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의 ‘아리’는 ‘아리아’를 뜻한다. 이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가장 먼저 드는가? 어떤 의미로 들리는가? ‘아리아’는 인공지능(AI) 스피커를 부르는 이름인데, 그 이름을 불러 놓고 ‘착하다’는 느낌을 덧붙이다니, 이게 무슨 말이던가! 

  국어학 전공자로서 직업병(?)이 있는지라 주변 사람들의 언어생활에 관심이 많다. 위 문장은 올해 초, 제법 사람들이 다니는 길에 부모와 함께 가던 아이가 한 외침이다. 아이는 이제 막 말을 잘하기 시작한 듯했다. 지나가면서 들은 짧은 대화로 유추해보면 집에서 ‘아리아 오늘 날씨 어때?’, ‘아리아 노래 틀어줘.’ 등의 말을 부모님께 들어 ‘아리아(아리)’를 알았을 듯싶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고마운 친구라는 생각에 인공지능 스피커를 ‘착하다’고 표현하다니! 그 순간 나의 모든 사고가 멈추었다. ‘착하다’의 주어가 ‘사람’이 아닌 인공지능 스피커가 될 수 있다고는 한 번도 상상한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이 표현엔 ‘아리’가 마치 사람의 이름처럼 주어로 등장한다. 친구를 ‘OO야(아)’로 부르는 것에서 착안하여 ‘아리아’의 ‘아리’를 이름으로 생각한 듯하다. 다시 생각해도 그 작은 아이의 기발한 언어 표현에 놀라울 따름이다. 

  ‘착하다’는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로 정의한다. 포르지히(1934)는 의미장을 연어와 포용의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예를 들어 ‘발로 차다’에서 ‘발로’와 ‘차다’의 본질적 의미관계는 연어적이며, ‘차다’에는 ‘발로’라는 의미가 포용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때 ‘차다’와 ‘발(로)’는 의미장으로 묶인다. ‘착하다’의 의미인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에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포용되어 있다. 또한 ‘사람이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를 연어적 성격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제목은 ‘착하다’가 사람이 아닌 ‘아리아’와 공기(共起)하여 쓰이니 어색하고도 놀라운 표현이 된 것이다. 

  여러분과 여러분보다 어린 세대는 많은 시간을 인공지능(AI)과 함께 살아가게 될 것이다. 앞서 언급한 아이는 거의 태어나면서부터 ‘아리아’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 따라서 그 아이에겐 ‘아리는 착해요’가 ‘내 친구 수현이는 착해요’처럼 특별하지 않은 표현일 수도 있다. 

  우리는 고민해 보아야 한다. 앞으로 품성이나 성질을 나타내는 ‘친절하다’, ‘온화하다’, ‘무뚝뚝하다’ 등에도 인공지능을 주어로 놓고 자연스럽게 표현할 것인가. 인공지능에게 ‘사람이’가 연어적으로 쓰이는 의미장의 단어를 적용시켜 말할 것인가. 인공지능에게 어느 정도의 품성이나 성질을 부여할 것인가. 모두가 알다시피 우리는 코로나19로 인해 온라인 교육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시기이기에 더욱 우리와 밀접한 삶 속으로 그들(?)이 다가오고 있다. 우리의 언어생활에 대해 고민해야 보아야 할 시점인 것이다. 여러분은 어떠한 결론을 내릴 것인가. 

황희선 교수
다빈치교양대학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