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히 인간적인 세상입니다. 정확히는 인간 ‘중심’적인 세상이죠. 인간은 스스로 자연의 일부라며 주변의 동식물과 공존한다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인간은 동식물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필요와 선택에 의해 존재하고 있습니다. 참 ‘인간적인’ 모습이죠. 

  지난 학기 뉴미디어부에서 생태적 감수성 영상을 제작하며 환경 문제에 눈을 돌렸습니다. 이번 학기에는 폐어구, 공장식 축산업 등 사진 기획을 하며 환경 문제를 꼬집었죠. 대부분 기획 기사가 그렇듯, 문제의 원인과 해결방안을 찾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지루하리만큼 원인도 인간, 해결책도 인간이더군요.  

  육지 포유류 중 인간과 인간이 키우는 가축이 차지하는 비율은 약 97%라고 합니다. 즉 단 3%만이 ‘자연스러운’ 것이고, 나머지는 인간 혹은 인간에 의한 것이죠. 사실 우리가 하루에 먹는 고기의 양만 돌아봐도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겁니다. 사람보다 닭이 더 많다는 사실도 말이죠.

  가축의 양은 인간 수를 뛰어넘을 만큼 엄청나지만, 결코 그 종류는 많지 않습니다. 인간이 기르는 가축은 익히 아는 닭, 돼지, 소가 주를 이루며 생산성 높은 소수의 품종이 대량으로 길러지고 있죠. 먹기 좋은 품종으로 획일화된 것입니다.  

  우리가 먹는 과일과 벼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에게 선택받은 식물 종만이 살아남을 수 있죠. 바나나도 사과도 수많은 종이 존재하지만, 그런 건 중요치 않습니다. 보기도 먹기도 좋은 품종을 선택하고 개량해 생산하는 것이죠. 

  동식물이 다양한 유전자를 가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 다양성을 파괴하고 있죠. 인위적으로 선택된 가축이 특정 질병에 취약하다면, 대량으로 생매장하기도 합니다. 만일 유전적으로 다양하다면 자연스럽게도, 살아남는 동물이 있겠죠. 단일품종이 된 바나나의 멸종위기설이 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자연의 일부인 인간도 다양한 게 당연합니다. 자연스러운 거죠. 하지만 진정 다양한 인간사회일까요? 틀에 갇힌 교육을 받고, 정형화된 선택지에서 진로를 택하고, 사회에 고착된 잣대로 판단하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기자는 이제 효율적으로 인재를 판별하기 위한 기준, ‘스펙’ 아래 놓여있죠. 

  말로는 다양성을 추구한다고 하나, 생산의 효율을 위해 인간이 동식물을 선택해 기르듯 인간 또한 인위적으로 선별되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을 불안하고 불행하게 만들죠. 결국 다양성이 결여된 인간사회도 위험에 놓인 건 마찬가지입니다. 

  환경을 주제로 한 사진 기획의 메세지는 항상 같았습니다. ‘인간을 위함이었으나, 인간을 해하는 행위였다.’ 참 어리석은 인간이죠. 이제는 단지 ‘인간적인’ 관점은 치우고, ‘자연스럽게’ 다양성을 존중하길. 부디 동식물에게도, 스스로에게도 어리석은 인간은 되지 않길 바라며 수첩을 닫겠습니다.

지선향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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