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칼럼(?)의 제목은 “강단 사색”이다. 그렇지만 사실 요즘 거의 모든 강의실에는 ‘이야기하는 단상’[講壇]이 없다. 그래서인가? ‘생각하여 찾는’[思索] 행위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지만 나는 낙천주의자이기에 걱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강단이 없어져서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사색이 싫어서는 아니다. 강단이 강요하는 일방성이 싫은데 그것이 사라져서 다행이고, 사색해야 하는 그 내용이 곱잖아서 싫은데 그렇지 않아도 괜찮기 때문이다.
 
  철학 분야에서 강단이 상징하는 것은 긍정적 이미지가 아니다.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하 11테제에서 이제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이렇게 저렇게 해석하기만 했는데, 중요한 것은 세계를 어떻게 변혁하는가에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의 강단은 바로 이런 해석과 이론만을 상징한다. 그러나 철학, 특히 동양에서 철학은 반드시 실천을 전제한다. 그것은 인간을 ‘자신을 창조하는 존재’로 규정한다. 그러므로 공부(工夫) 또한 학습만이 아니다. 객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추론하고 해석하는 작업만이 아니다. 동양에서의 공부는 오히려 “사람 노릇하는 것을 배우는[學以學爲人]” 작업이다. 그래서 선생과 학생이 직접 대면하여 ‘배우고 묻는[學問]’ 것이 중요하다. 이때 학생은 자신에게 가장 절실한 의문을 제기하고, 선생은 학생의 수준과 상황을 고려하여 서로 같은 질문에도 각각 다르게 대답해준다. “학생의 수준에 따라 가르침을 베푸는[因材施敎]” 것이다. 이런 가르침은 위대한 스승의 공통된 특징이다.
 
  강단은 이런 작업을 불가능하게 한다. 오직 지식과 이론의 전달만을 강요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강단이 지식과 이론만을 요구한다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맺어야 할 ‘관계성’마저 배척한다는 점이다. ‘학문’은 선생과 학생의 관계를 벗어나서 독립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배우고 묻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과학science’은 어쩌면 가능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독립적인 연구를 진행할 수 있기 전까지는 ‘배우고 묻는’ 과정과 관계성이 부정될 수 없다. 그럼에도 지금 우리는 ‘강단’을 강요받는다. 이때의 강단은 또한 대단위 강좌를 불러낸다. 교수 한 사람이 수백 명을 대상으로 강의하는 대단위 강좌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 그런 ‘강단’을 요구하는 것은 ‘학문’하는 전당에서 사라져야 할 천박한 ‘자본주의’다.
 
  이런 생각들이 사색은 아니리라. 그러나 그런데도 이런 글을 쓰는 까닭은 이를 통해서 사색할 수 있는 분위기가 이루어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는 사색은 단순히 ‘생각하여 찾는’ 행위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앞에서 말했던 ‘자기 창조’의 준비 단계를 가리킨다. 우리 먼저 스스로 어떤 자신을 창조할지 생각해보자. ‘이야기하는 단상’을 떠나서 너와 내가 우리가 되고, 그래서 ‘사람 사는 세상’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생각해보자. 강단에서 사색하는 내용을 요구받았는데, 이렇게 글이 끝나도 되는지 모르겠다. 

안재호 교수
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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