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를 평가하는 일은 어느새 유별난 일이 아니다. 유별나지 않아 그대로 무뎌졌을까? 수많은 감정의 소용돌이 속 뿌리박힌 기준, 곧 모든 경계는 녹고 있는 빙하처럼 잔뜩 틈이 벌어진 채로 깊은 골을 만들고 있다.

  남과 여의 경계, 흑과 백의 경계, 노와 소의 경계. 어떤 이들은 성급하게도, 자신과 상반된다고 정의한 것들은 서로의 속에 녹아들 수 없다는 결론을 짓곤 한다. 최근 이러한 배척은 소위 말하는 ‘물타기’로 번지기도 하며 수많은 갈등을 낳고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세상에서 그들의 비(非)공존은 완벽한 불가능에 가깝다. 이처럼 둘 중 하나가 없어질 수 없는 구조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직접 나서 상대와 구분될 수 있는 벽을 세우기 시작한다. 같은 공간을 살아간다는 게 무색할 만큼 극명하게 그어진 선은 점점 진해진다. 

  이뿐인가? 아무래도 세상의 모든 벌어진 틈을 포괄하는 것은 유와 무의 경계인듯하다. 같은 하늘 아래서 살아가는 사람들끼리 있음과 없음을 따진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 됐다. 물론 이러한 기준은 눈에 보이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가지지 못한 것들과 가진 것들에 대한 자기 검열은 인간 자체에 대한 경계를 만들며 자신을 재단하기에 이른다. 특히 가지지 못한 것들에 대한 검열은 위험한데, 이는 무언가에 대한 혐오와 죄의식으로 이어지기 쉽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세계에 그어진 수많은 경계 속에서 우리는 매일같이 그 위를 지나고 있다. 언제 발현될지 모르는 평가와 검열, 폄하 속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언젠가 낯선 서로의 기준이 된다. 손만 내밀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쉽게 손을 뻗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 나와 다른 누군가에 대한 폄하는 이제 일상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일이 됐다. 다만 이 세상 속 경계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떡해야 할까.

  『피프티 피플』(정세랑 씀)에는 약 50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남남으로 정의된 약 50명의 인물은 동떨어진 듯 보이지만 결국엔 서로 연결돼있다. 그들의 삶에는 마냥 웃음 지을 수 없는 사연들이 많지만, 신기한 점은 그 속에서도 선의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선의는 사람 사이 울타리를 무너뜨렸고 하나의 이야기가 됐다.

  이 세상이 굴러가는 건, 뻔하게도 누군가의 배려와 이해 덕분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 선의의 전제 조건이 경계라면, 우리는 어쩔 수 없다. 어느 작가의 말처럼 이 글을 읽는 당신, 안온한 혐오의 세계에 안주하고픈 유혹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사랑 쪽으로 나아가고자 분투하는 사람이라는 걸 안다. 경계 어린 세상의 익숙함에 맞서 선의라는 뻔한 애정을 믿어보자.

김지현 대학보도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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