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서 ㈜일흥실업 대표이사/재단법인 연재장학재단 이사장(건축미술학과 73학번)은 뜨거운 모교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그는 중앙대 총동문회장, 중앙대 ROTC 총동문회장 등을 역임하며 동문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일에 솔선수범 앞장서 왔다. 사회적 역할을 맡는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말한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잖아요." 우리 사회를 위해 필요한 일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맡은 바 임무를 완수해내는 것. 도움이 필요한 곳에 자신이 가진 역량을 나누는 것. 나눔과 배려는 박진서 대표이사가 지닌 삶의 철학이다.

사진 김수현 기자

모두를 위해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
내어주는 너른 품

“우리가 중앙대를 나왔다는 사실은 절대 변하지 않아요. 요새는 법원에 가서 개명 신청하면 이름도 바꿀 수 있어요. 그렇지만 중앙대 출신이라는 건 불변의 법칙으로 우리 인생에 남게 되죠. 중앙대를 자랑으로 생각하려면 학교를 위해 무엇이라도 하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그렇게 말하려면 저부터 솔선수범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여러 일에 앞장서고 있는 거예요.”

운명적 만남이었다. 중앙대와 박진서 ㈜일흥실업 대표이사/재단법인 연재장학재단 이사장(건축미술학과 73학번)의 만남은 우연인 듯 필연에 가까웠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 우연히 안착한 중앙대에서 그는 필연과도 같은 ROTC(학생군사교육단)를 접한다. 마치 온실 속 화초 같았다는 그의 삶은 ROTC에 입단하며 강인한 뿌리를 내렸고 역경을 지탱해줄 힘을 키웠다. 세월 풍파를 지나오며 어느덧 커다란 나무가 된 박진서 대표이사는 중앙대와 ROTC 동문 사회에 헌신하는 역할을 묵묵히 소화하고 있다. “고마움을 잊지 않고 갚는다는 게 제 삶의 철칙이에요.” 청년 시절 자신을 키워준 모교와 ROTC를 위해 그는 오늘도 달린다. 

 -대학을 가지 않으려 했다고.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부모님의 귀여움을 많이 받고 자랐어요. 그러다가 고등학교 2학년 무렵에 아버지가 병환으로 돌아가셨죠. 돌아가시기 전 제가 약 1년 넘게 아버지 병간호를 해드렸어요. 형과 누나들은 다들 나가서 생활하고 어머니는 일하러 나가시니까 집에 있던 제가 아버지 병간호를 해드렸던 거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어머니께 반항심이 들었어요. 어머니가 아버지를 살려놓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셨거든요.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던 제게 아버지의 죽음은 너무 큰 충격이었답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힘들게 하려고 대학을 안 가겠다 반항했어요. 대학입학 예비고사 날 충청북도 제천시에 있는 친구 집으로 놀러 가버렸죠.”

  -어떻게 중앙대와 인연이 닿았나. 

  “집에 돌아와서 ‘대학은 가야 하지 않겠니’ 하시는 어머니의 설득을 듣다 보니까 마음을 고쳐먹게 되더라고요. 그렇게 대학을 어디로 진학해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아버지 생각이 났습니다. 아버지가 건축에 관심이 많으셨어요. 모눈종이에 설계도면 그리는 게 취미이실 정도로요.

  자식 중 누군가는 건축을 전공했으면 하셨죠. 형과 누나들은 건축과 무관한 전공을 택했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저에게 대학 가서 건축을 공부하라고 말씀하셨죠. 당신이 못 이룬 꿈을 자식에게 기대하는 마음이 있잖아요. 아버지의 그 말씀이 기억나서 건축 계통으로 진학하려고 찾아보다가 중앙대에 건축미술학과가 처음 생겼다는 소식을 접했어요. 게다가 대학입학 예비고사를 보지 않아도 됐죠. 행운이었어요. 운 좋게 합격해서 중앙대 건축미술학과 제1회로 입학했답니다.” 

  -건축미술학과와 건축공학과는 무엇이 달랐는지. 

  “학과목은 똑같았어요. 다만 예술대 건축미술학과 친구들은 미적 감각이 상당히 좋았던 것 같아요. 예를 들어 건축 전시회를 하면 공대 건축공학과 작품은 굉장히 고딕적이고 딱딱한 분위기가 있었는데, 건축미술학과 작품은 원형 형태도 많고 신선했죠. 배우는 내용이 비슷하다 보니 몇 년 후에는 두 학과가 통합됐어요.” 

  -기억에 남는 대학 시절 추억이 있다면. 

  “당시에는 학교 근처에 당구장이 엄청 많아서 당구도 자주 쳤어요. 당구장이 워낙 학교 앞에 많아서 300점은 쳐야 졸업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죠. 그런데 아무래도 대학 시절 추억이라고 한다면 ROTC 생활이 기억에 많이 남아요.” 

  -어떻게 ROTC에 입단하게 된 건가. 

  “처음에는 할 생각이 없었어요. 학과 동기 친구 3명이 ROTC에 입단했는데 ‘바보티씨’라고 불렀어요. 선배들한테 매일 바보같이 맞고 돌아다닌다고 놀리기 바빴죠. 과거 군대에는 구타 문화가 존재했거든요. 약 2개월 후에 ROTC 추가 입단 모집을 했어요. 월남전으로 인해 장교가 부족한 상황이라 추가 모집을 한 거죠. 그런데 같이 ROTC를 다니자는 뜻으로 제 친구가 저도 모르게 추가 입단 지원서를 신청해버린 거예요.(웃음) ROTC 시험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고 뒤늦게 상황을 파악했어요. 

  또 어머니가 저에게 해주셨던 말씀이 떠올랐어요. ‘너는 일반 병사로 군대 가면 탈영 할 거야.’ 막내라 여리게 자랐다는 점을 걱정하신 거죠. 장교로 군 복무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런 계기들로 ROTC에 입단하기로 결심했답니다.” 

  -입단 과정에서 우여곡절을 겪었다고 들었다. 

  “당시 C학점 이하 과목이 있으면 ROTC 입단이 불가능했어요. 그런데 불어와 체육 과목이 C학점 이하여서 큰 문제였죠. 교수님들을 찾아뵙고 간곡히 부탁드렸어요. ‘저 꼭 ROTC 가고 싶습니다.’ 무릎 꿇고 빌었죠. 보충 수업을 듣는 조건으로 다행히 학점을 조정해주셨어요.

  인생의 방향이 바뀌려 하면 길이 열리듯이, 내 길이 이 길이었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 대한민국 ROTC 중앙회장을 맡고 있는데, ROTC에 입단하지 않았다면 제 인생이 지금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르겠네요. 참 운명적이란 생각이 들어요.” 

  -훈련이 힘들었을 것 같다. 

  “ROTC 후보생은 약 1달 동안 군부대에 입소해서 여름 병영 훈련을 했었는데 보통 대학생이 할 수 없는 특별한 경험이었죠. 제가 놀기 좋아하는 사람이라.(웃음) 친구들이 해수욕장 놀러 갈 때 같이 못 놀고 훈련받는 상황이 좀 힘들었어요.” 

  -옛날에는 군부대 시설이 열악했다고 하던데. 

  “여름 병영 훈련 때 우리 동기들은 현역 부대로 입소해서 약 20명씩 한 내무반 마룻바닥에서 잤어요. 최근 후보생들은 한 내무반에 6명 정도 배정받아 침대에서 잔다고 합니다. 또한 충청북도 괴산군에 육군학생군사학교(학군교)에서 훈련을 받는데 시설이 쾌적하죠. 제가 현재 학군교 발전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기도 해요. 후배들이 우리보다 좋은 환경에서 훈련받는다고 ‘그게 고생이냐, 우리 때는···’이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아요. 주어진 환경에서 각자 최선을 다하는 거니까요.  

  아무래도 ROTC 중앙회장을 맡고 있다 보니까 세대별로 눈높이에 맞춰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1기부터 59기까지 동문을 다 아우르려면 기수별 입장에 초점을 맞춰서 이해하고 소통해야 하죠. 특정 입장에 치우쳐서 맞고 틀림을 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박진서 대표이사는 따뜻한 미소와 친근한 인사말로 기자들을 맞이했다. 대학 시절 추억을 떠올리며 질문에 답하고 있는 박진서 대표이사의 모습이다. 사진 김수현 기자

  -ROTC에서의 경험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제가 막내로 자라서 성격이 굉장히 여렸어요. 집안이 부유한 편이라 고생도 많이 해보지 않았죠. ROTC 후보생이 되면서 온실 속 화초 같던 제 삶이 정말 많이 바뀌었어요. 만약 제가 장교가 아닌 일반 병사로 입대했으면 부하 병사의 고충을 들으며 소통하고 지휘, 통솔하는 경험을 못 했을 겁니다. ROTC에 입단하길 참 잘했다고 생각해요. 소대장으로 임관해서 가면 약 40명의 부대원들을 제가 통솔해야 하잖아요. 그 과정에서 지휘 능력도 인성도 많이 성장했죠.” 

  -어린 시절에 여린 구석이 많았나. 

  “친구들과 잘 노는 장난꾸러기였어요. 그런데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측면도 있었죠. 많은 사람 앞에서 발표하라고 하면 다리가 후들거리고 머리가 하얘지더라고요. 초등학교 4학년 때였는데, 둘째 누나가 ‘너 그러면 큰 사람 못돼’라고 충고해줬어요. 그 말이 뇌리에 꽂혔죠.

  이후에 성격을 바꿔보려고 많이 노력했어요. 발표도 나서서 하고, 친구들 앞에서 노래도 부르고. 초등학교 때 전교 부회장도 했네요.(웃음) 이렇게 차츰 성격이 변한 덕에 총동문회장 같은 역할도 맡고, 나서서 사회에 기부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뿌듯합니다.” 

  -중앙대 총동문회장을 역임했다.  

  “우연한 기회로 하게 됐죠. 유용태 제12대 중앙대 총동문회장님과 친분이 있었어요. 당시 저는 ROTC 총동문회장을 하고 있었는데 유용태 회장님께서 ROTC 동문회에 관심을 많이 가져주셨죠. 그런데 어느 날 저에게 총동문회장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셨어요. 저는 제게 무언가를 베풀어준 사람에겐 꼭 갚으려고 합니다. 고마움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죠. 그렇게 제안을 받아들였고 4년 동안 총동문회장을 맡았네요.” 

  -중앙대 입학부터 ROTC와 총동문회장까지. 우연을 기회로 만들었다.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무언가를 억지로 하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누군가는 ‘안일한 삶이다’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굴러가는 대로 사는 게 평범한 생활이고 성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한답니다. 그래도 저한테 주어진 일을 마다하지는 않았어요.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잖아요? 주어진 일에는 ‘이게 내 운명이다’, ‘이게 내 갈 길이구나’라고 생각하면서 받아들였죠. 제시된 길이 나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따라갈 뿐이지 그 길을 굳이 짧게 가려고 하거나 가로질러 가지는 않는 거예요. 

  욕심을 내지 않고 살아왔는데 큰 무리 없이 지내온 걸 보면 이 방식이 나에게 맞는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잘나서 그런 역할을 맡는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또 저에게 주어지는 일이 있다면 기꺼이 잘해나갈 거예요.” 

  -중앙대에 고마운 점이 있다면. 

  “중앙대에 고마운 점이 너무 많아요. 대학도 안 가려고 했던 저를 받아줬고 중앙대에 안 왔다면 ROTC도 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대학에 처음 입학했을 때 신입생을 모아놓고 임영신 박사가 연설대에서 하신 첫 말씀도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있어요. ‘사랑하는 내 아들, 딸들아.’ 우리를 학생이 아닌 자식으로 생각하신 거죠. 저는 그 말이 지금도 가슴에 와 닿아요.  

  그리고 ‘의에 죽고 참에 살자’의 정신이 제 안에 많이 심겨 있다고 생각해요. 중앙대 동문들 사이에서 보면 의리와 신의가 굉장히 끈끈해요. 이러한 중앙대 특색에 자부심을 많이 느낀답니다.” 

  -중앙대병원과 특별한 인연이 있다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몇 년 전에 갑자기 응급상황이 생겼어요. 당시 어머니께서 ‘삼성의료원’에 다니시는 중이셨어요. 구급대원이 삼성의료원으로 연락하자 병원에선 지금 응급실 상황이 좋지 않아서 환자를 못 받는다고 했어요.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도 어려운 상황이었죠. 마지막으로 전화한 곳이 중앙대병원 응급실이었는데, 병원으로 오라고 하더라고요. 나이 많은 환자는 상대적으로 잘못될 가능성이 커 병원에서 꺼리는 것 같아요. 그런데도 흔쾌히 받아준 중앙대병원이 무척 고마웠어요.  

  병원에 갔을 때 어머니의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어요. 의사 선생님이 짧으면 3일, 길면 5일 정도 생각하라고 하셨죠. 하지만 중앙대병원에서 치료를 받으시며 5년을 더 사셨답니다. 그래서 중앙대병원에 고마움을 표시해야겠다는 마음을 항상 갖고 있었는데 마침 좋은 기회가 생겨 중앙대병원과 의대에 발전기금을 전달하기로 했어요.”

김창수 전 총장이 박진서 대표이사에게 수여한 감사장이다. 꾸준히 중앙대에 발전기금을 기부하고 있는 박진서 대표이사는 중앙대병원과 의대에 발전기금을 전달할 예정이다. 사진 김수현 기자

  -여러 활동 중 가장 뜻깊었던 일은 무엇인지. 

  “저희 어머니의 호(號)가 ‘연재’인데 어머니의 호를 따서 만든 연재장학재단을 운영하고 있어요. 어머니가 사업을 통해 모으신 돈으로 장학재단을 설립하셨죠. 2010년에 재단을 만들고 약 12년간 활동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어요. 어머니가 졸업하신 경기여고와 제가 졸업한 용산고, 모든 대학교로부터 학생을 추천받고 심사를 한 뒤 장학금을 주는 거예요. 후배들을 위해서 이런 사업을 하는 게 저한테는 의미가 커요. 후배를 도울 수 있어서 너무나 뜻깊죠.” 

  -사회 기부에 관한 철학이나 신념은. 

  “기부 사업을 하셨던 어머니의 정신을 계승 받았다고 할까요. 어머니는 안 먹고, 안 쓰고, 안 입으면서 돈을 모으셨죠. 저도 어머니의 자식이라 돈을 허투루 쓰지 않는 습관이 있고요. 또 제가 해외가 아닌 이 나라, 이 땅에서 돈을 벌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살아가는 동안 도움을 줄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풍토가 있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도 느끼고요. 어머니께서 일궈 놓으신 걸 지켜나가고 유지해야죠.” 

  -동문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현재 중앙대 동문을 약 30만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어요. 그런데 30만 규모에 비해서 학교에 애교심이 있거나 총동문회를 위해 무언가 기여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이 좀 아쉽죠. 동문들이 조금만 도움을 주면 총동문회는 물론이고 중앙대가 더 발전해 나갈 수 있거든요. 우리를 배출해 준 학교니까, 중앙대와 총동문회를 좀 사랑해주고 많은 관심과 따뜻한 손길을 보내줬으면 합니다.” 

  -중앙대 학생들에게도 한 마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대학교 4년의 세월은 굉장히 중요한 시간이에요. 그래서 이 4년을 후회 없이 보냈으면 해요. 후회 없이 시간을 보낸다는 게 참 어려운 일이지만 하고 싶은 건 모두 했으면 좋겠습니다. 놀고 싶으면 신나게 노세요. 공부하고 싶을 때는 열심히 공부하시고요. 효도도 정성껏 온 마음을 다하세요. 고등학교까지는 제약된 생활을 하지만 대학교에 들어오면 성인이 되고 자유로워지잖아요. 사실 대학 시절을 떠올리면 누구나 후회가 남겠지만 그래도 후회 없는 대학 생활을 했으면 좋겠어요.”

  -당신에게 중앙대란?

  “중앙대는 저를 만들어 준 고향 같은 곳이에요. 중앙대가 저를 키워줬죠. 중앙대에 입학했기 때문에 파생적으로 ROTC를 접할 수 있었고, 지금 또 이렇게 ROTC 중앙회에서 큰 소임과 직책을 맡을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저에게 중앙대는 정말 소중한 의미예요. 앞으로도 중앙대의 발전을 위해 관심과 애정을 갖고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도움을 주고 싶어요.”

주요 약력

-1973. 3~1977. 2 중앙대 건축미술학과

-1977.~1979. ROTC 15기 임관, 육군 중위 전역

-2010.~2011. 제11대 중앙대 ROTC 총동문회장

-2011.~2015. 제13대 중앙대 총동문회장

-현 학교법인 중앙대학교 이사회 이사

-현 대한민국 ROTC 중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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