. 그게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요. 거기서부터 승승장구해서 운영팀장, 감독, 해설위원, 단장 등 야구단 안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다 해봤잖아요.” 

장정석 동문이 기아 타이거즈 선수 시절 타격을 하고 있다. 사진 제공 기아 타이거즈
장정석 동문이 기아 타이거즈 선수 시절 타격을 하고 있다. 사진 제공 기아 타이거즈

  -2017년 히어로즈 감독으로 부임해 3년 차에는 준우승을 거뒀다. 
  “감독 시절은 쾌감도 있었지만, 인생에서 제일 힘들던 때였어요. 많은 사람 앞에 서 있으면서 책임감도 무겁고 보여줘야 하는 게 많은 자리이니까요. 물론 일반 사람들에게 와닿지 않을 수 있어요. 감독이라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 자체가 어렵기 때문에 제 이야기가 주제넘게 들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하지만 감독이라는 자리의 무게감은 굉장히 크답니다. 그래도 2019년도 한국 시리즈까지 진출하는 등 팀이 차곡차곡 발전하는 모습을 볼 때는 쾌감도 들고 행복했죠.” 

  -감독 시절 어떻게 팀을 운영했나. 
  “우리나라에 있는 프로야구 10개 팀의 감독과 단장이 팀을 운영하는 방법은 다 다르겠죠. 제겐 확고한 바람이 있는데요. 선수들의 건강과 선수 생명을 길게 가져가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요. 감독이 자기만 생각하면 선수들을 혹사할 수 있어요. 감독으로서 성과를 내려고 하면, 특정 선수에게 활약을 지나치게 요구하게 되죠. 근데 제가 욕심을 내려놓으면 시즌을 운영하는 방법 등이 모두 변해요. 이런 점을 프런트 시절 여러 감독을 보며 배웠습니다. 저는 감독으로서 선수들이 건강하게 불혹이 넘어서도 야구를 오래 하길 바랐죠.” 

  -감독 시절 압박감을 이겨낸 방법은. 
  “스트레스를 풀 방법이 정말 없더라고요. 감독하기 전에는 골프 치는 것을 좋아했는데 감독하면서 골프조차도 재미가 떨어졌죠. 제가 술도 잘 못 마셔서 술로도 스트레스를 풀 수 없었습니다. 쉬는 날 두건을 쓰고 자전거를 타며 한강에 왔다 갔다 하는 게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법이었던 것 같아요.” 

  -운영팀장부터 단장까지. 여러 직책에 기용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주변에 운이 참 좋은 사람 한 명씩 있잖아요. 저는 그런 운이 좀 있는 것 같아요. 어느 자리에 가든 저를 굉장히 좋게 봐줬습니다. 근데 운이라는 것도 노력하지 않으면 따라오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어떤 일이든 준비하지 않으면 성공이 따라오지 않거든요. 경기 때도 해설위원이 ‘운 좋은 안타가 나온다’라는 표현을 하고는 합니다. 하지만 그 운 하나를 위해 선수는 밤을 새우며 연습했을 거예요. 행운이 따르고 노력이 있다 보니 다양한 기회를 받은 게 아닐까 싶어요.” 

  -가장 인상 깊었던 직책은. 
  “다 좋아요. 거쳐온 직책 모두 인상에 남을 만한 자리였습니다. 감독이든 단장이든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자리잖아요. 지금 맡은 단장직도 제가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에 큰 도움이 될 거라 믿습니다. 그래도 가장 인상 깊었던 직책을 하나만 고르자면 감독이죠. 힘들고 무거운 자리였는데도 불구하고 보람을 많이 느꼈습니다. 단장직을 수행할 때 팀이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면 감독과 비슷한 보람을 느끼지 않을까요?” 

  -다양한 업무 환경에 적응하는 노하우가 있나. 
  “‘외유내강’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큰일이 벌어져도 겉으로는 큰일이 아닌 것처럼 유연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많은 부탁과 시련이 있어요. 하지만 일에 있어서만큼은 냉정함을 유지하는 강한 마음도 필요하죠.” 

  -중앙대 후배들에게 조언 한마디. 
  “기회라는 건 자주 오지 않아요. 하지만 살면서 누구에게나 기회는 분명히 옵니다. 사람들이 준비되지 않아 기회를 놓치는 경우도 종종 있죠. 요즘 대학생들은 취업에 대한 스트레스도 많을 거고 사회에 나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에 대한 고민도 많을 텐데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선택하는 게 옳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 일을 선택했다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준비를 잘했으면 좋겠습니다.” 

9월 2일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 단장실에서 장정석 단장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사진 정해균 기자
9월 2일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 단장실에서 장정석 단장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사진 정해균 기자

  -당신에게 중앙대란?
  “제가 어딜 가나 중앙대는 항상 제 이력서에 남아 있어요. 제 이름을 포털 사이트에 검색 해봐도 중앙대 출신이라는 문구가 있잖아요. 중앙대가 학창 시절의 마지막이기 때문에 더욱더 기억에 남아요. 제게 중앙대는 항상 좋은 기억으로만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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