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글 쓰고 그림 그리는 일이 포도주 마시는 것과 같아서 그 취기가 삶을 아주 따뜻하게 데워주고 멋지게 만들어주기에 삶은 견딜 만합니다."
-1920년 12월, 헤르만 헤세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면 하나의 세계를 깨트려야 한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을 본 사람이라면 기억에 남을만한 문장이다. 『데미안』, 『싯다르타』 등 너무나도 유명한 작품을 남긴 그는 저명한 작가였다. 동시에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그림을 그린 아마추어 화가이기도 했다. 헤르만 헤세가 쓰고 그린 작품을 통해 온전히 그의 예술에 빠져 볼 시간이다.

  수레바퀴 아래서 만난 헤르만 헤세
  1877년 남부 독일의 나골드 강변에 위치한 도시 칼브. 그 작은 도시에서 헤르만 헤세가 태어났다. 외할아버지와 부모님이 모두 선교사 활동을 했을 정도로 헤르만 헤세의 집안은 독실한 기독교 전통을 이어가고 있었다. 집안의 장남이었던 그는 자연스레 독일의 마울브론 신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신교가 강력했던 독일에서 신학교를 바라보는 시선은 지금과 달랐다. 신혜선 교수(국립공주대 독어독문학과)는 과거 독일 사회 속 신학교의 위상에 관해 이야기했다. “각 지역의 유능한 아이들 중 합격한 이들만 신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어요. 현재로 치면 영재학교죠. 신학교를 나오면 목사가 될 수 있는데 당시 목사는 안정적이고 좋은 직업군이었어요. 즉 영재들이 출세할 수 있는 길에 가까웠습니 다.” 그러나 헤르만 헤세는 7개월 만에 신 학교를 탈출했다. 그의 마음속은 오로지 시인이라는 꿈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이영임 전 한국헤세학회장은 헤르만 헤세의 예술가적 기질과 신학교의 규율간의 충돌에 관해 설명했다. “헤세는 예술가 기질을 지니고 있었어요. 열심히 공부해 목사가 돼서 출세하기보다 자신이 알고 싶은 것을 더 깊이 탐색하고, 완벽히 체화해 납득해야만 따라갔죠. 신학교의 체제나 틀에 갇히는 것을 싫어했던 예술적 기질과 학교의 규율이 부딪힌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헤르만 헤세의 신학교 생활은 그의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수레바퀴 아래서』는 어린 신학도 한스 기벤라트의 이야기를 담는다. 어릴 때부터 총명했던 한스는 어른들의 기대 속에서 마울브론 신학교에 입학하지만 강압적인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다. 그때 자유로이 시를 썼던 헤르만 하일너라는 소년을 만나 우정을 나누게 된다.

  김륜옥 교수(성신여대 독일어문·문화학과)는 한스와 하일너를 통해 신학교 시절의 헤르만 헤세를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둘은 헤세의 서로 다른 두 개의 자아를 보여줘요. 한스와 하일너 이름의 첫 글자를 합친 ‘HH’는 헤르만 헤세의 이니셜과 연관돼 있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려는 용기를 가진 자는 하일너에 가깝기에, 헤세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던 청춘의 자아상은 하일너였다고 할 수 있어요.”

  비판의 눈길과 위로의 손길
  위선적인 교장에 맞서던 하일너가 퇴학당한 후 혼자가 된 한스는 신경쇠약이 심해져 고향으로 돌아온다. 시계 수리공으로 일을 시작한 한스는 살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주변의 냉대와 사랑하는 여인의 배신으로 다시 고통에 빠지고 결국 익사체로 발견된다. 한스의 장례식에서 구둣방 아저씨 플라이크는 한스의 아버지를 향해 이야기한다. “당신이나 나, 우리 모두 저 아이에게 소홀했던 점이 적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진 않으세요?”

  한스가 죽은 이유에 관해 문광훈 교수 (충북대 독일언어문화학과)는 그를 둘러싼 주변 인물의 무관심 때문이라는 입장이다. “청소년기의 교육은 기성 제도에 편입하기 위한 과정이에요. 이 과정에서 학생은 서툴거나 모자라기 때문에 주위에서 잘 지켜봐야 하죠. 그러나 한스는 가족과 친구, 주변 사람 그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했어요. 구둣방 아저씨처럼 마음을 헤아려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한스를 바꿀 정도로 결정적이지는 않았기에 점점 죽어갈 수밖에 없었죠.”

  한스에게 고통의 시작점은 신학교였다. 어쩌면 헤르만 헤세는 『수레바퀴 아래서』를 통해 교육을 돌아볼 기회를 준 게 아닐까. 황승환 교수(국립강릉원주대 독어 독문학과)는 당시 학교를 향한 헤르만 헤세의 비판적 시선을 논했다. “헤세는 학교가 개성과 잠재성, 천재성을 가진 학생을 교육제도라는 틀 속에 넣어 억압한다고 봤어요. 인간을 사회에 유용하고 획일적인, 순종적인 부속품으로 만드는 시스템에 불과하다고 비판했죠.”

  사회를 향한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는 동시에 독자에게 치유를 선사하기도 했 다. 이영임 전 학회장은 비슷한 고통을 받았던 이들이 치유받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헤르만 헤세는 어렸을 적 자신이 겪었던 문제에 관해 고민했어요. 이를 객관화시켜 문제의 원인과 결과, 해결법을 제시할 수 있었죠. 그가 전달한 메시지는 일종의 길 안내자가 돼 같은 고통을 겪은 독자가 치유 받도록 해줍니다.”

  학업을 포기한 헤르만 헤세는 출판협회 조수, 탑시계 공장 견습공 등 여러 가지 일을 하며 방황했다. 헤르만 헤세가 문학의 길로 들어선 것은 서적 분류 조수로 일하던 중 문학사와 정신사에 관심을 가지면서부터였다. 그는 시와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1904년 소설 『페터 카멘친트』를 출판한 후 작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고통에 휩싸인 문학인에게 그림이란
  작가의 생활도 잠시, 1차 세계대전 발발 후 헤르만 헤세는 독일 포로 후생사업소에서 전쟁포로를 위해 위로의 글이나 책을 보내주는 사업에 참여했다. 이후 사랑과 평화를 주장하며 반전 문학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후 벌어진 일은 헤르만 헤세를 피폐하게 했다. 이영임 전 학회장은 당시 헤르만 헤세에게 닥친 절망적인 상황을 묘사했다. “헤르만 헤세가 잡지나 신문에 전쟁 반대 입 장을 드러내자 독일인들은 조국의 배신자라며 그를 향해 지탄을 쏟아냈습니다. 이에 더해 부인은 우울증에 걸려 정신병원에 들어갔고 자신의 아이들은 뿔뿔이 흩어진 데다, 막내아들까지 아프다 보니 더 이상 버티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렀죠.”

  심한 우울증과 신경쇠약 증세를 보인 헤르만 헤세는 요양과 치료를 위해 정신과 의사 요제프 베른하르트 랑에게 정신 분석 치료를 받았다. 치료를 이어가던 헤르만 헤세는 랑 의사로부터 치료법 하나를 제안받는다. 꿈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후 그림을 그려보라고 한 것이다.

  황승환 교수는 헤르만 헤세가 그림을 그리던 행적에 관해 설명했다. “1916년 ~1917년 헤세는 전쟁 포로에게 보내는 크리스마스 엽서 수백 장을 그리고 썼다고 해요. 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도 그림을 그려 넣었죠. 생계를 위해 시화집까지 출판했답니다.” 이후 그는 시와 산문, 편지에 곁들인 소품을 빼고도 약 3000점 이상의 스케치와 수채화를 그렸다.

헤르만 헤세가 지은 한 편의 시 옆에 직접 그린 조그마한 수채화가 눈에 띈다. 그는 종종 엽서와 편지에도 그림을 그려넣곤 했다. 사진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헤르만 헤세가 지은 한 편의 시 옆에 직접 그린 조그마한 수채화가 눈에 띈다. 그는 종종 엽서와 편지에도 그림을 그려넣곤 했다. 사진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헤세의 붓 줄기가 만들어낸 치유
  그림을 보면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던가. 김륜옥 교수는 헤르만 헤세가 그린 <자화상>(1919)에서 그의 혼란한 심리가 드러난다고 말했다. “헤세는 여러 가지 자화상을 남겼는데요. 가족 문제나 대외적 논쟁으로 심각한 노이로제 증상을 겪은 그가 1919년 <자화상>을 그릴 당시에는 정신과 치료로 점차 안정을 찾아가던 시기였습니다. 그렇기에 깊은 내적 혼란을 숨기지 않는 모습이 드러나죠.”

1919년에 헤르만 헤세가 그린 '자화상'. 그는 내적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붓을 들었다. 사진출처 본다빈치 공식 블로그
1919년에 헤르만 헤세가 그린 '자화상'. 그는 내적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붓을 들었다. 사진출처 본다빈치 공식 블로그

  편안함과 따뜻함이 느껴지는 풍경화도 눈에 띈다. 하늘과 산, 나무, 호수 등 아름다운 자연을 담아내기 위해 헤르만 헤세가 주로 택한 것은 드로잉과 수채화 물감이었다. 문광훈 교수는 그 이유로 간결함을 꼽았다. “유화보다는 드로잉이나 수채화가 간편하고 간결하게 그릴 수 있어서가 아닐까요? 헤세가 그린 작품은 전체적으로 수채화적인 밝음과 경쾌함을 띠고 있죠. 이때의 경쾌함이 반드시 경박하거나 무가치한 것은 아닙니다.”

  김륜옥 교수는 자유로움과 부드러움을 이야기했다. “여유롭고 평화로운 자연환경에서 헤세는 문학뿐 아니라 그림으로 예술적 감성을 충족했죠. 특히 드로잉이나 수채화는 특별한 준비과정이나 제약 없이 헤세도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었고 부드러운 질감을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속성들은 당시 헤세의 내적인 풍경과도 관련 있을 거예요.”

'카사로사 앞의 포도나무', 1931. 푸른 자연의 모습이 평화롭고 여유롭게 느껴진다. 사진출처 본다빈치
'카사로사 앞의 포도나무', 1931. 푸른 자연의 모습이 평화롭고 여유롭게 느껴진다. 사진출처 본다빈치

  미술 전시 <헤르만헤세展: 치유의 그림 들>이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그의 작품은 우리에게 치유의 그림으로 다가온다. 이영임 전 학회장은 헤르만 헤세의 그림이 가슴 깊이 위로를 건넨다고 주장했다. “헤세의 자화상에 나타나는 피폐함과 일그러짐은 그의 고통을 그대로 드러내요. 작품 속 고통을 마주한 이들은 헤세에게 공감하죠. 그 공감에서 자기 연민과 동시에 나만 아픈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삶을 견뎌낼 힘을 얻어요. 헤세가 그린 호수와 산, 작은 산간 마을의 집과 오솔길 등은 색이 아주 맑잖아요. 이러한 분위기에서 사람들은 편안함을 느꼈을 겁니다.”

'클링조어 발코니', 1931. 수채화가 주는 특유의 따스함이 위로를 건네는 듯하다. 사진출처 본다빈치
'클링조어 발코니', 1931. 수채화가 주는 특유의 따스함이 위로를 건네는 듯하다. 사진출처 본다빈치

  사실 헤르만 헤세는 우리처럼, 어쩌면 우리보다 더 방황하고 고통을 겪은 한 사람이었다. 그에 무너지지 않고 예술로 고통을 승화했으며 누구보다 예술에 솔직했다. 후세에도 깊은 감동과 치유를 주는 것. 그 모습이 바로 그가 진정한 예술가로 불리는 이유라고 감히 이야기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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