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비평 부문 당선: 윤채라 학생(문예창작전공 3) <백白의 시선>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 스틸 이미지. 사진 출처 NAVER 영화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 스틸 이미지. 사진 출처 NAVER 영화

해당 영상비평은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의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를 다룹니다.

  눈이 먼 남자, 그리고 전염
  영화는 신호등을 익스트림 클로즈업(Extreme Close-up)샷으로 보여주며 시작한다. 빨강과 초록이 강렬하게 부각되는 색채 이미지는 이후 전개되는 영화의 미장센과 상당히 다른 연출이다. 눈먼 자들이 보는 세상인 하얀 이미지, 그리고 이와 대비되는 그림자의 요소를 이용해 전반적으로 강한 콘트라스트를 준다. 명암의 대비를 극대화하는 영화의 미장센을 생각한다면, 신호등의 색채는 영화에 등장하는 유일무이하게 강한 채도를 가진 색감이다. 영화의 시작에서 시각적 자극을 경험한 관객에게 이후 펼쳐지는 장면들-색과 빛을 빼앗긴 듯 암울한 도시의 전경과 비극적인 격리 병동-은 더욱 비극적으로 다가온다.

  최초 감염자는 '일본 남자'이다. 도로 한복판에서 눈이 멀어버린 남자는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하는 경험을 하며 행인들의 도움을 받아 집에 가까스로 도착한다. 보통 눈이 먼다는 것은 앞이 깜깜해짐을, 즉 검은 세상을 마주함을 의미하지만 일본 남자는 '눈 안에서 하얀 게 흘러내'린다며 눈이 하얗게 멀어버린다. 이때 보이지 않는 눈으로 차도를 방황하는 남자의 시선을 관객에 이입시키기 위해 장면 자체를 블러(blur) 효과를 통해 흐릿하게 연출한다. 이는 남자를 '보고 있는' 관객의 시선을 멀어버리게 함으로써 눈먼 자들의 시선과 동일화하고 잠깐이지만 그들의 상황에 이입하게 만든다.

  집에 도착한 일본 남자는 자신을 도왔으나 자신과 집에 과도한 관심을 보이는 '행인'을 쫓아내고 잠이 든다. 시간이 흐르고 집에 돌아온 '일본 남자의 아내'는 눈이 멀었다는 남편의 말에 병원에 전화하기 위해 부엌으로 들어간다. 여기서도 주목할만한 미장센이 등장한다. 화면을 가득 채운 부엌은 회전문을 기준으로 두 개의 공간으로 나뉘고 남자와 아내는 각각의 공간으로 분리된다. 처음 아내가 부엌으로 들어왔을 때는 창문을 통해 들어온 빛에 의해 다른 사물이 잘 보이지 않는다. 명암 중 '명'이 극대화된 장면이다. 그러나 곧이어 남자가 부엌으로 따라 들어오면서 화면은 급격히 어두워지고 콘트라스트가 매우 강한 장면이 연출된다. 눈먼 남자의 유입을 기준으로 부엌 내부와 인물들이 모두 '암'의 상태로 진입하며 관객은 오직 그들의 형체만을 파악할 수 있는 정도가 된다. 눈이 먼 남자와 눈이 멀 여자. 전염에 대한 복선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후 일본 남자와 접촉하고 같은 공간에 있었던 이들이 같은 증상을 겪기 시작하고 그의 아내와 행인 역시 눈이 멀어버린다. 그리고 그를 진료했던 '안과 의사' 역시 눈이 멀고 그와 '안과 의사의 아내'는 최초의 격리병동 입성자가 된다.

  격리병동, 질서 그리고 갈등
  격리병동에 들어온 안과 의사와 그의 아내는 시설을 둘러본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안과 의사의 아내는 눈이 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녀는 시설의 상태를 남편에게 이야기해주며 열악함에 대해 탄식한다. 곧이어 다른 감염자들이 들어오고 그중에는 최초 감염자인 일본 남자, 행인, 병원 환자들(여자 환자, 아이 환자, 한쪽 눈이 먼 남자)도 포함되어 있다. 이후에도 많은 수의 감염자들이 들어오면서 각 방의 대표자를 선출한다. 이때 격리병동 최초 입성자이자 1호실의 대표인 안과 의사는 비록 눈은 멀었으나 병동 안에서도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애쓴다. 격리 첫날부터 몸싸움을 벌이는 일본 남자와 행인의 싸움을 적극적으로 중재하고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도 인간의로서 삶을 영위하기 위한 기본적인 생활 반경과 수칙을 정한다. 그리고 모든 질서에는 의사 아내의 도움이 뒷받침되어 있다. 시설 내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은 그녀 없이는 의사도 무력한 존재나 마찬가지이다. 방치에 가까운 정부의 빈약한 지원과 열악한 시설 환경 속에서도 나름의 질서와 생활 체계를 정립해 나간다. 그러나 시각이 결여된 인간에게 인간적인 삶의 영위는 무의미함을 보여주듯 감염자들은 점차 본능적 욕구에 충실한 야만적인 모습으로 변해간다. 타인을 보지 못하고 타인 역시 나를 보지 못하니 시각적인 교양은 이들에게 사치가 된다. 나체로 병동을 돌아다니고 복도에서 배설하며 그 옆에서 식사한다. 이 모든 장면을 목격하는 이는 안과 의사의 아내뿐이다. 격리 병동 안 작은 아포칼립스. 희망이 결여된 풍경에 의사 아내는 지쳐만 간다. 그런 와중에 감염자들의 시신까지 그들 스스로 수습해야 하고 마침내 이에 협조적이지 않은 3호실 감염자들과의 갈등이 병동 내 재앙의 불씨를 당긴다.

  독재, 자유 그리고 치유
  3호실의 대표인 '악당'은 음식 창고를 점령하고 소지하고 있던 총을 이용해 병동 사람들을 위협한다. 그렇게 격리 병동 내 독재가 시작되며 하나의 작은 사회가 형성된다. 인간 생존의 기본 요소인 '식食'을 점령한 악당은 음식의 대가로 돈을 요구한다. 실질적으로 병동 내에서 돈은 쓰임이 없음에도 돈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못하는 악당의 모습이 물질에 대한 인간의 탐욕을 역설한다. 다른 관점에서 눈먼 증세가 완치되고 병동에서 나가 돈이 필요함을 가정했을 때 이미 눈먼 자들의 도시가 되어버린 외부의 상황은 더 큰 역설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잠깐의 격리를 생각하고 들어온 감염자들이 소지하고 있던 돈과 귀중품은 일주일도 되지 않아 바닥나고 이에 악당과 3호실 일당은 돈이 없으면 '여자'를 바치라고 말한다.

  음식과 인간의 존엄. 그 어느 것도 포기하기 힘든 상황. 이에 대해 여러 논쟁이 오가던 중 한 여자가 자신이 3호실에 가겠다고 자진하고 뒤이어 안과 의사의 아내, 일본 남자의 아내, 여자 환자를 비롯하여 8명의 여자가 자신을 희생해 음식을 받아오겠다고 말한다. 그렇게 3호실로 향한 여자들은 동물의 원초적인 욕구만 남은 남자들을 마주하고 인간의 존엄을 잠시 내려놓는다. 그 과정에서 한 여자가 살해당하고 반복되는 악당의 만행에 의사의 아내는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챙겨놓았던 가위로 그의 목을 찔러 살해한다. 이에 분개한 3호실 일당은 전쟁을 선포하지만, 병동 내 화재가 발생하면서 극적인 자유를 맞게 된다.

  방치된 격리병동의 문을 열고 그들이 마주한 세상은 눈먼 자들의 도시였다. 의사의 아내를 제외하고 모든 이의 눈이 멀어버린 세상. 무정부, 무질서, 카오스가 점령한 도시는 아포칼립스의 전경을 담고 있었다.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은 의사 아내의 인도 아래 안과 의사, 일본 남자와 아내, 여자 환자, 아이 환자, 한쪽 눈이 먼 노인 무리는 의사 부부의 집으로 향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자유를 느낄 수 있는 감각이었다. 격리 시설의 문을 열고 나가 세상을 볼 수 없으니 시각 외의 감각이 필요했다. 시각장애인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이 세상에 나 혼자만 있는 것 같은 고독함, 외로움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두려움이라고 한다. 하루아침에 눈이 멀어버린 이들이 느끼는 고독감과 거기에서 오는 공포는 실로 엄청났을 것이며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수밖에 없다. 이에 격리병동 내에서는 서로를 만지는 '촉각' 그리고 한쪽 눈이 먼 남자가 가지고 있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의 '청각'을 통해 치유 받았다. 그렇다면 자유를 되찾은 그들에게 자유를 상기시켜줄 감각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비'였다. 격리병동을 나와 안식처가 되어줄 집으로 가는 길에서 내리는 비를 맞으며 그들은 자유를 느낀다. 열악한 격리 환경에서 제대로 씻지 못한 때가 비에 씻겨 내려감과 동시에 피부에 닿아 흘러내리는 빗물의 촉감은 격리시설 지붕 아래가 아닌 뻥 뚫린 하늘 아래 있다는 해방감과 동시에 자유를 상기시켜 줄 수단으로 충분했다. 나아가 비에 젖은 서로를 쓰다듬고 껴안음으로써 자유를 넘어 치유의 경험을 가진다.

  다음 날 최초 감염자였던 일본 남자의 눈이 보이기 시작하고 감염자들은 희망을 느끼며 기뻐한다. 유일한 면역자였던 의사 아내는 기뻐하는 한편 자신의 눈이 멀게 될까 봐 은근한 두려움을 느끼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뭐랄까… 빛이 스며드는 우윳빛 바닷속에서 헤엄치는 기분이에요."

  우윳빛 바다처럼 하얀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간다. 눈먼 자들의 도시가 거기 그대로 있었다.

  왜 눈이 멀었는가 : 욕망에 깃든 타인의 시선 
  눈먼 자들의 이야기를 마무리한 이 시점에서 궁금증이 생긴다. 왜 눈이 멀었는가? 그리고 왜 안과 의사의 아내는 눈이 멀지 않았는가? 안과 의사와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차이가 존재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대답하기에 앞서 자크 라캉의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욕망은 기본적으로 주체자의 내부에서 발현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에 욕망이란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성질의 심리 요소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이러한 욕망의 기원이 내부가 아닌 외부에 있다는 라캉의 말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인간을 사회적 동물로서 정의한다면 라캉의 말을 이해하게 된다. 사회 안에서 끊임없이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인간은 타인, 즉 외부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외부 환경, 타인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이며 이는 상호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이는 욕망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타인의 긍정과 부정을 함께 공유하고 동일화하는 것이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자아 내부에서 발현된 욕망이 아닌 타자에게서 받은 욕망을 건강한 욕망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내 안의 자아에 집중한 욕망은 삶의 건강한 자극과 원동력이 된다. 욕망과 의욕 사이에서 건강한 욕망은 삶의 의욕으로 치환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인의 시선을 쫓는 욕망은 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과정에서 이기심을 초래한다.

  눈이 먼 모든 인구의 이유를 분석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으나 (영화에 따르면 전 세계 질병 분야의 석학들도 문제의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다.) 영화의 주요 인물들을 중심으로 눈이 머는 원인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그 원인은 크게 '원초적 욕구'와 '이기심'이라는 두 가지의 요소로 정리할 수 있다. 먼저 최초의 감염자인 일본 남자를 보자. 그는 운전 중 눈이 멀게 되면서 매우 위험한 상황에 놓이지만, 행인의 도움을 받아 집으로 무사히 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 남자는 행인의 도움을 받게 된 상황에 안심하는 한편 끊임없이 그를 의심한다. 적색 신호로 출발하지 않는 행인에게 왜 출발하지 않느냐고 물음으로써 불안과 의심의 낌새를 내비친다. 이후 주차를 위해 자신을 내려두고 떠난 행인을 부르며 자신의 차를 가지고 도망갔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집까지 데려다 준 이후에도 그가 빨리 떠나기를 바란다. 시각이 결여된 인간에게 볼 수 있는 불안과 불신의 증세를 보이며 행인이 자신의 소유물들(차, 집 안의 귀중품 등)을 훔쳐가지는 않을까에 대한 불안감이 행인이 자신에게 베푼 도움을 압도한 것이다. 또한, 격리 병동에서 여자들이 음식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아내만큼은 안 된다는 이기적인 태도에서 일본 남자의 소유에 대한 욕망과 이중적인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안과 의사는 의사로서의 유능함과 사명감을 지닌 인물로 무질서와 혼란 속에서도 정의를 실현하려는 면모를 보인다. 갈등을 중재하며 질서를 정립하고 최대한 서로의 힘을 합쳐 절망적인 상황을 헤쳐나가고자 한다. 그러나 종국에 그는 여자 환자와의 외도를 저지르고 만다. 가장 가까운 존재였던 아내와 의견의 충돌을 빚어가고 눈이 멀어버린 데서 오는 무능감에 심적으로 나약해져 가던 그는 여자 환자의 말에 위로를 받으며 아내와의 오랜 육체적 관계의 부재에서 오는 성적 욕구를 여자 환자를 통해 충족시킨다. 그와 외도를 저지른 여자 환자 역시 눈이 멀기 전 상점에서 만난 직원의 물음에 날 선 반응을 보이며 그에게 무안을 준다. 이처럼 아내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과 내 아내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 의사로서의 정의로움과 나약함 앞에서 발현되는 성적 욕망, 따뜻한 위로를 건넬 줄 아는 심성과 지레 의심하고 면박을 주는 행위. 인간이 지닌 이중성임과 동시에 그 누구도 이러한 이중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다고 위의 세 사람의 경우만로 질병의 원인을 규정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그렇다면 눈이 멀지 않은 유일한 이, 의사 아내를 통해 반증해보면 어떨까. 의사 아내는 눈먼 자들의 도시가 되어 버린 아포칼립스 상황에서 유일하게 눈이 보이는 인물이다. 이는 격리병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녀는 욕망을 가진, 이기심을 가진 인간이라면 응당 이용할 '보인다'는 이점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지 않는다. 자신의 시각을 눈먼 자들을 돕고 악당을 처단함으로써 정의를 구현하는 데 사용하는 그녀는 나이팅게일, 나아가 잔 다르크를 연상하게 한다. 자신이 그들을 돕는다고 해서 누구 하나 인정해주거나 대가를 지급하지 않음에도 그녀는 홀로 자신의 힘이 닿는 데까지 청소와 빨래를 하고 자신의 집을 '여러분의 집'이라며 완전한 봉사자의 모습을 보여주며 남편과 여자 환자의 외도 장면을 두 눈으로 목격함에도 그들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장면에서는 한없이 자비로운 만인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다. 물론 그녀 역시 인간이기에 원초적 욕구와 욕망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차피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범주 안에서 생각해야 한다면 '어떠한 성질이 더 우세한가'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의사 아내를 제외한 모든 눈먼 자들의 원인을 정의하기란 불가능하다. 모든 질병의 원인이 그렇듯 다양한 경우의 수가 존재하며 「나는 전설이다I Am a Legend, 2007」처럼 영화에 등장하지 않은 또 다른 면역자의 존재 역시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정보는 영화 안에 한정되어 있고 이를 최대한 활용하자면 영화 내 서사가 있는 중심인물들을 위주로 분석할 수밖에 없었다는 한계를 인정한다.

  결국 본다는 것은 내가 나 이외의 외계의 것들을 보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타인 역시 나를 볼 수 있음을 의미한다. 외부 환경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끊임없이 타자와의 시선을 교류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타인의 욕망까지 닮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누군가가 보기 때문에 행해지는 세상의 많은 선과 악의 행위들은 타인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와 인간 본성 사이에서 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왜 하얗게 눈이 멀었는가 : 백색 세상에 담긴 신의 계시
  영화에서 또 다른 특이점은 눈먼 자들이 보는 세상이다. 보통 눈이 멀었다고 하면 시야가 검게 변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들의 앞은 온통 하얀 세상이 펼쳐진다. '눈 안에서 하얀 게 흘러내'리고 사방이 '백색 바다'인 느낌. 그들의 눈이 하얗게 멀어버린 이유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안과 의사는 '인지불능'과 신경성이라고 진단한다. 즉, 눈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신경성, 뇌의 문제와 연결되며 항상 보던 것을 못 알아보는 인지불능의 상태라는 것이다. 그의 아내는 이에 대해 '불가지론'과 비슷한 것이냐며 반문한다.

  '불가지론agnosticism'은 초경험적인 것의 존재나 본질은 인식 불가능하다고 하는 철학상의 입장이다. 불가지론의 기원은 신의 본체는 알 수 없다고 주장하는 중세 신학 사상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인간의 지적 직관을 통해 신의 본체를 파악할 수 있다는 그노시스gnosis 학파의 입장을 부정한다. 이는 로마 가톨릭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인간은 이성을 타고 태어나며 '자연의 빛'에 의해 신의 존재를 알지만, 신의 본체는 알 수 없다. 따라서 신은 현세에 사는 사람에게는 거울에 비치는 모습처럼 뚜렷하지 않고 신과 직접 마주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세상에서만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즉, 아무리 이성을 가진 인간이라고 해도 현세에서는 신의 본체를 파악할 수 없으며 진정으로 신의 본체를 마주하고자 한다면 '다른 세상'으로 가야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이성과 논리가 지배한 세상에 신이 주는 경고와도 같다.

  시대를 거듭할수록 신의 권위는 떨어져 왔다. 신화를 뜻하는 미토스mythos는 고대에는 권위와 힘을 가진 진실한 이야기로 여겨졌으며 반대 개념인 로고스logos는 낮은 이의 교활한 이야기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과학의 발달은 두 개념에 대한 인류의 인식을 전복시켰다. 신화는 말 그대로 실체를 파악할 수 없는 신에 대한 나약한 인간의 망상으로 그려진 이야기로 전락했으며 로고스는 논리와 이성이라는 이름 아래 인류의 역사를 건설한 지성의 근본이 되었다. 이성과 눈에 보이는 것이 진리가 된 세상. 영화에서는 이러한 세상을 잘 담고 있다. 안과 의사는 자신의 눈이 멀어버린 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질병관리 당국에 전염병의 사실을 알린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눈에 보이는 증상'이 없으며 '선례'도 없기 때문에 전염병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분명하게 인지할 수 있는 것만을 인정한다는 이성 중심의 현대 사회의 한 단면이다. 종국에 전염병은 지구를 하나의 눈먼 도시로 만들고 만다.

  결국 인간에게 '본다는 것'은 '이성'을 의미한다. 우리는 직접 눈으로 확인한 것을 사실이라고 하며 사실로 입증된 것을 바탕으로 논리를 형성한다. 반대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불신과 저평가는 커져만 간다. 이러한 세상을 종교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어떨까. 창조주의 입장에서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는 창조물들이 보이지 않는 존재라는 이유로 신을 배척한다면? 신과 직접 마주할 수 있는 곳은 '다른 세상'이라는 로마 가톨릭의 말처럼 다른 세상인 백색의 세상으로 인간을 가둘 수 있는 것 역시 신의 능력일 것이다.

  흑黑의 세상이 아닌 백白의 세상. 기독교 신앙에서 말하는 종말, 다른 말로 최후의 심판은 타락한 자식을 구원하기 위한 부모의 마지막 발악과도 같다. 최초의 종말로 기록되는 물의 심판에서 하나님은 노아에게 심판의 때를 미리 게시해주었다. 그럼으로써 인간의 씨를 남겨두고 리셋(reset)된 세상에서 새로이 씨앗을 뿌리게 한 것이다. 종말론에 대해서는 신의 징벌인가 신의 구원인가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지만 결국 방주를 통해 최후의 인간을 보존하였다는 점에서 자식을 사랑한 부모의 마음이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는 인간을 멸종시키려는 목적보다는 백지가 된 세상에서 다시금 자식의 새로운 인생에 기대를 거는 부모의 모습이 보인다. 흑黑은 세상의 모든 빛을 흡수한다. 빛을 통해 인식되는 색깔은 검은 세상 안에서는 결국 같은 검은색으로 수렴되고 만다. 그러나 백白은 모든 빛과 색을 품을 수 있다. 어떠한 색깔도 하얀색과 만나면 고유의 빛깔을 온전히 발산할 수 있다. 과도한 감정과 물질들로 뒤얽힌 타락한 세상의 색깔을 모두 빼앗음으로써 하얘진 세상을 통해 신은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눈먼 자들이 격리병동 안에서 유일하게 위로를 받는 순간은 이성이 아닌 감성과 감각이 집약된 예술, 음악을 들을 때였다. 또한, 다시 눈이 보이게 되면 서로를 알아볼 수 있도록 상대방의 보이는 것들을 묘사하는 의사 아내에게 한쪽 눈이 먼 노인이 그런 것은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하자 그럼 어떻게 서로를 알아보냐는 그녀의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당신 내면의 어떤 뭔가가 우리의 존재를 보여주는 게 아닐까요?"

  하얀 세상을 경험한 인간이 모두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들이 마주한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그리고 그 세상을 살아갈 인간들의 모습은 어떨까. 과연 그들은 신의 의도와 같은 모습을 살 것인가. 백白의 나라에서 돌아온 인간이 백지가 된 세상에 이번에는 어떤 그림을 그려나갈지 궁금하다.

영상비평 당선자 윤채라 학생 Interview: 백색 세상을 그려낸 연출에 주목하다

사진제공 윤채라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는 노벨 문학상을 받은 주 제 사라마구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뚜렷한 명암 대비와 색채 이미지를 활용해 연출한 <눈먼 자들의 도시>. 그 섬세한 연출의 변화를 다 양한 시각으로 포착한 윤채라 학생(문예창작전공 3)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당선 소감이 궁금하다.

  “부족한 글인데 명예를 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 다. 사실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데 당선 소식을 들 었어요. 도서관에서는 소리를 못 내니까 혼자 속으 로 환호를 질렀죠. 정말 기뻤어요. 1학년 때도 지원 했는데 그때는 결과가 좋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다 시 도전했을 때 좋은 결과를 얻어서 저의 인생에 힘을 실어주는 긍정적인 경험이 된 것 같아요.”

  -<눈먼 자들의 도시>를 비평하게 된 계기는.

  “영화를 보게 된 계기는 수업 과제 때문이었어 요. 그런데 보면서 영화 속 장면 하나마다 시사하는 의미들이 많다고 느꼈죠. 아직 학생이기 때문에 전문 평론가처럼 보는 눈이 넓을 순 없지만, 이 영 화는 다른 영화와 달리 보면서 비평할 지점이 많다 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비평하면서 영화를 분석해 보면 좋을 것 같아 선정하게 됐어요.” -비평할 때 지키는 철칙이 있을지. “저는 최대한 글을 쉽게 쓰려고 노력하는 것 같 습니다. 아무래도 사람이 배우는 게 많아질수록 흔 히 ‘엘리트주의’에 빠질 수 있잖아요. 그 점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전문 지식을 배우지 않 은 사람이 글을 읽었을 때도 최대한 이해할 수 있 도록 씁니다.”

  -영화에서 가장 감명 깊었던 장면은.

  “격리병동에서 사람들이 나와서 집 가는 길에 비가 내리거든요. 사람들이 비를 맞으면서 굉장히 행복해하죠. 그 장면이 되게 인상 깊었어요. 비가 내린다는 게 촉각을 느끼게 해주는 거잖아요. 눈은 멀었지만 빗물로 서로를 만져주면서 씻겨주는 모 습이 영화 설정과 맞물리면서 여운을 줬던 것 같습 니다.”

  -흰색 묘사에 집중했던데, 특별한 이유가 있을지.

  “보통 눈이 멀었다고 하면 눈앞이 깜깜해지는 걸 의미하잖아요. 그런데 이 영화에서 눈이 하얗게 보인다는 설정 자체가 굉장히 흥미로웠어요. 그렇 다 보니 ‘이 영화에서는 왜 눈을 하필 하얗게 멀었 다고 표현했을까?’에 자연스레 집중해 생각한 것 같아요. 그리고 눈이 하얗게 멀었다는 설정뿐만 아 니라 하얗게 눈먼 상황을 묘사하는 대사가 자주 나 와요. 그래서 영화에서 눈이 하얗게 멀었다는 부분 이 단순히 설정으로만 생각하고 넘길 게 아니라고 생각했죠.”

  -‘건강한 욕망’이라는 표현이 색다르다.

  “건강한 욕망과 비슷한 용어는 ‘의욕’이라고 생 각해요. 저는 삶의 열정도 욕심이 있기에 생긴다고 봅니다. 하고 싶은 거나 욕심이 없으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열정이나 어떤 일을 해나갈 수 있는 추 진력을 얻기가 힘들잖아요. 흔히 욕망이라고 하면 되게 부정적인 뉘앙스가 강하지만 욕망 중에는 삶 의 원동력과 긍정적인 자극이 되는 건강한 욕망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비평문으로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은 말은.

  “비평문을 통해 무엇을 느끼는지는 독자의 몫이 라고 봐요. 그래서 저도 독자가 어떤 교훈을 얻었 으면 좋겠다기보다는 편하게 ‘어떤 사람이 이러한 생각을 했다, 너는 나의 글을 읽고 어떻게 생각해?’ 라는 느낌으로 글을 썼습니다. 그저 저의 글이 대 학이라는 공간에서 같이 공부를 하는 사람으로서 서로의 의견을 나누는 장이 되면 좋겠어요.” 

심사평

박명진 교수(국어국문학과): 영상비평, 개성적인 시각과 매력적인 글쓰기를 위해

본심에 올라온 작품은 총 4편이었는데 영화, 드라마, 게임 등 다양한 분야의 글쓰기를 보여주어 반가웠다.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다는 믿음, 웃음>은 찰리 채플린의 코미디 영화 <모던 타임즈> 분석을 통해 채플린의 사상과 영화 텍스트의 지향점을 성찰했다. 그러나 영화에 대한 참신한 재해석이 다소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지그문트 시리즈》가 기억을 매개로 행복을 찾아가는 방식>은 인디 게임을 정밀하게 분석한 글로서 시도가 참신했고 성실한 텍스트 논평이 인상적이 었다. 

  <불가능한 해방>은 <추락(Nosedive)>에 대한 비평이다. 문제의식 설정과 텍스트에 대한 시각은 좋았지만 설명 중심으로만 논의를 전개한 건 아쉬웠다. 

  <백白의 시선>는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에 대한 평론이다. 이 글은 영화의 영상 미학과 함께 서사에 나타나는 철학적, 시대적 문제의식을 꼼꼼하게 사유하고 있다. 

  영상비평은 텍스트에 대한 개성적인 해석과 매력적인 글쓰기를 필요로 한다. 무엇보다 좋은 비평은 대상 텍스트를 보다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힘을 지닌다. <《지그문트 시리즈》가 기억을 매개로 행복을 찾아가는 방식>과 <백白의 시선>, 2편을 가지고 끝까지 고민했다. 대상 텍스트의 영상 미학에 대한 섬 세한 분석, 그리고 깊이 있는 사유, 그리고 이것들을 차분한 문체로 풀어나간 <백白의 시선>에 더 호감이 갔다. 따라서 <백白의 시선>을 당선작으로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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