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신문에 입사한 이유는 뚜렷했습니다. 취재 경험을 쌓으며 사진기자로서의 능력을 확인하는 것. 입사 후에도 목표는 계속 바뀌었습니다. 정기자 시절엔 ‘취재력이 뛰어난 기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밀려오는 취재와 학업에 숨이 차 후회하면서도 매주 월요일마다 내 기사를 확인할 때 살아있음을 느꼈습니다.

  정기자 생활이 끝나고, 원하던 사진팀을 꾸리게 된 나의 이상향은 ‘사진을 잘 찍는 작가’로 옮겨갔습니다. 보도사진이라는 틀을 벗어난 새로운 사진기획을 보여주고자 했죠. 정확하게는 사진면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나름의 치열함으로 무장한 뒤 악착같이 달려들었습니다. 스스로 펼친 판이 버거워도 어떻게든 완주했고 그런 자신에게 만족했습니다. 대신 멈춰선 안 된다는 불안이 멈출 수 없다는 부담이 되고, 정신없이 달리다가 휴간을 맞으면 모든 것을 쏟아낸 나는 내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정신이 있는 순간보다 없는 순간이 더 편안했기에 어서 취재일이 다가오기만을 바랐죠.

  부장으로 진급한 뒤 어떤 기자가 되고 싶은지 내게 물었습니다. 취재를 잘하는 기자와 사진을 잘 찍는 작가 모두 쾌락에 가까운 성취감 뒤 짙은 그늘이 뒤따랐습니다. 본질보다 인정욕구가 앞선 목표였기 때문이겠지요. 그제야 내가 아닌 남을 채우는 취재를 하고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앞선 질문에 고민을 거듭하던 나는 결국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답했습니다.

  수십 번의 글쓰기, 수백 번의 취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고민을 낳았습니다. 약 2년간의 긴 배움 속 가장 큰 깨달음은 글재주도, 사진 기술도 아닌 ‘세상은 희생과 배려로 돌아간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요행을 부리며 이기적으로 살아도 괜찮다는 일종의 지름길이 만연한 세상입니다. 신문사는 어느 집단보다도 치밀하게 실리를 따지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돌아오는 게 없어도 기꺼이 손 내미는 취재원, 신뢰를 위해 헌신하는 기자와 발전을 바라며 기꺼이 조언하는 독자가 있어 존재했습니다. 모두가 희생과 배려의 정도(正道)를 걷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지름길을 두고 굳이 바른길을 택한다는 건 용기 있는 행동일 수 있겠습니다. 내가 생각한 ‘좋은 사람’은 나를 스쳐 지나갔던 수많은 취재원과 독자 그리고 내 곁의 동료였습니다. 대화에서 생각을 배우고 말투에서 태도를 배울 수 있었던 그들은 훌륭한 스승이자 거울이었습니다. 쉼 없이 달리기보단 한발 한발 정성으로 디디는 법을 연습 중입니다. 완벽하진 않지만, 이곳에서 배운 삶의 자세를 실천하며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으로 남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중대신문은 어떤 의미였나요. 내게 그랬듯이 중대신문이 당신에게도 생각의 전환이 되었길, 앞으로 성장의 계기가 될 수 있는 존재로 다가가길 바라며 수첩을 닫습니다.

김수현 사진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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