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작가 토미 웅게러의 유작 <논스톱>을 번역했다. 전쟁, 폭력, 공포, 혐오 등과 평생 정면 대결해온 그의 마지막 작품다웠다. 지구는 파괴되고 인류는 달로 이주한 종말론적인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하지만 웅게러는 역시 그답게 희망의 빛, 위로의 온기, 벅찬 사랑을 잊지 않고 점점이 남겨 우리가 찾아갈 길을 알려준다.
  
  지구에 홀로 남은 인간 바스코는 자기 그림자가 이끄는 대로 ‘딱 때맞춰’ 위험을 피하며 나아간다. 낯선 ‘생명체’가 아내에게 전해달라는 편지를 들고. 그 아내는 갓 낳은 아기 포코를 그에게 부탁한다. 아기를 품에 안고 다시 험한 길을 거친 바스코 앞에 커다란 케이크 모양 건물이 신기루처럼 나타난다. 없는 게 없는 그 안에서 둘은 평화롭게 나이 들어간다.
 
  웅게러의 다른 책과 달리 그 책의 그림은 자로 잰 듯한 선, 단조롭고 매끈한 색채, 늘 비슷한 구도와 거리감으로 일관하는 장면 등으로 사뭇 건조했다. 웅게러 맞아? 싶을 정도였다. 함의 가득한 단어들, 영문 텍스트와 독문 텍스트 사이의 미묘한 차이들 때문에 번역은 힘겨웠다. 하지만 그 힘겹고 건조한 번역 뒤의 교열단계에서 나는 비로소 책의 진가를 보게 되었다. 매번 다른 장면에서 가슴이 덜컥 내려앉거나 콧등이 시큰해졌다.
 
  그림자가 보스코를 이끌어준다는 설정은 의미심장했다. 어둡고 비밀스럽고 부정적인 뉘앙스가 강력한 그림자. 하지만 그림자는 인간의 초월적인 힘의 상징이기도 하다. 안데르센의 그림자가 그 힘으로 주인인 인간을 파멸시켰다면, 웅게러의 그림자는 인간을 구원한다. 구원은 어디에서 오는가? 첫 번째 답이다.
 
  두 번째 답은 포코에게서 보인다. 바스코가 갓 태어난 어린 생명체를 품에 안는 장면에서 웅게러는 ‘그에게 돌봐줄 존재가 생긴 것이다. 딱 때맞춰!’라고 쓴다. 여기서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너는 파괴된 지구에 홀로 남은 인간인가? 쓰나미와 무너지는 건물과 꺼지는 길바닥 사이에서 누군가 너를 살려주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돌보아줄 존재를 찾아라. 어리고 무력하고 보드라운 존재를. 그런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세 번째는 나뭇가지다. 바스코와 아기는 ‘나뭇가지 하나 없는 숲’을 지난다. 나무가 아니라 콘크리트 기둥 빽빽한 숲이다. 그런데 그 콘크리트 기둥에서 연초록 작은 잎을 두어 개 매단 작은 가지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금세라도 화면에서 사라질 듯 구석 자리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가지. 역시 눈물이 쏙 빠지는 순간이다.
 
  발밑에 깔려 있는 어두운 그림자, 제힘으로는 아무것도 못하는 여린 생명, 누구의 손에도 쉽게 꺾일 나뭇가지. 멸망 직전의 지구를 보는 독자의 마음을 뜨겁게 채우는 것들이다. 죽음직전의 작가가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해 남겨준 것들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가?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어떤 것이다. 웅게러는 그렇게 말하고 눈을 감았을까.

 

김인애 강사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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