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 아리랑을 부르는 아버지와 두 남매. 흥겨운 가락 뒤에 왠지 모를 슬픔이 숨겨져 있는 듯하다.
진도 아리랑을 부르는 아버지와 두 남매. 흥겨운 가락 뒤에 왠지 모를 슬픔이 숨겨져 있는 듯하다. 사진출처 다음 영화 서편제

여기, 한 편의 서정시처럼 이야기를 풀어낸 작품이 있다. 작품을 처음 만난 계절은 오래전 여름이었다. 계절과 맞지 않게 그저 시리도록 서러운 이야기라고 간주했던 지난날이 후회될 만큼 이번 가을 다시 꺼내 본 페이지는 마음을 깊이 일렁이게 했다. 애절한 소리 가락에 마음속 한을 풀어낸 작품, 바로 『서편제』(이청준 씀)다. 참으로도 뚜렷한 한이다. 희미한 사랑이다. 

  괴롭도록 애타는 마음의 노래 
  서편제는 나주, 보성, 목포, 화순 등지에서 불린 남도소리로 서민의 애환을 담아낸다. 소설을 기반으로 제작된 영화 <서편제> 속 주인공 송화와 동생 동호는 소리에 대한 남다른 집념을 가진 아버지에게 어릴 적부터 고된 훈련을 받는다. 남매는 훌륭한 소리꾼으로, 뛰어난 고수로 성장해야만 했다. 아버지의 뜻을 헤아릴 수 없었던 동호는 도망갔고, 깊은 슬픔에 파묻힌 듯한 송화의 곱고 애절한 음색은 그토록 서글프게 우리의 마음에 와닿는다. 

  최혜진 교수(목원대 기초교양학부)는 서편제가 판소리의 유파 개념으로 판소리 발달 과정 중 가장 나중에 발달했다고 설명했다. “서편제는 그 소리가 굉장히 구슬프며 끝이 늘어지기 때문에 동편제에 비해 음악이 느리게 진행되는 특징을 지녀요. 소리가 길게 늘어지는 만큼 기교가 들어가야 하니 세련된 기교가 많이 발달했죠.” 소리로써 감정과 느낌을 표현하기 더 좋아지기에 서편제가 특별히 비극적인 정서와 잘 어울린다는 것이다. 

  이명현 교수(국어국문학과)는 애절하고 슬픈 서편제가 호남 지방에서 일반 민중이 부르던 민요를 많이 흡수했다고 이야기했다. “판소리의 구성진 가락이나 애절한 슬픔이 서편제에서 보다 많이 드러나고, 대중적이며 서민적인 요소들이 수용되기도 했어요. 이청준 작가가 서편제라고 제목을 지은 이유도 이와 연결된다고 볼 수 있겠죠.” 

  가슴 속 파묻은 한의 응어리 
  ‘서편 소리는 사람의 가슴을 칼로 저미는 것처럼 한이 사무쳐야 하는데 네 소리는 예쁘기만 하지 한이 없어. 사람의 한이라는 것은 한평생 살아가면서 가슴 속에 첩첩이 쌓여 응어리지는 게다. 살아가는 일이 한을 쌓는 일이고, 한을 쌓는 일이 살아가는 일이 된단 말이여.’ <서편제> 속 아버지 유봉의 대사이다. 딸 송화를 훌륭한 소리꾼으로 키우기 위해 아버지로서 할 수 있었던 일은 역설적이게도 송화의 눈을 멀게 하는 일이었다. 

  이명현 교수는 한이란 마음에 맺히는 거라며 원한과 한의 차이를 논했다. “한은 원한을 비롯해 어떠한 게 맺힌 후 풀리고 승화돼야 해요. 맺힌 것으로 멈춰있거나 끝나면 원한에 불과하겠죠. 맺힌 슬픔을 예술적 경지를 추구하는 긍정적 방향으로 전환하고자 하는 에너지. 저는 그 의지가 한이라고 생각해요.” 가슴 속 깊은 곳에 한을 맺히게 하기 위해 딸에게 상처를 준 아버지. 꺼내려 해도 좀처럼 꺼내지지 않는 마음 한구석에 묻어둔 슬픔은 한 서린 음악을 만나 승화되고, 그 자리에서 덤덤하게 삶을 살아나갈 수 있게 하는 우뚝한 지지대를 만들 것이다. 

  <서편제>에서는 유독 길거리를 떠도는 송화와 유봉의 모습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김홍준 명예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 영화과)는 영화 <서편제>가 길 위에서 사건이 이뤄져 등장인물의 여정을 따라가며 이야기가 전개되는 로드 무비의 형식을 띤다고 설명했다. “원작 소설 자체가 꼭 어떠한 인과관계나 기승전결을 따라가지 않더라도 사람들의 발걸음을 쫓으며 사건을 다룰 수 있는 요소를 갖고 있어요. 또 판소리가 힘을 잃어가는 세상에서 떠돌이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인물들의 현실적인 인과관계가 영화 속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죠.” 

  이명현 교수는 작품의 여로형 구조가 판소리 공연 예술의 일반적인 공연 방식을 보여준다며, 떠돈다는 의미에 주목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돌아다닌다는 것은 어딘가에 정주하지 못한다는 거죠. 정주가 안정을 상징하는 반면 유랑은 불안정을 상징해요. 때론 어딘가로 떠나 끊임없이 새로운 요소를 추구하거나, 안정과 불안정 사이의 불균형에서 예술만의 독창성을 발견하고 자신을 변화시키거나 위안할 수 있겠죠.” 

  앞이 보이지 않아 아버지가 이끄는 줄을 붙잡고 지팡이에 의지한 채 이곳저곳을 유랑할 수밖에 없었던 송화. 그가 내딛은 모든 걸음은 한에 묻히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는 소리를 찾기 위한 여정이었을 것이다. 영화 후반부에서 정처 없이 떠돌던 남매는 마침내 마주한다. 한에 사무친 송화의 소리와 온 힘을 다해 치는 동호의 북소리가 어우러지는 장면에 우리의 감정이 한없이 동요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마음을 읽어 마음을 잇다 
  <서편제> 속 송화에게 소리란 무엇이었을까. 인생의 깊은 한을 때로는 해학으로, 때로는 눈물로 승화시키고 품어온, 그렇게 목 놓아 부름으로써 자신의 삶을 깊고 넓게 열어주는 가장 소중한 존재였으리라 추측해본다. 

  송화의 소리를 비롯해 우리 판소리를 더욱 생생하게 감상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최혜진 교수는 판소리를 감상할 때 우리가 지녀야 할 바람직한 자세에 관해 언급했다. “판소리는 이야기 놀이기 때문에 그 내용이 무엇인지 귀 기울여 들어보고 이해하고자 하는 태도가 필요해요. 현장성과 즉흥성, 유동성이 특징이기에 청중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하고 추임새를 넣거나 소통하며 실감 나게 판소리를 감상했으면 좋겠어요.” 교감이 중요한 음악 예술 양식인 판소리는 판을 만드는 소리꾼과 고수, 청중 이 3가지 박자가 잘 맞아떨어져야 의미 있게 향유할 수 있다. 

  김홍준 명예교수는 판소리 원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국악을 바탕으로 해 판소리를 대중적으로 쉽고 재밌게 혹은 신기하게 접근할 수 있는 다양한 시도들이 이뤄지고 있는데요. 저는 원형 그대로의 판소리를 감상하는 데 도전해보라고 얘기하고 싶어요. 의외로 새로운 것을 찾거나 결코 낡고 따분하고 지루한 것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거든요.”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내려오며 진도아리랑을 흥얼거리던 두 남매와 아버지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계절이 지나 그 길엔 비가 내리고, 낙엽이 발에 밟히기도 하고 어느새 하얀 눈이 쌓였을 것이다. 비가 흐르고 눈이 녹으며 수많은 발자국이 지워졌겠지만 그 길목 한 켠에 자리한 그들의 소리는 여전히 선명하다. 

  가장 순수했고 자주 뜨거웠으며 때론 무너졌던 송화의 소리. 마음을 자박자박 끓게 하는 짙은 여운을 남기는 소리. 한평생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 되고 양식이 되는 소리. 한이란 이 모든 것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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