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깨달음은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온다. 거센 비바람이 불던 날, 평화로운 카페 안에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때였다. 한 여성이 카페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채 문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세차게 내리는 빗속에서도 한참을 머뭇거리는 그의 발걸음에 의아했으나, 이내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있음을 알아채고 불현듯 ‘혹시 이 카페 노키즈존(No Kids Zone)인가?’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너무나도 포근하게만 느껴졌던 카페 안의 시트러스 향이 괜스레 불쾌했다. 부끄러웠다. 누군가의 권리를 무심히 짓밟은 채 ‘불편한 편의’를 누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노키즈존은 영·유아와 어린이, 이들을 동반한 고객의 출입을 제한하는 공간이다. 지난해 11월 한국리서치가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노키즈존 관련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10명 중 7명꼴로 노키즈존 운영을 찬성한다고 밝혔다. 대다수가 ‘조용하고 편안한 시간을 보내려 하는 다른 손님에 대한 배려’와 ‘노키즈존을 통한 매장 환경 및 분위기 개선’ 등을 이유로 들었다.

  손님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며 아동이 갖는 권리는 경시하는 이들의 모습은 그 얼마나 모순적인가. 2017년 국가인권위원회는 「대한민국헌법」 제11조와 「국가인권위원회법」 제2조, ‘아동의 권리에 관한 협약’을 근거로 노키즈존은 아동 차별이며 합리적 이유 없이 나이만을 이유로 아동을 배제하지 말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권고는 권고일 뿐이라는 듯 ‘노키즈존’을 당연하게 여기며 ‘잼민이’가 그저 우스운 단어로 소비되는 요즘이다.

  우리들의 공간과 문화에 아이들의 자리를 내어주지 않겠다는 것. 노키즈존은 어린아이를 나와 동등하게 존엄한 존재로 여기지 않고 선을 긋는, 약자를 향한 명백한 차별이다. 소위 이야기하는 ‘시끄럽고 귀찮은’ 아이를 향한 분명한 혐오다. 공공장소의 현장에서 사회와 소통하며 예절을 터득해야 하는 아이들에게 그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그렇게 노키즈존은 사회가 아이에게 건넬 수 있는 모든 형태의 가르침을 사전에 차단한다.

  ‘어른들은 누구나 처음에는 어린이였다. 하지만 그것을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다.’ 『어린 왕자』(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씀) 속 문구처럼 우리 역시 과거에는 아이였다. 그 아이가 진짜 어른이 됐다면 억압보다는 배려에, 편의보다는 공존에 가치의 무게를 두어야 한다. 서투른 아이들을 포용하며 따뜻하게 사랑해야 한다.

  ‘노○○존’에 다른 단어가 들어갔다면 어땠을까. 21세기 사회 속 어떤 공간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 자체가 구시대적인 발상이다. 세월이 흘러 노키즈존을 경험한 아이들은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나이 많은 이의 출입을 금지하는 이른바 ‘노엘덜리존(No Elderly Zone)'을 만들지도 모른다. 그 높은 문턱 앞에서 가로막히고 싶지 않다면 눈을 뜨자. 최소한의 따뜻함과 배려조차 없는 사회를 만든 불온한 우리가 훗날 존재할 곳은 없을지도 모르니.

  이서정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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