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나는 주거공간과 사무실로 사용해오던 2층 주택을 헐고 5층 다세대 주택을 지었다. 옥상 공간을 전용으로 사용하고 싶어 공용계단을 4층까지만 두었다. 4층 현관문에 들어서면 실내계단을 통해 5층으로, 5층 거실에서 옥상정원까지 이어지게 설계를 했다.

  옥상정원은 거실의 높은 층고와 눈높이 이상의 가벽을 이용해 3면의 시야를 주변 건물로부터 차단하고 저 멀리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오도록 한쪽 면만 시야를 확보했다. 그 앞에는 작은 화단을 만들었다. 다세대주택의 프로토타입에서 조금 벗어난 이 건물의 허가를 받는데 꽤나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애써 마련했던 옥상정원도, 한켠에 마련해둔 작은 화단도 세월과 주인의 무심함은 이겨낼 방도가 없었나 보다. 하루하루 바삐 살다 보니 계단 몇 개만 올라가면 있는 옥상을 들여다볼 잠깐의 틈도 없었다. 애정을 두었던 화단에도 잡초만 무성해졌다.

  코로나19 이후 20년 넘게 오가던 캠퍼스에서의 강의를 집에서 화상으로 진행해야 했다. 강의뿐만 아니라 밖에서 하던 일의 7, 8할을 집안에서 하게 됐다. 4층 방 한 개는 화상회의실이 됐고, 5층 거실은 작업실을 겸하게 됐다. 주로 서서 일하는 것에 익숙했기에 자연스럽게 거실에서 옥상정원으로 나가는 일이 잦아졌다. 돌아서면 쑥쑥 자라있는 옥상화단의 잡초가 감당이 되질 않았다. 차라리 잡초가 자랄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주자 싶었다. 잡초자리 양옆에는 조그마한 해태상을 옮겨 놓기로 했다. 며칠 뒤 잡초는 원래 그곳이 제 집인 것마냥 자리를 잡았고, 돌로 된 양옆의 있는 해태상과도 자연스레 어우러졌다. 나는 잡초에게 물을 주었다. 쑥쑥 높이 자란 잡초 끝에서 꽃이 폈다.

  새벽의 새소리가 밤늦게까지 일을 마치고 겨우 잠드는 나를 자꾸 깨운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해뜨기 전 맑은 새벽의 공기를 마시며 한껏 자란 잡초와 세월이 느껴지는 해태를 바라본다. 저 너머 ‘ㄱ’자로 꺾여 있는 전봇대 끝에 참새 한 마리가 앉아 있다. 나를 깨운 그 녀석은 금속으로 만든 전봇대 끝 구멍으로 쏙 들어가 버린다. 작은 참새의 보금자리일까. 참새가 먹을 수 있는 간식을 화단에 놓아뒀다. 스틸하우스의 주인인 녀석은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먹이만 깨끗이 비우고 가버린다. 고맙단 인사도 없다.

  잡초는 씨를 뿌리지 않아도 뿌리를 내리고 거역하지 못할 생명력으로 스스로를 키워낸다. 사람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무성한 그 풀에게 ‘잡’초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람 손에 키워지지 않는 참새는 온갖 ‘잡’새 중에 하나다. 인간은 멋대로 기준과 경계를 만들고 그것에 호락호락하지 않은 무언가에 ’잡’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길고 길었던 팬데믹 시기, 나는 잊고 살았던 공간을 다시 찾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애써 길들이지 않아도 꿋꿋이 살아가는 잡초, 이웃집 참새를 만났다.

이기옥 교수
실내환경디자인전공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