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삶이 바쁘다는 이유로 문화예술 향유를 미뤄두곤 합니다. 감상의 순간이 찾아와도 무심하게 등을 돌리기도 하죠. 이번 학기 문화부는 문화예술을 잊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감성’을 전해 가슴 속에 큰 울림을 선사하고자 합니다. 이번 주 문화부는 흑백 영화 <동주>를 감상했습니다. 암울한 시대 속 빛나는 '동주'와 그의 작품을 만나고 왔는데요. 시대를 밝히는 영롱한 등불, 윤동주 시인을 떠올리며 다 같이 감성 스위치를 딸깍- 올려볼까요? 미완의 청춘이기에 더욱 빛났던, 그 슬프도록 아름다운 감성의 세계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서정 기자 sinceresseoj@cauon.net

“그런데 창씨개명을 하면서까지 유학을 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까지 해서 유학을 간다는 게 왠지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서요.”
“부끄럽지. 부끄럽고말고.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내가 부끄럽고 이렇게 늘 술만 마시고 있는 내가 부끄럽네. (중략) 윤 시인, 부끄러움을 아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영화 <동주> 中

영화 '동주'에서 윤동주는 도쿄 릿쿄대학의 교련 수업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강제로 머리를 깎인다. 그의 눈빛에서 나라 잃은 청년의 수치와 울분이 느껴진다. 사진출처 미디어로그영화 유튜브
영화 '동주'에서 윤동주는 도쿄 릿쿄대학의 교련 수업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강제로 머리를 깎인다. 그의 눈빛에서 나라 잃은 청년의 수치와 울분이 느껴진다. 사진출처 미디어로그영화 유튜브

거울로 참회를 하고 한없이 별을 헤던 한 청년이 있다. ‘부끄러움’ 하면 바로 떠오르는 시인, 윤동주다. 잔잔하고 평화로워 보이지만 쓸쓸함이 느껴지는 그의 문체는 많은 독자의 마음을 일렁였다. 일본 제국주의 시대 속에서 누구보다 시를 아끼고 사랑했던 동주. 영화 <동주>와 함께 그가 써 내려간 페이지를 한 장씩 넘겨본다.

  그냥 저는 문학이 좋습니다
  중국 북간도 일대의 명동촌, 윤동주는 한 개신교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윤동주의 학업을 향한 길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1935년 평양 숭실중학교 편입 당시 신사참배를 종용하는 이들이 학교를 압박했다. 윤동주는 신사참배 강요에 항의하며 자퇴를 결심했고 1936년 용정 광명중학교에서 2년의 공부를 마쳤다. 이후 1938년 송몽규와 함께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진학했다.

  연희전문학교 재학 중 문학을 아꼈던 윤동주의 마음은 영화 <동주>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늦은 밤, 문예지에 실을 문학 작품을 고르기 위해 윤동주, 송몽규를 포함한 4명의 학생이 모여 작품을 보고 있던 때였다. 시는 윤동주 작품밖에 실을 게 없다는 강처중의 말에 송몽규는 말한다. “자기 생각을 펼치기에는 산문이 좋디. 시는 가급적 빼라.” 그러자 윤동주가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시도 자기 생각 펼치기에 부족하지 않아.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살아 있는 진실을 드러낼 때 문학은 온전하게 힘을 얻는 거고, 그 힘이 하나하나 모여서 세상을 바꾸는 거라고.”

  윤동주의 시상이 가장 깊었던 연희전문학교 재학시절 그는 <새로운 길>, <자화상> 등 30여편의 시를 지었다. 양진오 교수(대구대 한국어문학부)는 윤동주에게 문학이 성찰의 매개체였다고 설명했다. “어려운 상황일수록 사람들은 자기를 보려 하지 않죠. 윤동주에게 문학은 스스로를 비추는 거울이었고 자기 성찰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송희복 교수(진주교대 국어교육과)는 윤동주가 한글과 문학을 매우 사랑한 시인이었다고 이야기했다. “윤동주는 평생 조선을 조국이라 여겼고 우리말과 우리글에 남다른 애정을 보였어요. 한글을 사랑했던 그는 자연스레 한글로 쓰인 문학도 사랑하게 됐죠. 갑갑하고 암울한 시대에서 문학은 윤동주가 깊게 사유할 수 있는 통로가 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학을 사랑했던 윤동주는 계속 시를 썼고 그의 시는 점점 높은 수준으로 성장했다고 한다.

  이름을 잃은 청년의 눈물이 책에 떨어지고
  그러나 윤동주는 책을 펼치는 것조차 위협을 받던 시대에 살았다. 김성연 교수(연세대 국어국문학전공)는 식민지 시대 속 문학 향유가 매우 위험했다고 설명했다. “시를 포함한 문학은 법적 제재나 정치 선동 문구보다 개인의 내면을 파고드는 강력한 힘이 있어요. 이 점에서 당시 일본 제국은 조선 체제 유지에 저해되는 사상을 규제했고 한일합병 이후 금서 처분된 문학서도 있었죠. 또한 한글 시는 독립운동이나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를 받을 수 있는 증거였어요. 한글 시집을 출판하고자 했던 윤동주를 주위에서 만류하기도 했습니다.”

  한글과 문학을 사랑했던 윤동주에게 일본 유학은 어떤 의미였을까. 영화 <동주>에서 그는 일제에 저항하듯 손에 든 창씨개명계를 울분에 찬 표정으로 찢는다. 방학을 맞이해 고향에 간 윤동주. 송몽규는 그를 보며 넌지시 말을 건넨다. “조선 땅에서 일본어로 일본 이름 갖고 공부할 바에는 일본 땅에서 공부하는 거이 낫지 않갔니.” 고민하던 윤동주는 일본 유학을 결심하며 도항증명서 취득을 위해 ‘히라누마 도쥬’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계를 제출했다.

  박균섭 교수(경북대 교육학과)는 윤동주 시에 나타난 부끄러움을 이야기했다. “창씨개명령 이후 나온 <별 헤는 밤>을 보면 이름이 사라진 상황을 부끄러워하고 참지 못하는 내면이 표현돼 있어요. <병원>에서도 나라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젊은이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자가 없다고 하죠. 윤동주 시를 통해 식민지 땅에서 살아가는 데 있어 정서적으로 얼마나 힘들었을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창씨개명은 곧 우리 성과 이름의 죽음이었기에 윤동주 시에는 부끄러움, 참회와 같은 감정이 묻어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편 일본 유학은 문학을 향한 그의 사랑이 지극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김성연 교수는 그가 시인으로 성장하기 위해 유학의 길을 택했다는 입장이다. “1942년 당시 문학 전공생에게 유학은 취업에 도움이 되지 않았어요. 또한 동경 유학 때 윤동주는 전시체제에서 강제로 머리를 깎이거나 국경을 넘을 때는 수색과 검열 대상이 됐죠. 유학이 어떤 성공도 도피도 될 수 없는 상황에서 그의 유학은 멈출 수 없었던 지적 성장과 모색 그 자체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스라이 져버린 조선의 별
  영화 <동주> 속 조국의 독립을 꿈꿨던 두 청년의 절규가 절절하게 다가온다. 1943년 일제 고등계 취조실, 일본 고등 형사는 수갑을 찬 송몽규와 윤동주에게 한 종이를 내민다. 바로 조선인 독립운동을 꾸몄다는 조작 신문조서였다. 송몽규는 조서에 적힌 사항들을 하나하나 보며 울분을 터뜨린다. “이렇게 됐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가 이렇게 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워. 내가 이렇게 하지 못한 것이 괴로워서! 괴로워서 내래 서명한다.”

  그러나 윤동주는 서명을 거부하며 형사를 향해 말한다. “이런 세상에 태어나서 시를 쓰기를 바라고 시인이 되기를 원했던 게 너무 부끄럽고 앞장서지 못하고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기만 한 게 부끄러워서 서명을 못 하겠습니다.” 그리고 수갑을 찬 손을 들어 문서를 찢는다.

일본 유학을 위해 떠나는 송몽규와 윤동주. 가만히 창밖을 응시하는 동주의 모습에서 쓸쓸함이 느껴진다. 후쿠오카형무소에 수감된 동주는 해방을 6개월 앞두고의문의 죽음을 맞이한다. 사진출처 미디어로그영화 유튜브
일본 유학을 위해 떠나는 송몽규와 윤동주. 가만히 창밖을 응시하는 동주의 모습에서 쓸쓸함이 느껴진다. 후쿠오카형무소에 수감된 동주는 해방을 6개월 앞두고의문의 죽음을 맞이한다. 사진출처 미디어로그영화 유튜브

  도쿄 릿쿄대학에서 교토 도시샤대학으로 옮겨 공부하던 윤동주는 1943년 7월 시모가모경찰서에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됐다. 교토지방재판소의 재판 판결문을 보면 윤동주를 조선 독립 야망 실현을 위해 도시샤대학에 전교 후 송몽규와 상호 독립의식 양양을 꾀한 인물로 설명한다. 박균섭 교수는 윤동주가 체포된 이유에 관해 말했다. “윤동주는 독립운동이나 일본 고등 경찰이 의심할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송몽규와 가깝다는 이유로 체포됐죠. 송몽규가 일본에 오기 전 중국의 군관학교에 다니거나 독립운동을 한 행적 때문에 경찰에 구금됐던 전적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권은선 교수(중부대 공연예술체육학부)는 영화 속에서 식민지 남성으로 살았던 윤동주가 보인 저항에 관해 이야기했다. “영화 속 일본 고등 형사는 서명 절차가 문명국으로서 합법적 절차라고 말합니다. 사실 문명은 폭력 기반 위에 세워진다는 면에서 야만이라는 또 다른 속성을 띠고 있어요. 동주는 시를 쓸 수 없는 야만의 시대에 시를 쓰고자 한 자신이 부끄럽다고 말하며 종이를 찢죠. 끝까지 시인이 되려 한 그가 법과 문명의 폭력에 저항하는 방식이었고 이는 몽규보다 더 저항적이었습니다.”

윤동주와 송몽규가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 앞줄 중앙이 송몽규, 뒷줄 오른쪽이윤동주다. 둘은 다른 길을 걸어갔지만 결국 조선의 독립이라는 하나의 꿈을 꿨던청년들이었다. 사진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윤동주와 송몽규가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 앞줄 중앙이 송몽규, 뒷줄 오른쪽이윤동주다. 둘은 다른 길을 걸어갔지만 결국 조선의 독립이라는 하나의 꿈을 꿨던청년들이었다. 사진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영화 속 윤동주는 시인을 꿈꾼 자신이 부끄럽다고 말한다. 실제로 윤동주가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으나 확실한 건 시를 향한 그의 열정이 지금 우리에게도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김성연 교수는 윤동주의 시가 우리에게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고 주장했다. “윤동주는 시와 산문을 통해 암흑의 시대에 잊지 말아야 할 가치와 지향할 지점을 명확히 가리켰죠. 세상을 바꾸기 위해 청년 시인으로서 묵묵히 그 길을 걸었고 그 울림은 시대와 세대, 장소를 초월해 전달되고 있어요. 그의 진실한 소망이 결실을 맺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1945년 2월 16일, 해방 6개월을 앞둔 윤동주는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누구보다 조선을 사랑하고, 문학을 사랑했던 그는 단순히 시대가 허락하지 않았기에 너무도 어린 나이에 져버렸다.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랐던 윤동주 시인. 별이 된 그가 부끄럽지 않은 시인이었음을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의 시를 읊고 또 읊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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