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짐승 한 마리가 왔다 
걸어왔다 긴 팔로 담을 타 넘고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 내 방문을 
열었다 그것은 물속을 걷듯이 
내게 와서 사람의 말을 잔뜩 
내 방 안을 제 털로 휘저어놓고도 
알아듣지 못했다 짐승은 왔던 
길로 다시 갔다 그것이 거쳐간 
남긴 말의 조각들을 퍼즐 맞추듯 
이렇게 저렇게 꿰어맞춰 보았는데 
이윽고 말 하나가 만들어졌다 

『끝을 시작하기』 프롤로그 중 발췌 

“저는 우연들이 좋더라고요. 시를 쓰는 과정에서의 우연, 시집을 묶어 내면서의 우연, 시를 읽는 독자가 만들어내는 우연. 이런 우연들 속에서 제 시에 관한 의미들이 계속해서 발생하죠. 그래서 좋아요.” 

  시인이자 이제는 유튜버이기도 한 김장근 교수(문예창작전공)가 기자에게 전한 말이다. 그가 시집을 계속해서 내는 이유이자 재미인 우연. 기자에겐 그와의 만남도 뜻하지 않게 ‘시’에 관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준 소중한 시간이었다. 

  시의 출발은 ‘너’로부터 

  기자와의 대화에서 김근 시인(김장근 교수의 필명)은 물음표를 많이 던졌다. 처음엔 당황스러웠다. 보통 물음표를 기자가 내밀면 마침표로 돌아오던 일전의 인터뷰와 확실히 달랐다. 차츰 그러한 물음에 익숙해진 기자는 그가 던진 물음표에 생각을 더하게 됐다. 그리곤 기자의 솔직한 생각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시는 어려운 것 같아요. 어떤 의미인지, 어떤 의도인지 한 번에 와닿는 경우가 많지 않죠. 해당 부분을 곱씹으면서 유추하는 게 대부분이에요. 또한 스스로 생각한 의미나 의도가 맞는지 바로 확인할 정답지가 없어 불안한 부분도 있습니다.” 

  돌아온 대답은 그동안 시를 감상하기보단 읽고 있던 기자를 반성하게 했다. “시를 많이들 어려워하죠. 왜 어렵게 느껴지는지 아세요? 교과서에서 시를 배워서 그래요.” 김근 시인은 시를 마주했을 때 시어의 표면적 의미와 그 너머에 숨겨진 의미까지 예상하게 만드는 교과서식 학습이 시를 어렵게 만든다고 설명했다. 의미를 파악하기에 앞서 시를 감상하며 어떤 감정이 동요되고 감각이 깨어나는지를 경험해 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교과서의 시를 통째로 감상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걸요? 대부분의 시가 독자의 적극성을 필요로 하는데도 말이죠. 시를 스스로 소화해 보는 것. 이게 시가 독자들에게 요구하는 적극성이에요. 그러다 보면 그 시에 관한 각자의 의미가 발생하게 됩니다.” 

김근 시인이 등단 후 처음 발간한 시집 『뱀소년의 외출』은 그에게는 첫사랑이자 첫 발자국과 같은 작품이다. 사진 소지현 기자
김근 시인이 등단 후 처음 발간한 시집 『뱀소년의 외출』은 그에게는 첫사랑이자 첫 발자국과 같은 작품이다. 사진 소지현 기자
그는 반짝이는 눈으로 해당 작품을 집필했던 기억을 상기했다. 사진 소지현 기자
그는 반짝이는 눈으로 해당 작품을 집필했던 기억을 상기했다. 사진 소지현 기자

  그의 작품 역시 독자들에게 이러한 적극성을 요구한다. 첫 시집 속 표제작 <뱀소년의 외출>이 그러하다. <뱀소년의 외출>은 『삼국유사』 의해편에 등장하는 사동(蛇童, 뱀아이)을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로 데리고 와 돌아다니게 하면 어떨까 하는 작가의 상상력에서 출발한 시다. 설화 속 인물을 현실로 가져와 설화를 변형시키고 원초적인 대상에 관한 물음과 시인의 경험을 녹여냈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의 경험을 이해시키거나 시에서 던진 물음에 답을 주지 않는다. 각주에서 ‘뱀소년’이 누구인지에 관한 설화적 배경만 설명하고 그 외 해설은 없다. 시를 감상하는 내내 흐름을 따라가며 시인의 물음에 독자 스스로 답을 내길 바랄 뿐이다. 아래 시구가 이런 시인의 의도를 여실히 보여준다. 

어느 것이 허물 안의 기억인지 
어느 것이 허물 바깥의 기억인지 
알 수 없다 나는 안인가 바깥인가 

  평범함을 거부하고, 통념을 벗어던지고 

  인터뷰 전 김근 시인의 시 세계가 궁금했던 기자는 시집 『뱀소년의 외출』에 담긴 모든 시를 읽어봤다. 첫 느낌은 ‘난해하다’였다. 한글은 쉼표나 온점과 같은 문장 부호, 적당한 문단 구분을 통해 말에 쉼을 준다. 호흡을 조절하면서 빠르게 맥락을 이해하도록 돕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의 시는 문장 부호와 문단 구분이 거의 없어 호흡 조절과 맥락 파악이 어렵다. 

  시집 『뱀소년의 외출』 속 <헤헤 헤헤헤헤,>란 시에서 이러한 특징이 잘 드러난다. 드물게 보이는 쉼표와 물음표를 제외하곤 어디서 말이 끝나는지를 알 수 없다. 가장 흔히 쓰이는 문장 부호인 온점은 아예 찾아볼 수 없다. 그렇게 그의 언어와 이야기를 숨 가쁘게 쫓아가다 보면 ‘헤헤 헤헤헤헤,’란 시어와 함께 시가 끝난다. 

  이렇듯 김근 시인은 독특한 언어 표현이 자신의 시를 대표하는 특징이라고 꼽았다. “아마 다른 문인들에게 제 시를 보여주면 무조건 김근의 시라고 할걸요? 저만큼 시의 언어가 이상한 사람이 없어요. 읽기가 굉장히 까다롭죠. 이는 독자들이 가질 수 있는 선입견을 배제하기 위함이에요. 자칫 잘 이해했다고 예단하는 순간 시에 관해 선입견이 작동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인 규칙을 파괴하는 김근만의 언어만큼 <헤헤 헤헤헤헤,>의 내용에도 저항심이 잘 묻어나 있다. “헤헤 헤헤헤헤,”는 아기들의 웃음소리다. 그런데 이 아기들은 몸통 없이 머리만 있는 아기들이다. 그런 아기들을 향해 어미는 말한다. “언제 다 죽을래?” 이런 이야기가 진행되는 공간은 ‘뒤란’이다. 뒤란은 집 뒤편에 있는 울타리의 안쪽 공간을 의미하며 어머니의 공간으로 통용됐다. 보통 시에서 모성적 공간이나 어머니와 아기들이 등장하면 긍정적으로 그려지곤 한다. 김근 시인은 이런 통상적인 규칙을 뒤집고 싶었다고 전했다. 

  “많은 시인이 모성적 공간을 화해의 공간으로 설정했어요. 하지만 이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일 수 있답니다. 갈등을 겪던 모든 것들이 오로지 모성을 통해, 모성적 공간에 오기만 하면 화해를 한다니. 현실에선 있을 수 없는 설정이죠. 현실을 보여주기 위해 분열과 갈등을 있는 그대로 담아 불안과 공포를 마주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헤헤 헤헤헤헤,>에서는 다소 공포스러운 설정을 통해 이런 이데올로기를 재구성했습니다.” 

  너가 없는 한 충분해질 수 없어서 

  한국시집박물관 홈페이지에 김근 시인을 검색하면 이렇게 소개된다. “김근의 시는 설화적인 공간을 바탕으로 역동적인 시 세계를 구축하는 것을 특징으로 합니다. ‘이곳’과 ‘저곳’, ‘안’과 ‘밖’을 넘나드는 시적 화자를 통해 탄력 있고 섬세한 문장을 구사함으로써 작가 특유의 미감을 형성해내죠. 일상에서 마주하는 불편한 순간, 기괴한 이미지, 공포스러운 분위기 등을 포착함으로써 이러한 분위기를 조장하는 우리의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낸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이러한 평가 덕분에 자신의 ‘현대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설화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현실의 원초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것 또한 김근 시인만의 현대성이 될 수 있다는 평가였기 때문이다. 김근의 시는 주로 설화를 바탕으로 하고 고어를 사용한다. 때문에 그는 과거 자신의 작품이 가진 현대성이 무엇인지 고민이 깊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헤헤 헤헤헤헤,>를 통해 동료 시인들로부터 고민의 답을 확인받았다. 그가 특별히 좋아하는 작품으로 해당 시를 꼽는 이유이기도 하다. 

  “본인의 시가 어떤 매력으로 독자들에게 다가갔으면 하나요?” 독자나 동료 시인들이 찾아낸 시의 의미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와의 대화에서 기자는 궁금해졌다. 김근 시인은 웃으며 답했다. “재미있게 다가갔으면 좋겠어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해도 즐겨듣는 힙합 가사처럼요.” 시어 속에서 재미를 느끼고 계속해서 던져지는 질문에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감각과 시선의 변화를 체감한다면 보람찰 것 같다는 대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씁니다 

  지난해 9월, 김근은 신작 『끝을 시작하기』를 발간했다. 아래는 『끝을 시작하기』 속 에필로그에 담긴 시구이다. 

김근 시인은 독자들이 신작 『끝을 시작하기』를 접했을 때 생각하기보단 그저 말 자체를 따라가길 바란다. 사진 소지현 기자
김근 시인은 독자들이 신작 『끝을 시작하기』를 접했을 때 생각하기보단 그저 말 자체를 따라가길 바란다. 사진 소지현 기자

나는 누군가의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이제 당신 차례 당신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끝나지 않을 것만 말도 
당신의 웃음도 끝나지 않을 것만 
같다 같은데 나는 목소리 수집가 오늘도 
거리를 배회한다 당신의 목소리를 
찾고 있다 거기 있는가 당신 있다면 
어서 나를 찾아라 나를 알아보라 어서 

  그는 ‘목소리 수집가’가 마치 시인과 같다고 생각했다. “시인이란 존재는 타자에게 목소리를 빌려주는 사람이라고 오랫동안 생각해 왔어요. 시에 담긴 말들을 시인의 자의적인 말이 아닌, 시인의 말을 빌려 하는 타자의 말이라고 여기는 셈이죠.” 

  아마 그가 시를 불필요, 불가능, 불확실로부터 오는 매력이 있다고 표현한 이유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쓸모로 가득 찬 세상에서 쓸모없음이 지닌 의미가 시의 가치이고, 정해둔 경계 너머로 갈 거라는 자칫 불가능해 보이는 꿈꾸기가 시의 지향이고, 모호한 언어가 주는 의심과 질문이 시가 주는 교훈일 거라는 김근 시인. 지금까지 소개한 시집 외 여러 시집에서도 시를 향한 김근의 가치관은 충분히 돋보인다. 시집을 계속해서 발간하지 않으면 시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그의 열정처럼 각각의 시집마다, 시마다, 시어마다 담겨있는 목소리는 다양하다. 그의 끊임없는 목소리를 빌려 우리의 목소리를 찾아보면 어떨까? 

이제 그만 

내 목소리들의 주인이 되어라 

  그의 이러한 말에 힘을 얻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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