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205호의 비판적인 사람들(critical+er=criticer)이 말하는 중요한(critical) 이야기! 이공오의 크리티컬은 사회 곳곳의 이야기를 뾰족한 시각으로 바라봅니다. 이번에는 의료 사각지대를 살펴봤는데요. 허리를 삐끗해 점심시간 동안 동네 병원을 다녀온 경험이 있으신가요? 쉽게 병원을 다녀오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일상인데요. 아파도 참고, 위급해도 가까운 병원을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노숙인은 지정된 병원만 가야 한다는 제도적 차별의 실체를 알아봅시다. 송수빈 기자 pinekong@cauon.net

“진짜 죽을 만큼 아프지 않으면 안 간다. 이 이야기를 하세요. 이 정도는 참아야지, 그렇게 사시는 거죠. 병원에 갈 때마다 저 멀리 떨어져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한 번 갈 때마다 몇 시간씩 걸리는데.” 안형진 홈리스행동 상임활동가는 노숙인들이 병원에 가지 못하는 이유에 관해 이같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병원에 가려면
  2012년 「노숙인 등의 복지 및 자립지원에 관한 법률」 시행 이후 1종 의료급여 수급권자에 노숙인이 포함됐습니다. ‘노숙인 1종 의료급여’ 수급권자가 되기 위해선 3개월 이상 노숙 기간 유지, 국민건강보험 미가입 혹은 건강보험료 6개월 이상 체납 등의 요건을 모두 충족해야 하는데요. 이서영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기획팀장은 신청 기준과 절차가 노숙인들의 현실을 고려하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쪽방이나 PC방과 같이 주거시설이라고 보기 어려운 곳들을 전전하면서 거리에서 지내시는 경우들이 많아요. 그래서 노숙 기간 3개월을 확인받기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기준을 맞췄더라도 신청 절차에서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보건복지부의 「2021 의료급여 사업안내」에 따르면 노숙인 1종 의료급여 수급권자는 2020년 11월 기준 333명, 그중 322명이 서울특별시에 편중돼 있습니다. 이외 지역엔 수급권자가 11명밖에 되지 않는 현실은 공급자 중심의 신청 절차와 관련됩니다.

  노숙인 1종 의료급여를 신청하기 위해선 지방자치단체(지자체)에서 정한 일시보호시설이나 자활시설에 신청서를 제출해야 하는데요. 당사자에게 받은 신청서를 시설장이 지자체에 송부합니다. 하지만 신청서를 제출할 시설이 없는 지역도 존재했습니다. 안형진 활동가는 이러한 시설 중심 체계가 비서울권 노숙인들을 의료급여 제도에서 배제한다고 지적했습니다. “기준을 통과하더라도 신청 창구가 없을 수도 있어요. 행정구역상 전라남도나 경상남도 등은 시설이 없어요. 만약 자신이 노숙 상태에 처해 있다고 가정했을 때 그런 지역에서 거리 노숙을 하면 수급권자가 되고 싶어도 될 수가 없는 거죠.” 국가인권위원회에 따르면 17개 광역지자체 중 노숙인 일시보호시설이 없는 곳이 13곳입니다. 노숙인 일시보호시설과 노숙인 자활시설이 모두 없는 지자체는 4곳에 이르는 상황이었습니다.

  문은 열리지 않았고
  수급권자가 돼도 노숙인의 진료를 가로막는 장벽은 굳건했습니다. 노숙인 1종 의료급여 수급권자는 정해진 병원에만 가야 한다는 ‘노숙인 진료시설 지정제도’ 때문인데요. 안형진 활동가는 다른 어떤 수급권자 유형에도 없는 제한적인 조건이 노숙인에게만 해당된다고 말했습니다. “노숙인이 수급권자가 되면 노숙인 진료시설로 지정된 의료기관에서만 의료급여가 가능하다는 구절이 처음부터 있었던 거예요. 제도화된 차별이죠. 차별을 명시적으로 존속한 제도예요.”

  전국의 노숙인 지정 진료시설은 올해 2월 기준 291개입니다. 그마저도 수도권에 약 3분의 1의 진료시설이 분포해 있습니다. 이 중 대부분이 보건소 및 공공병원인데요. 이서영 팀장은 적은 수의 지정 진료시설마저도 그대로 다 기능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보건소는 의료시설의 기능도 있지만, 지방 보건행정기관의 성격도 있거든요. 진료만을 위한 시설은 아니에요.”

사진 안소연 기자

  변한 것은 없었다
  코로나19로 보건소에선 지금껏 진행해온 최소한의 진료를 중단했습니다. 또 노숙인 진료시설로 지정된 대부분의 공공병원이 감염병 전담병원으로 지정되면서 노숙인이 갈 수 있는 병원은 더욱 한정됐습니다. 이에 2월, 국가인권위원회에서는 보건복지부에 노숙인 진료시설 지정제도 폐지를 권고했습니다. 보건복지부는 인권위 권고 이후 약 1달이 지난 3월에 「노숙인진료시설 지정 등에 관한 고시」를 제정했습니다. 이로써 노숙인이 이용 가능한 진료시설은 291개에서 7만3398개로 확대됐습니다.

  그러나 보건복지부의 고시는 여러 한계점을 지적받기도 했습니다. 이서영 팀장은 보건복지부 고시 이후에도 문제 상황은 여전할 것이라 말했습니다. “보건복지부 지침은 감염병 위기 상황 등급이 위험 이상일 때만 한정해서 1년 동안만 유지하겠다고 했어요. 일시적인 제한 조치일 뿐이고요. 감염병 위험 등급이 발령되지 않으면 노숙인들은 여전히 사각지대에 놓여 있을 거예요.”

  노숙인 지정 진료시설 증가가 실상은 유명무실하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보건복지부가 고시만 했을 뿐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아 기존 지정 시설이 아닌 민간병원에서의 노숙인 진료는 여전히 어려운 상태이기 때문인데요. 박상병 다시서기 종합지원센터 부속의원 사회복지사는 민간병원 협조의 한계점을 언급했습니다. “노숙인 일반 진료는 거의 불가능하죠. 민간 1차 병원이나 2차 병원이 노숙인 진료에 굉장히 협조하지 않고 있어요.”

  안형진 활동가는 보건복지부 고시로 기준이 더 까다로워졌다고 말했습니다. “‘노숙인종합지원센터장이 주 1회 이상 주기적으로 상담을 실시하는 거리 노숙인’이라는 구절이 지원 대상 조건에 추가됐기 때문입니다. “보도 자료에 그 내용이 처음 들어간 거예요. 그러니까 그 이전보다 사실 퇴보한 겁니다. 1·2차 의료기관을 이용할 수 있다고 하지만 진입 조건을 훨씬 더 까다롭게 만든 거죠.”

  누군가에게는 당연하지 않은 일
  과연 제도만의 문제일까요? 보건복지부의 고시 이후 민간 의료기관까지 노숙인 진료가 가능해지자 대한의사협회에서는 반대 성명을 냈습니다. ‘의료 행위의 자율성을 침해한다’는 명목이었습니다. 이서영 팀장은 의료기관의 본질적인 목적을 짚었습니다. “의료기관의 본래 기능은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거잖아요. 근데 그렇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우리가 아플 때 눈앞에 있는 병원에 가지 못한다고 상상해봅시다. 위급할 때 가장 신속히 갈 수 있는 병원에서 치료받지 못해 생명에 지장이 가는 상황이라면 어떨까요? 김유진 영등포보현종합지원센터 부속의원 의사는 노숙인 진료시설 지정제도가 병을 이겨내고자 하는 의지마저 잃게 만든다고 말했습니다. “환자들이 치료받겠다고 생각해도 실천하기 어려운 게 문제예요. 병을 앓았는데 그것을 쉽게 치료할 수 있도록 믿음이나 자신감이 있어야 하는데 자신이 갈 수 있는 병원이 한정된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병을 이겨나가는 용기를 많이 잃게 해요.”

  아프면 병원에 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요. 갈 수 있는 병원을 한정 짓는 제도는 작은 병을 키워 큰 병을 만들게 합니다. 큰 병으로 아파진 몸은 마음먹고 병원에 가는 일을 더욱 어렵게 만듭니다. 악순환의 고리가 반복되는 거죠. 노숙인들이 건강할 권리는 언제쯤 그 가치만큼 중시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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