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플 때일수록 연결됨의 중요성을 더욱 실감해 왔다. 어릴 적 감기에 걸린 나를 간호해 주던 가족이 있었고, 체육 시간에 공에 맞아 넘어지기라도 하면 우르르 몰려와 괜찮냐고 물어주었던 친구들이 있었다. 그리고 가족도 친구도 없는 자리에서는 낯선 타인들이 내게 대가 없는 친절을 베풀어 주었다. 내 몸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일수록 타인의 존재를 절실히 실감하게 된다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 연결됨은 복잡한 가르침 없이도 내가 이 세상과 어떤 방식으로든 얽혀 서로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고, 돌봄이라는 가치를 실천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2일, 중앙대에서 진행된 서울캠 성평등위원회 폐지를 규탄하는 공동행동에 참여했다. 사회 전반에 불어온 백래시의 해일이 중앙대에도 크게 미쳤다. 담담하게 이어지다가도 울컥울컥 올라와 멈춰 서버리고야 마는 발언들을 들으며 내 안의 감정 또한 공명했다. 산발적으로 흩어지던 말과 감정이 하나로 묶이는 순간 발생하는 연대감이 있다. ‘함께 있다’라는 감각,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순간에도 그것은 언제나 나의 삶을 구성해 왔다. 

  아픈 시기일수록 연결돼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진다. 몸뿐만 아니라 정신 또한 그렇다. 혼자만의 생각은 다른 사람의 마음에 가닿았을 때 또 다른 두터운 의미를 생성한다. 혼자만의 것이었다면 방안을 맴돌다 벽에 부딪혀 자연히 소멸했을 외침은 공동의 것이 되어 다시 생명력을 얻어 이어진다. 

  그래서 이 외침이 결국 무슨 의미가 있는가, 너희들이 아무리 외쳐봤자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타인에 대한 연민』에서의 마사 누스바움의 말을 빌려와 답하고 싶다. ‘이런 소규모 행사들이 세상을 뒤흔들지는 못한다. 하지만 우리는 거대한 추상보다 작고 일상적인 것들에서 감정적 자양분을 얻는다. 삶 전반에서 선하고 유용한 어떤 것이든 생산해내기 위해서는 감정적 자양분이 반드시 필요하다.’ 

  집회 하나가 사회를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아는 것만으로도 깊은 무력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이 생긴다. 각자의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누군가 넘어졌을 때 달려와 괜찮냐고 물어줄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 함께 있다는 감각이 감정적 자양분으로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지속되는 일상의 가능성을 믿게 된다.  

  그날 우리가 외친 단어들이 분명 중앙대에 작은 균열을 냈음을 알고 있다. 후에 벌려놓은 틈을 비집고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그렇게 깊이 뿌리 내려 버티다 보면 어느 날 선하고 유용한 열매가 맺힐 것이다. 당신들이 만들어온 궤적을 따라 걷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용기를 이어받고자 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우리 같이 살아나가자.

안지영 학생
간호학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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