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지금 해파랑길 45코스의 시작점인 강원도 속초시 해맞이공원에 있다. 목적지는 장사항, 총거리는 약 17.5km이고 예상 소요시간은 6시간이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이 찌푸려져 있다. 신발 끈을 바짝 조이고 배낭을 고쳐 매고 긴 심호흡을 한다. 그리고 이어폰에는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아껴 둔 정밀아의 1집 음악이 흐른다. 이제 걸을 준비는 모두 마쳤다. 출발이다.

  네가 입학한 2020년은 오늘처럼 앞이 뿌옇고 우울한 습기가 대기에 가득한 날들의 반복이었지. 입학한 대학 근처도 제대로 못 가본 너에게 밥 약속, MT, 축제는 먼 나라 이야기였고. 넌 비대면 강의를 듣다 해질녘이면 동네 친구들을 만나, 나갈 때보다 한층 붉어진 얼굴로 집에 들어왔지. 그리고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아빠와 엄마의 큰 소리가 시작됐고 넌 아무 말 없이 굳은 얼굴로 방문을 세게 닫았지.

  아바이마을에 접어드니 부슬비가 내린다. 난 잠시 배낭 속 우산을 꺼내야 할지 고민한다. 넌 그런 적 없니? 사람들이 하나 둘 우산을 펼치기 시작하고, 왠지 나만 안 쓰면 이상하게 보일 것 같아 우산을 펼쳤던 경험. 오늘만은 다르고 싶다. 맨 얼굴에 부딪치는 작은 빗방울이 상쾌하다. 남들이 우산 쓴다고 나도 우산을 펼칠 필요는 없겠지. 걸어가는 내 옆을 빠르게 지나치는 자동차 때문에 주눅 들 필요도 없겠지. 네가 지금 내 옆에 있다면,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속도와 시간표가 있다고, 남의 속도와 시간표를 너무 의식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고 싶다.

  언젠가 불쑥 넌 내게 물었지. 아빠, CPA (공인회계사) 시험 준비해 볼까요? 그때 내가 고작 생각해 낸 말은 “너 좋을 대로 해”였지. 이제 와 고백하는데, 아빠가 너보다 어른이라고 많이 아는 건 아니란다. 특히나 하루가 다르게 모든 것이 바뀌는 요즘 세상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아빠도 잘 모르겠어. 너보다 어른인 아빠가 너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조언보다 응원인 것 같다.

  해파랑길을 걷다가 갈림길에 서면 빨간색 안내표식이 가리키는 북쪽 방향을 확인해 갈 길을 선택한다. 가끔은 표식을 무시하고 내 마음대로 가고 싶지만 용기가 나지 않는다. 나이와 용기는 반비례하는 것 같다. 앞으로 너도 길을 걷다가 갈림길에 서서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망설일 때가 오겠지. 그때 표식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너의 마음에서 울리는 소리를 따라 가야할 길을 선택하는 것이 어떨까? 그리고 네가 선택한 길이 영 아니라고 생각되면 언제든 돌아와도 괜찮아. 실패는 청년의 특권이니깐.

  마침내 장사항에 도착했다. 바다를 배경으로 인증사진을 찍어 너에게 보낸다. 아빠 친구는 딸과 통화할 때 목소리를 녹음하고 싶어서 안드로이드 폰으로 바꿨다고 하더라. 아빠도 가끔 네 목소리를 듣고 싶다. 아빠 집에 도착하면 너 좋아하는 마라탕에 술 한 잔 하자. 사랑하는 딸아.

한형성 교수
다빈치교양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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