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압 속에서 쇼스타코비치로 산다는 것
  • 권지현 기자
  • 승인 2021.09.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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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이 예술을 만났을 때

음악은 한 인간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조명해준다. 
그것은 인간의 마지막 희망이며 
마지막 피난처이기도 하다 
『증언』(솔로몬 볼코프 씀) 中

‘예술가’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자신의 예술세계를 끝없이 탐험하는 자유로운 영혼이 떠오를 테다. 하지만 20세기 러시아는 음악가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음악 세계에 취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도 스탈린 체제 아래에 목숨의 위협을 받으며 활동한 작곡가였다. 그의 악보에 나타난 음표는 과연 당을 향한 충성심이었을까, 자신의 음악을 지키기 위한 저항심이었을까. 롤러코스터 같은 쇼스타코비치의 생애를 작품과 함께 살펴보자.

쇼스타코비치를 기념해 2000년에 러시아에서 발행된 우표. 그는 20세기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곡가로 시대의 공포를 향한 냉소적인 작품을 썼다.사진출처 『음악사를 움직인 100인』(진회숙 엮음)
쇼스타코비치를 기념해 2000년에 러시아에서 발행된 우표. 그는 20세기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곡가로 시대의 공포를 향한 냉소적인 작품을 썼다. 사진출처 『음악사를 움직인 100인』(진회숙 엮음)

  잠자는 스탈린의 코털을 건드리다 
  20세기 초 서구에서는 전통적인 희로애락 정서에서 벗어나 학구적이고 난해한 현대음악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초기 소련은 이런 서구의 음악에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예술은 당의 선전도구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소련은 노동자를 더 쉽게 선동하기 위해 민중의 삶과 연결되고 혁명 투쟁을 연상할 수 있는 음악을 요구했다. 이는 훗날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발전하는데 쇼스타코비치도 이에 영향을 받았다.

  <교향곡 제1번> 작곡 후 천재 음악가로 주목을 받은 쇼스타코비치는 소련 당국으로부터 혁명 10주년 기념작을 의뢰받았다. 이에 탄생한 볼셰비키의 투쟁을 찬양하는 <교향곡 제2번>은 큰 찬사를 받았다.

  당시 이름을 날리던 쇼스타코비치는 위기를 맞았다. 1934년 그의 작품 중 불륜과 살인을 다룬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은 엄청난 흥행을 거뒀다. 흥행 소식을 들은 스탈린도 직접 관람하러 왔지만 되려 공연장을 박차고 나간 사건이 일어났다. 조은아 교수(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는 이런 스탈린의 행동을 그의 트라우마와 연결지었다. “스탈린은 철권 정치로 많은 사람을 숙청시켰어요. 자신도 언제 암살당할지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혔는데 쇼스타코비치의 공연이 그 부분을 건드렸죠.”

  순수하게 자신의 음악성을 드러내려던 쇼스타코비치는 『프라우다』라는 소련 공산당 기관지의 많은 비판을 받고 숙청당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1937년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기초한 <교향곡 제5번>을 작곡한 후 스탈린 체제의 밝은 미래를 들려줬다는 찬사를 받으며 애국적 영웅의 대접을 받게 됐다.

  9번 교향곡의 저주는 피했습니다만 
  1945년 독소전쟁이 끝난 후 소련 당국의 요구로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제9번>을 발표했다. <교향곡 제9번>을 이야기하면 ‘9번 교향곡의 저주’를 빼놓을 수 없다. 베토벤을 시작으로 슈베르트와 브루크너 등 작곡의 거장들이 9번 교향곡을 끝으로 사망하자, 이후 작곡가들 사이에는 9번 교향곡에 관한 트라우마가 퍼져 있었다. 하지만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제9번>이후에도 총 15개의 교향곡을 남김으로써 ‘9번 교향곡의 저주’를 깨뜨린 작곡가로 거론된다. 그러나 그에게 다른 위협이 찾아왔다.

  당시 소련 예술계는 당의 체제와 노선을 찬양하는 선동적인 작품만 나오는 암흑기였다. 독소전쟁이 끝난 이후 승리한 소련 당국은 쇼스타코비치가 승리를 나타내는 큰 규모의 곡을 쓰길 원했다. 그러나 당국이 원하는 바와 달리 <교향곡 제9번>은 풍자적이고 가벼운 분위기의 곡이었다. 끝내 이 곡은 금지곡으로 지정됐다. 그뿐만 아니라 스탈린주의를 지지하던 즈다노프가 실행한 법령으로 쇼스타코비치와 그 지인들이 모두 반공주의자로 낙인찍혔고 작품활동도 멈춰야 했다.

  진실을 담은 열쇠, D-S-C-H 
  1953년 스탈린 사망 후 문화에 관한 정치 제재가 풀리면서 예술이 활성화되기 시작했고 이때 <교향곡 제10번>이 세상에 나왔다. 유형종 음악칼럼니스트는 <교향곡 제10번>에 관한 객관적인 시각을 제시했다. “전반부는 스탈린에 대한 우울한 그림자, 3악장과 4악장은 ‘새로운 소비에트’를 향한 기대로 보는 것이 객관적인 해석입니다. 새로운 소비에트에는 예술에 관한 규제 완화도 포함돼 있죠.”

  쇼스타코비치는 ‘인간의 감정이나 정열을 그리고 싶었을 뿐이다’라고 이 곡을 설명했다. 여기서 인간이란 쇼스타코비치 자신을 가리키고자 했던 것일까. 조은아 교수는 쇼스타코비치의 혼재된 감정을 들어 설명했다. “그의 인생 내내 자신이 적으로 내몰리게 된다는 불안이 있었을 거예요. 그리고 스탈린의 사망에서 오는 기대감도 있었겠죠.” 유윤종 동아일보 선임기자는 쇼스타코비치가 개인과 시대의 불안 모두를 포용했다고 말했다. “쇼스타코비치의 작품 속에는 야만의 시대에 따른 불안이 있습니다. 그리고 스탈린이 사라졌다고 억압이 바로 해소될 것이라고 믿지 않았죠.”

  바흐를 포함한 당시 작곡가들 사이에는 자신의 이름을 작품 속에 계이름으로 넣는 문화가 퍼져 있었다. 쇼스타코비치도 <교향곡 제10번>에서 D-S-C-H라는 자신의 이름을 동기로 삼아 작곡했는데, 독일식 계이름 D-S-C-H는 계이름 D-Eb-C-B를 뜻한다. 특히 3악장에서 4개의 음계가 노골적으로 많이 등장하며 <바이올린 협주곡 1번>, <현악 4중주 8번>, <첼로 협주곡 1번> 등에도 나타난다.

  유형종 칼럼니스트는 이러한 방식이 그의 진심을 드러낸다고 말했다. “자신의 모습을 담은 곡이라는 고백이자 유머라고 할 수 있죠. 스스로 중요한 곡이라는 표시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유윤종 기자는 예술가의 자의식과 형식주의에 초점을 두고 설명했다. “예술가로서의 깊은 자의식을 표현한 것이죠. 이름을 작품의 음형에 넣는 시도는 민중이 귀로 듣고 바로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일종의 형식주의로 보이기도 합니다. 이런 점이 자의식-반항 의식의 이중결합을 낳는다고도 볼 수 있죠.”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가 자신의 작품속에 녹인 D-S-C-H모티브. '드미트리'의 알파벳 D와 '쇼스타코비치' 독일식 표기의 첫 3개 알파벳인 S, C, H에 해당한다. S는 (es)로 발음되므로 E(미)에서 반음 내린 Eb로 치환됐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가 자신의 작품속에 녹인 D-S-C-H모티브. '드미트리'의 알파벳 D와 '쇼스타코비치' 독일식 표기의 첫 3개 알파벳인 S, C, H에 해당한다. S는 (es)로 발음되므로 E(미)에서 반음 내린 Eb로 치환됐다.

  오선지 위의 소리 없는 아우성 
  쇼스타코비치는 위태로운 줄타기 인생을 살다 생을 마감했다. 후대에 그는 어떻게 비춰지고 있을까. 유윤종 기자는 그의 예술적 삶과 작품을 높이 평가했다. “당국의 속박에 내면적으로 저항하고 아슬아슬하게 자신의 예술세계를 이어간 쇼스타코비치의 삶은 우리에게 감명을 줍니다. 또한 그의 음악은 20세기를 진실하게 형상화할 뿐만 아니라 음향적 측면에서도 매우 완성도가 높은 음악이죠.”

  유형종 칼럼니스트는 쇼스타코비치를 양면적으로 바라봤다. “저는 쇼스타코비치가 ‘20세기의 베토벤’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다고 봅니다. 그의 15개의 교향곡, 2곡의 피아노 협주곡과 바이올린 협주곡, 15개의 현악 4중주곡은 20세기 최고의 고전입니다. 다만 그의 내면에서 드러내지 못한 저항정신을 높이 사고 싶지는 않습니다.” 쇼스타코비치라는 인물이 어떤 사상을 가졌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그의 악보에서 숨 쉬는 ‘D-S-C-H’의 외침은 억압 속에서 쇼스타코비치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발악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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