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는 인문대생이다. 그중에서도 소위 ‘돈 안 된’다는 어문학을 전공하고 있다. 무슨 일을 하면서 먹고살아야 할지 고민하던 기자는 우연히 12편의 독일문학작품을 읽었고 전공을 진심으로 애정하게 됐다. 그래서 수첩을 열었다. 인간과 세상에 관한 담론을 공부하면서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가 조금이나마 답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근대 이후 등장한 계몽주의 사상. 그에 부합한 합리적인 이성을 가진 사람이 되기 위해 『에밀리아 갈로티』(고트홀트 레싱 씀)속 인물들은 그 틀에 맞춰 사고하고 행동했다. 하지만 이성의 모순을 자각한 것일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요한 볼프강 폰 괴테 씀) 속 베르테르는 자신의 내면과 본능에 충실해 자살을 택했다. 괴테는 허울 가득한 귀족 사회를 비판하다가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서는 귀족과 타협하기도 한다. 헤르만 헤세가 『데미안』에서 성숙을 통해 새로운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는 너무나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한 탓이었을까, 프란츠 카프카는 『변신』에서 자본주의 속 물질에 정복당한 현대인을 벌레로 만들어 추락시켰고 이는 우리에게 냉철한 현실 직시의 필요성을 안겨줬다.    

  이렇듯 문학은 인간의 흔적을 기록한 거대한 역사책이다. 문학이 그려내는 세상에는 결국 인간과 이 세상에 관한 담론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12편 문학작품의 작가들은 하나같이 인간 삶에 관심이 많았고 인간을 걱정했으며, 그들을 사랑했다. 작품 속 인물들은 당연하다고 여기던 가치에 모순을 품고, 모순이 드러나고 그에 부딪히며 발전해왔다. 이 모든 것이 세상과 자신을 향한 물음이고 더 나은 가치를 위한 성숙의 과정이었다.    

  기자는 수백 년도 전에 쓰인 작품을 읽으며 울고 웃었다. 21세기의 삶은 당시와 많이 다르고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은데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야기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는 이유는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 삶 속에 녹아 있는 보편성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바로 그 규칙을 담고 있다. 살아가는 과정에서 벽을 마주했을 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가치에 모순을 품었을 때 인문학은 이정표를 제시한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시행착오를 줄여 더 나은 가치를 찾기 위해.      

  인문학이 위기라고 한다. 인문학이 수행할 역할이 없어지고 있다는 말이다. 인간 생존을 바라면서도 세상을 탐구하는 학문을 위기로 몰다니 퍽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기자는 AI가 세상을 지배한다는 디스토피아에서 인문학이 인간의 역할을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계와 정보의 홍수에서 인간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냐는 질문에 답할 실마리 또한 인문학 속에 있을 것이다. 인문학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바로 인간 삶 자체이기 때문이다. 인문학의 위기는 곧 인류의 위기다. 그러니 인간을 위한 담론을 연구하는 사람들이여, 문송하다고 하지 말길. 우리는 세상의 안내자일지도 모르기에. 

최수경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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