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하면 내가 모든 책임을 지는 거야.’ 코로나19로 공교육이 마비되자 김명중 EBS 사장(신문방송학과 74학번)은 총대를 멨다. 모두의 우려 속에서 그는 사장직을 걸면서까지 교육 정상화를 위해 발 벗고 나섰다. 캐릭터 사업 전폭 지원을 선언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불신의 시선이 가득했지만 결국 ‘펭수’를 성공시켰다. 그렇게 김명중 사장은 항상 해내겠다는 일념 하나로 뛰어들었다.

사진제공 김명중
사진제공 김명중

“신념이 강하면 태산도 움직인다는 말이 있어요. 믿음을 갖고 열심히 노력하면 한 계단씩 올라가 결국 바라는 것에 꼭 도달한다는 거죠. 항상 도전에 따른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실패 없이 어떻게 성공이 있겠습니까. 학생들이 과감하게 도전하고 원 없이 열정을 쏟았으면 합니다. 젊었을 때는 얼마든지 실패해도 다시 딛고 일어설 수 있잖아요.”

'펭수'의 사장님으로 유명한 김명중 EBS 사장(신문방송학과 74학번)은 대한민국 위성방송의 개척자로도 불린다. 30여 년간 대한민국 방송계에 이바지해온 그는 코로나19에 대응해 원격 교육 모델을 구축했다. 이를 성공시키기 위해 2주간 퇴근을 포기하고 야전침대 신세를 지며 몸을 불사르기도 했다. 마르지 않는 열정으로 늘 도전의 길을 걷는 김명중 사장을 만나봤다. 

  -중앙대에서 석사 과정까지 마쳤다. 기억에 남는 일을 꼽자면. 

  “대학교 2학년 때 이준일 교수님의 국제커뮤니케이션 강의를 들었던 게 생각나네요. 발표 과제로 언론탄압을 받았던 아르헨티나의 일간신문인 ‘라 프렌사(La Prensa)’를 조사했는데 국내에 자료가 거의 없어 진땀을 뺐죠. 직접 한국주재 남미 대사관들을 찾아가 자료를 얻고 일본의 사회과학대사전을 번역하기도 했답니다. 교수님께서 이런 제 노력을 가상하게 여기셨는지 만점을 주셨어요. 그 추억이 제 마음 한편에 남아있네요.” 

  -독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다시 한국행을 택했는데.  

  “한국으로 돌아온 건 박사 논문의 영향이 컸죠. 유럽의 위성방송에 관한 논문이었는데 이 분야의 논문이 한국에서는 전무한 상태였어요. 그래서 유학 시절 제 독일어 사전 뒤에 만약 한국에 뉴미디어위원회가 구성된다면 꼭 참여하고 싶다고 적었습니다. 제 연구 경험을 한국 위성방송 출범에 접목해보고자 하는 의지가 확고했던 거죠.” 

  -연구 경험이 실제로 도움이 됐는지. 

  “그럼요. 덕분에 한국 위성방송의 방향성과 방법을 제시할 수 있었습니다. 박사 논문을 쓰면서 유럽의 범국가적인 위성방송 정책과 모든 채널을 분석했기 때문이죠. 구체적으로 KBS 위성방송의 기본 계획을 수립했어요. 한국 국제방송의 기본 계획 마련에도 도움을 주며 아리랑TV 탄생에 일조하기도 했습니다.” 

  -2004년에는 아리랑TV를 운영하는 국제방송교류재단에 부사장으로 취임했다. 재임 중 보람찼던 일을 떠올려본다면. 

  “아리랑TV에서 이라크 아르빌에 파병된 자이툰 부대에 국내 언론 중 유일하게 특파원을 보낸 적이 있어요. 직접 이라크 범정부대책위원회에서 아랍 채널 설립을 따낸 덕분이었죠. 47세의 나이로 공직에 섰기 때문에 육체적으로는 많이 힘들었지만, 당시 사장님의 신뢰 속에서 피곤한 줄 모르고 일했습니다. 제 잠재력을 발견할 수 있어 유익하고 소중한 시간이었기도 하고요.” 

  -이후 10대 EBS 사장에 지원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나. 

  “도전하고 싶었어요. 그간 방송 경영, 정책 그리고 연구 분야에서 축적한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기관에서 힘을 쏟아 보겠다는 열망이 있었습니다. 특히 제가 지원했을 당시 EBS는 약 229억원의 사업 적자를 기록하면서 재정 상태가 좋지 못했어요. 면접장에서 3년이라는 짧은 임기지만 EBS의 경영 상태를 회복시키겠다고 밝혔죠.” 

  -임기 1년 만에 코로나19가 창궐했다. 전례 없는 판국 속에서 EBS는 원격 교육의 관제탑을 자처했는데. 

  “EBS는 어느 나라에서도 시도하지 않았던 형태인 ‘EBS 라이브 특강’을 시행했어요. 학교가 문을 닫고 교육의 공백을 어떻게 메워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 긴급하게 움직였던 거죠. EBS의 자체 채널뿐만 아니라 IPTV, 네이버와 카카오TV, 지상파 OTT 플랫폼, 유튜브 등 거의 모든 매체를 확보해 실제 학교 수업 시간에 맞게 학년별로 생방송 교육 콘텐츠를 제공했습니다. 이 시도는 이후 출범한 ‘온라인 클래스’ 환경 구축에 보탬이 됐고 학생들과 학부모님들의 격려를 받을 수 있었죠.” 

  -갑작스러운 상황에 부족했던 부분은 없었나. 

  “어려움이 많았죠. 동시 접속자 수가 2000명으로 제한됐고 학교마다 교육 과정이 너무나도 다양했어요. 개개인이 가진 기기의 사양과 환경도 달랐기 때문에 수많은 문제를 개선해야 했습니다. 3개월간 단 하루도 쉬지 못하고 총력을 다해 대응했어요. 그래도 전 직원의 밤낮없는 열정과 기업의 적극적인 협조 덕분에 EBS가 무사히 제 역할을 다할 수 있었어요.” 

  -팬데믹과 함께한 재임 기간이 어떤 의미로 남았는지 궁금하다. 

  “막중한 책임감으로 무모할 수도 있었던 혁신에 도전했던 것 같아요. 더군다나 학교 교육을 되찾기 위해 비대면 교육의 길을 열었던 과정은 극도로 긴장된 순간의 연속이었죠. 다행히 국민들에게 과분한 응원을 받아 기뻤습니다.” 

구독자 1만명 선물 비용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 묻자 대답하는 펭수. 출처 유튜브 자이언트펭TV
구독자 1만명 선물 비용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 묻자 대답하는 펭수. 출처 유튜브 자이언트펭TV

  -김명중을 외치는 EBS 마스코트 펭수 덕분에 전 국민에게 이름을 알리기도 했는데.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됐습니다.(웃음) 밖에서 제 이름을 부르면 주변 시선이 느껴지기도 해요. 창작자들의 창의성을 존중하기 위해 카메오 요청에도 응했더니 어느새 EBS 세계관 속 일부가 돼버렸습니다. 사장 이름을 아무렇지 않게 부르는 펭수에게 사람들이 대리 만족과 탈권위를 느꼈던 것 같아요. 저를 딛고 펭수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다면 기꺼이 응해야죠.” 

  -펭수 캐릭터 사업을 어떻게 성공시킬 수 있었는지. 

  “펭수는 모바일 시대의 생존 전략이었어요. EBS는 교육 방송이기 때문에 끼를 발산하기 어렵고 엄격한 부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유연성이 있는 OTT 플랫폼을 택했죠. 그리고 지상파 문법에 익숙해진 기존 세대가 아닌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들에게 모든 기획을 맡겼습니다. 그 누구도 이 프로젝트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했죠. 여기에 경계와 금기를 뛰어넘는 제작진과 펭수의 용기가 더해져 사람들을 사로잡은 것 같네요.” 

  -3월 7일, 3년 임기의 끝을 앞두고 있다. 현시점에서 만족스러운 점은. 

  “EBS의 역량을 국내외로 인정받아 기분이 좋습니다. 2020년에는 한 해 동안 대통령상을 무려 4개나 수상했어요. 원격 교육 시스템으로 해외 언론들의 찬사도 받았죠. 고품질 콘텐츠 역시 많이 제작했어요. 일례로 지난해 시작한 ‘위대한 수업 GREAT MINDS’가 호평을 받았어요. 세계적인 석학들을 섭외하는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결국 성공해 지식 민주주의로 향하는 유의미한 발걸음을 디뎠다고 생각합니다.” 

  -취임 전 200억대의 적자에 시달리던 EBS가 2020년 약 63억원의 흑자를 기록한 점도 놀랍다. 

  “사실 EBS는 공영 방송이지만 공적 재원이 전체 예산의 약 30%에 불과합니다. 수신료 전체의 약 2.8%를 받기 때문이죠. 가구당 월 70원 정도밖에 안 되는 겁니다. 그럼에도 흑자 경영을 달성할 수 있어 감사했어요. 지난해 돌발 변수로 인해 연속 흑자를 기록하지 못한 점이 아쉽지만, 예산이 2000억원대에서 현재 3500억원대로 도약했기에 의미가 있었다고 봅니다.” 

  -퇴임 후 어떤 일들을 계획 중인지. 

  “아직 특별한 계획은 없어요.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려왔으니 이제 모든 일에서 해방된 채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죠. 매일 무등산도 오르며 운동도 하고 그동안 시간이 없어 못 했던 외국어 공부도 마저 해볼까 생각 중입니다. 영어가 독일어만큼 유창해질 수 있도록 열심히 공부하고 싶어요.” 

  -중앙대 후배들에게 전해줄 말이나 조언이 있다면. 

  “위기를 기회로 삼았으면 합니다. 비대면 시기가 재미없다며 아쉬워만 하지 말고 기회로 만들 수 있도록 지혜를 발휘하면 좋을 것 같아요. 대학 생활은 인생의 황금기잖아요? 여러분들이 장차 희망하는 분야를 마음껏 탐구하고 도전하는 시간을 보내면서 미래 인재로 성장할 기초 체력을 키웠으면 해요. 더불어 세상과 공감할 수 있는, 소통 능력을 갖춘 인재로 성장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에게 중앙대란?

  “젊은 시절 많은 영향을 준 존경하는 스승이 있던 곳, 학업에 정진했던 도서관이 있던 곳, 그리고 함께 뛰놀며 평생의 동반자가 된 친구, 동료, 선후배를 만난 곳이죠.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미래의 꿈을 키워온 캠퍼스가 있는 곳 아니겠어요? 입학식을 치른 지 48년이 지난 지금도 내 가슴 속에는 영원히 살아 꿈틀거리고 있는 소중한 모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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