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따갑다. 삼삼오오! 교정은 다시금 청춘들의 물결로 넘쳐난다. 얼마나 그리워했던 일상인가? 당연했던 일상을 다시 마주하니 반갑고, 참을 수 없을 정도의 지난(持難)한 과정을 이기고 그 일상의 주인공으로 씩씩하게 돌아온 청춘들이 대견하고 고맙다.

  어른들은 이야기한다. “살다 보면 별별 일이 많다”고. 그 “별별 일”을 내가 청춘이었을 때는 몰랐다. ‘왜 이리 힘들지? 왜 나만? 어떻게 해야 하나?’라고 속만 끓이다 나중에는 ‘어떻게 한들?’이라며 애태우고, 발을 동동 굴린 그 기억들이 내 의식과 몸을 지배했던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덜 아프려고, 덜 외로우려고, 덜 지치고 싶어서 택했던 많은 선택이 결국 나를 더욱 힘들게 했다는 것을 깨지고 넘어지고 나서야 알게 됐다. 자기 객관화가 되지 못하다 보니 어떤 상황이든 자기방어에 급급했던 탓에 성장보다는 점점 후퇴하는 꼴이 돼버린 것이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고 느꼈을 때 비로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마주할 수 있었고 지금의 나를 만날 수 있었다.

  살다 보면 구름 한 점 없는 햇빛 아래에 있을 수도 있고,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기도 하고 구름에 가려 절망에 빠질 수도 있다. 심지어는 태풍 ‘힌남노’와 ‘난마돌’처럼 거센 폭풍우가 내리쳐 내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인생은, 산다는 것은 이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때로는 선선한 바람이, 때로는 훈풍이 나를 감싸기도 한다. 인생은 그렇다.

  가을의 들녘이 우리네 인생살이를 대변해주는 것 같다. 지난 폭풍에도 견디며 영글게 익어가는 벼 이삭의 황금빛 들녘과 탐스럽게 익어가는 각종의 열매들을 보면 어둡고 힘들어 희망이 보이지 않을 것만 같은 우리네 인생사, 살아가는 것과 산다는 것 역시 견디다 보면 희망과 보람의 열매와 결실로 맺어질 것이다.

  2년여 만에 마주한 젊은 청춘들의 그간의 ‘견뎌옴’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었다. 그렇지만 오랜 경험을 통해 느껴지는 것이 있다. 말없이 계속 견뎌가고 있는 청춘과 견뎌야 되는 초입에 들어선 청춘, 터널의 중앙에 있는 청춘 등 다양한 청춘들이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어려움을 마주했을 때 극복해낼 힘도, 방법도 모르고 극복해내야만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전전긍긍 속을 끓이고 있다면 난 기꺼이 ‘견디는 것’이 또 하나의 방법임을 말해주고 싶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견디는 것’이 최고의 해결책이다.

  가을의 정취를 한껏 안겨주는 안성캠 강의가 있는 날, 교문 초입에 즐비하게 늘어선 은행나무 가로수 길을 통과하는 순간 난 영화의 주인공이 된다. 특히 단풍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의 그 멋진 풍경은 지금도 나를 설레게 한다. ‘견디는 것’을 생각하면서 교정의 젊은 청춘들과 함께하고 싶은 나태주 시인의 <풀꽃·3>을 되뇌어 본다.

  기죽지 말고 살아봐

  꽃 피워봐

  참 좋아.

박영희 강사
교육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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