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비평 부문 가작: 이예규 학생(간호학과 3) 「마치 오늘이 항상 새로운 날인 것처럼」

 

 

마치 오늘이 항상 새로운 날인 것처럼

삶의 권태기

연애를 하다 보면 찾아오는 시기가 있다. 서로가 너무 익숙해져 타오르지 않는 시기, 바로 권태기다. 하지만 과연 연애에만 권태기가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삶에도 권태기는 찾아온다. 반복되는 일상이 단조롭고 특별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뭔가 크게 변화시키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을 때. 내가 지금 살아가는 것인지, 살아내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것에 대해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을 때와 같은 고민들이 그것이다. 그 기간에는 길고 짧음의 차이가 있겠지만, 누구나 이런 권태의 찰나를 겪는다고 생각한다. 학업에 지친 학생, 똑같은 출퇴근에 지친 직장인, 은퇴 후 많은 여유시간을 갖는 노년기 등 나이에 국한되지 않는다. 활활 타오르던 열정의 시기를 지나 익숙함에 젖어들 때의 공허함을 느껴본 적이 있다면, 혹은 반복되는 일상에 지치는 날이 온다면 이 글을 가볍게 읽어보기를 권한다.

  이 글에서 다룰 영화는 2016년에 개봉한 영화 <패터슨>으로, 미국의 영화감독 짐 자무쉬의 작품이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천국보다 낯선(1984)>, <커피와 담배(2003)>, <브로큰 플라워(2005)>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2013)> 등으로 알려져 있다. 짐 자무쉬 감독의 작품들은 덧없음, 무료함의 감정이나 사색, 일상, 그리고 예술과 관련된 고찰을 담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때로는 소재가 거창하더라도 그것을 풀어나가는 방식과 메시지는 대부분 일상과 맞닿아 있다. 세게 표현하자면 인기가 많은 스타일은 아니고 느린 호흡과 철학적인 시각이 마니아층을 형성할 만하다. 그의 특유의 스타일은 <패터슨>에서도 여전하지만 거창하지 않고 담백하게 일상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방법을 담아냈다는 긍정적인 평을 받았다. 그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많은 관객 수를 달성하기도 했고 나이층에 크게 상관없이 마음에 진득하게 와닿을 수 있는 영화임에 틀림이 없기에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다.

  사실 <패터슨>은 언뜻 보면 너무나 평범해 무심코 지나치기 쉽다. 이런 조용하고 평범한 영화보다는 시끌벅적하고 신나는 영화로 기분 전환을 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패터슨>의 평범한 일상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을 유려하게 담아내는 솜씨는 특별하다. 이는 마음속에 한 방울 파문을 일으키고, 결국 한 번쯤은 돌아보게 만드는 매력을 가졌다. 잔잔해 보이는 일상에서 특별함을 찾는 방법에 대해 알고 싶다면, 지금부터 천천히 함께 영화를 맛보도록 하자.

 

  패터슨 시에 사는 패터슨 씨의 일상

  영화는 버스 기사이자 시인인 패터슨의 일주일을 보여준다. 그는 매일 알람도 없이 6시 10-30분경에 일어나 아직 잠들어있는 아내에게 뽀뽀를 하고 아침으로 간단히 시리얼을 먹는다. 그리고는 철제 도시락 가방을 들고 시상을 떠올리며 회사로 출근한다. 버스 운전석에 앉아 떠올렸던 시상을 종이에 적어 내려가면, 일상의 걱정거리를 속속들이 말해주는 회사 동료를 만나고 버스를 운행한다. 근무 중에는 매일 달라지는 승객들의 대화를 들으며 은근슬쩍 미소를 짓고, 점심시간에는 뉴저지 패터슨의 명소 파세익(Passaic) 폭포 앞에서 로라가 싸준 점심을 먹으며 시를 쓴다. 퇴근 후에는 매번 기울어진 우편함을 고쳐 세우고 들어가 저녁을 먹고, 마빈과 함께 산책 겸 나가 단골 바에 들려 에일 한 잔을 마시면 그의 하루가 끝난다. 특별한 사건이랄 것도 없는 내용을 뭐 이렇게 구구절절 말하나 싶겠지만, 이게 거의 영화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관객도 감상에 부담이 없다. 단순하지만 지루하지 않고, 지나치게 무엇인가 전하려고 하거나 계몽시키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냥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시적인 영화, <패터슨>

  <패터슨>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굉장히 시적인 영화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여러 가지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는데, 먼저 시가 등장한다는 표면적인 의미에서 그러하다. 주인공 패터슨은 시를 쓰는 취미가 있기 때문에 영화에는 자연스레 많은 시가 등장하게 된다. 많은 분들이 알다시피 실제로는 짐 자무쉬 감독의 대학 동기이자 시인인 론 페제트(Ron Padgett), 영화의 모티브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William Carlos Williams)의 시를 인용했고 일부는 영화를 위해 만들어졌다. 또한 영화에서 거론되는 프랭크 오하라나 에밀리 디킨슨 같은 작가들은 모두 뉴욕 시파의 문인으로, 시작(詩作)을 함에 있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특징들이 영화의 가치관과 매우 잘 어울린다. 그들은 현학적인 언어보다는 일상적인 언어를 주로 사용하고 구체적인 누군가에게 말하듯 시를 쓰며 날카로운 섬세함을 겸비했다는 특징이 있다.

  한편 영화에 시가 등장하는 것보다 더욱 영화를 시적으로 만드는 포인트는 영화 자체도 마치 하나의 시와 같은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이다. 패터슨의 일주일은 마치 7연의 형식을 가진 서사시를 연상케 한다. 이에 더하여 영화에서 겹쳐지는 중의적인 언어들과 작은 사건들은 시 속의 운율을 떠올리도록 한다. 가령 ‘패터슨’은 영화 속 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하고 주인공이 사는 미국 뉴저지의 도시를 가리키는 지명이기도 하다. 또한 패터슨이 좋아하는 시인은 「패터슨」이라는 제목의 시집을 쓴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이다. 언어유희라도 하는 것처럼 주인공이 좋아하는 시인의 이름조차 반복의 형식을 띠고 있다. 또한 패터슨의 아내인 로라(콜쉬프테 파라하니)는 항상 똑같은 도트 무늬로 컵케이크나 인테리어를 장식하지만 매번 다른 꿈을 꾼다. 그 꿈은 컵케이크로 대박이 난다거나 컨트리 가수가 되는 꿈을 말하기도 하지만 잠들면 꾸는 꿈을 의미하기도 한다. 로라가 쌍둥이 자녀를 낳는 꿈을 꾸었다고 말하자 쌍둥이들은 패터슨의 시야를 빌려 다양한 시점에 여러 번 등장하게 된다.

  이렇듯 패터슨의 일주일은 겉으로는 똑같아 보이는 하루의 연속이지만 사실 각기 다른 7일이 펼쳐진다. 아침마다 알람이 없이 일어나는 시간은 5-10분의 차이가 있고, 아침마다 일어나는 포즈도 다르고, 버스에 타는 승객들과 그들의 대화 내용도 날마다 다르고, 로라가 늘 새롭게 꾸미는 집도 매일 달라진다. 또한 오래된 버스가 고장이 나기도 하고 단골 바에서 커플의 싸움과 실연당한 남자의 자살 소동과 같은 사건도 벌어진다. 짐 자무쉬 감독은 단순한 플롯 속에서 펼쳐지는 소소한 일들을 통해 동일해 보이는 일상 속에서 차이를 만드는 원천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는 다시 반복으로 이어진다. 영화 전반에 녹아든 짐 자무쉬의 예술관은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의 한 이론을 떠올리게 한다.

  <차이와 반복>, 그리고 일상 속 예술의 발견

  우리는 흔히 동일한 것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이 반복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질 들뢰즈의 논리에 의하면 동일한 것은 반복될 수 없다. 오직 차이 나는 것만이 반복되어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아주 미세한 다름이 동일하다는 차이를 인식하게 하고 반복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를 일상에 접목시킬 때 가장 쉬운 예시는 ‘하루’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루하루는 의미 없이 반복되는 것 같지만 날마다 벌어지는 일종의 사건들은 각기 고유한 강도를 가지며 구별된다. 그 강도는 개념적으로 구별할 수 없어 개인에 따라 다른 밀도로 느끼게 된다.

  실제로 짐 자무쉬 감독은 영화 인터뷰에서 바흐의 음악을 좋아한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바흐의 음악은 크게 봤을 때 같은 선율의 연주를 반복하지만 변주라는 차이를 부여해 강도를 달리하는 매력이 있다. 즉 질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바흐의 음악적 특성, 패터슨이라는 영화의 특징은 결국 하나로 연결된다. 우리가 사는 하루하루는 그 전날의 변주인 것이고, 반복되는 일상 한가운데의 미세한 변화가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질 들뢰즈가 주장한 노마디즘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같은 자리에 머무르더라도 끊임없이 새로운 가치를 찾아내는 태도로 정의된다.

  그렇다면 이젠 예술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해보지 않을 수 없다. 흔히 예술을 생각하면 일상 너머 어딘가 특별한 지점에서 형성되는 무언가로 여겨지곤 한다. 하지만 패터슨의 시작(詩作)이 그의 일상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점은 이러한 고정관념과 대비된다. 이는 시를 쓴다는 행위, 즉 예술을 하는 행위 자체가 특별한 자격이 필요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시인이나 예술가라는 직업이 실제로 존재하지만 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마추어’에 조금 더 가깝다. 또한 아마추어가 프로와 반대되는 개념만은 아니다. 전통적 예술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미래주의나 다다이즘을 연상한다면 아마추어란 오히려 예술가의 또 다른 태도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패터슨>은 이러한 아마추어 같은 예술적 태도를 영화 속 거의 모든 인물에게 그려내고 있다. 먼저 패터슨은 행간에 거리를 둔다거나, 낱말에 배치에 대해 큰 고민을 하지 않고 마치 일기처럼 시를 쓰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10살짜리 소녀 시인과 만났을 때 소녀에게 운율을 맞추지 않은 시가 더 좋다고 말하기도 한다. 로라는 자신만의 세계가 뚜렷하고 자유로우며 예술적인 분위기를 풍기지만 출중한 실력이 있다기보다는 표현하는 자체를 즐기는 인물이다. 바의 주인인 닥은 패터슨의 유명인들을 전시하는 명예의 벽을 통해 일종의 예술을 즐기고, 에버렛은 그의 감정과 표현에 매우 충실한 사람이지만 애인이 보기엔 모든 것을 드라마틱하게 몰고 가는 성향이 있다. 플라스틱 총으로 자살 소동까지 벌이는 에버렛의 직업은 극 중에서 가장 예술과 가까운 직업이라고 칭할 만한 배우라는 점도 흥미롭다. 이러한 캐릭터들의 특징을 통해 감독의 예술관에 대해 짐작할 수 있다. 그동안 진지하고 심오한 영역에 있던 예술을 일상으로 끌어와 본질을 되새기게 하는 차원에서 영화의 메시지와도 조응하고 있다. 의미는 내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부여하는 것이니만큼, 일상의 특별함은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에게 달렸다며 토닥여주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패터슨>, 짐 자무쉬의 연출과 아담 드라이버의 연기

  따라서 패터슨이 시를 쓰는 순간들은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임에 부족함이 없는데, 이러한 장면들은 특정한 연출기법과도 관련이 깊다. 영화의 모티브이자 주인공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집, 「패터슨」의 서문에는 ‘a man in himself is a city.’라는 문장이 있다. 이는 ‘한 사람은 그 자체로 하나의 도시이다.’ 정도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영화 <패터슨>은 이러한 사조를 그대로 따르는 듯 사람과 장소를 연결하는 장면들을 영화 전반에 걸쳐 보여준다.

  첫 번째는 주인공 패터슨과 파세익 폭포다. 패터슨이 시를 쓸 때면 투박한 느낌의 필기체와 패터슨의 노트, 그리고 파세익 폭포가 한 장면에서 차례로 디졸브 되면서 한 장면에 놓이는 연출이 등장한다. 시를 쓰는 사람과 시가 쓰이는 노트, 시의 소재, 흐르는 물결이 한 장면에 모이면서 그 구별이 사라지는 모습을 표현한 장면이다. 이는 일상에서 떠오르는 시상이 이미지화되면서 시가 되는 과정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부분이다. 또한 표정의 많은 변화가 없는 주인공이 시를 쓸 때에는 격렬하게 타오르는 듯한 문체를 보여주곤 한다. 이는 폭포의 물들이 위에서 아래로 세차게 떨어지는 모습과도 닮아있다.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문장을 고려했을 때 도시 이름과 주인공의 이름이 같다는 단순한 메타포에서 출발해, 시를 쓰는 과정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성격도 폭포를 통해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함축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연출이라고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세탁실에서 랩을 하는 한 남자를 보여주며 예술을 펼치는 장소에 대한 고찰을 드러내고 있다. 수요일 즈음 패터슨은 단골 바에 가던 중 지나치던 세탁소에서 래핑 하는 소리에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그리고 패터슨은 남자에게 묻는다. “세탁소가 작업실이에요?” 그러자 래퍼는 “느낌이 오면 어디서든 랩 해요.”라고 대답한다. 이러한 대사는 어디서든 영감이 떠오를 수 있고 그렇다면 그곳이 어디든 또 다른 공간이 된다는 의미로 들린다. 이는 다시금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서문을 떠올리게 하는데, ‘a man in himself is a city.’라는 문장을 생각했을 때 가장 보편적인 생각은 ‘도시에 다양한 장소가 있듯 사람도 여러 가지 요소가 있는 복합적인 존재이다.’라는 해석일 것이다. 하지만 이 장면을 통해 다른 관점으로 해석이 가능해진다. 영감이 떠오르는 공간이 바로 작업실이 된다는 것은 또 다른 공간 자체를 그 사람을 구성하는 요소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패터슨이 들리는 단골 바에서도 이러한 은유를 확인할 수 있다. 바의 주인인 닥은 뉴저지 ‘패터슨’ 출신의 유명인들을 명예의 벽에 전시할지 말지 여부에 대해 주인공 ‘패터슨’과 상의하곤 한다. 작은 말장난처럼 보이지만 그 기저에는 영화 전반을 관통하는 메타포가 숨어 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연출이라고 할 수 있다.

  인물의 감정을 표현하는 연출에 대해서도 인상적인 부분이 있다. 패터슨의 비밀 노트가 마빈에 의해 갈기갈기 찢기고 난 후 그의 내면을 직조하는 방법에 관한 연출이다. 영화를 보면 패터슨의 노트가 상실되고 다시 시를 쓰기 전까지 패터슨의 속내를 표현하는 약 15분 동안 배경 음악이 전혀 없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보통의 상업 영화는 귀를 울리는 사운드로 인물의 감정이나 성격을 묘사하고 사건의 기승전결을 표현하곤 한다. 또한 적절한 배경음악은 인물에 공감하고 사건을 이해하는 데 굉장히 유용하다.

  따라서 영화의 가장 큰 사건, 하이라이트인 장면에서 음악이 없이 오랜 시간 관객을 끌고 간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연출은 짐 자무쉬 감독의 작품을 인디, 독립 영화로 바라보기도 한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상통하는 부분이 있기도 하다. 또한 이러한 선택이 탁월하기도 했는데, 음악으로 표현될 수 없는 밀도의 감정을 담아낸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 장면은 패터슨이라는 사람이 상실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그대로 보여준다. 자신의 일상이 전부 담긴 노트가 산산이 부서졌을 때 패터슨이 화를 푸는 방법은 자신을 그의 세계에서 잠시 분리하는 것이었다. 평소 많은 표정 변화는 없지만 일상의 사소한 변화를 알아볼 줄 아는 섬세한 그에게 너무나 어울리는 방법이다. 처음 볼 때는 감정에 너무나 몰입해 음향 없이 극이 전개되고 있다는 것조차 몰랐지만 영화를 여러 번 보게 되면서 알게 된 부분이다. 애덤 드라이버의 연기와 짐 자무쉬 감독의 연출이 잘 맞아떨어진 부분이 아니었나 싶다.

  이러한 감독의 연출도 매우 훌륭하지만, 영화 속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서도 다루지 않을 수 없다. 먼저 패터슨을 연기한 배우는 아담 드라이버(Adam Driver)라는 미국 배우이다. 주인공 패터슨의 직업이 버스 기사라는 점을 생각하면 재밌게 느껴지는 이름이기도 하다. 아담 드라이버는 <프란시스 하(2012)>, <위아영(2014)>,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2017)>, <데드 돈 다이(2019)> 등의 필모그래피를 쌓으며 관객들에게 눈도장을 찍어 왔다. 2016년 작품인 <패터슨>에서 아담 드라이버는 패터슨이라는 캐릭터와 그의 일상에서 풍기는 묘한 예술적 감각을 이상적으로 표현했다. 또한 아담 드라이버는 LA 비평가 협회상에서 <패터슨>으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영화 속에서 패터슨의 감정은 대부분 눈빛과 입꼬리의 미세한 변화로 표현되거나, 표정 대신 사물들을 비춤으로써 은유적으로 표현되곤 한다. 다만 영화 중간 중간에 극의 상황과 아담 드라이버의 연기가 절묘하게 맞물려 특별해지는 장면들이 있다. 그중 가장 일상적인 웃음을 주는 장면을 하나 소개하자면 저녁으로 아내 로라가 준비한 비밀 파이를 먹는 장면이다. 파이의 속 재료는 방울 양배추와 체다 치즈인데, 로라의 대사에 의하면 둘 다 패터슨이 좋아하는 음식인 것 같긴 하다. 하지만 둘을 합치니 맛이 영 아니었는지 패터슨은 파이 한 입에 물 한 컵을 다 비운다. 로라가 빈 잔에 물을 채워주자 얼른 다시 파이를 베어 먹고 또 물을 한 컵 다 비우는 장면이 있는데 무미건조한 표정 뒤에서 느껴지는 감정들이 소소한 웃음으로 번져 영화의 분위기를 환기한다.

  또 재밌는 점은 패터슨과 로라의 강아지 마빈도 굉장한 연기를 선보인다는 것이다. 영화 내내 소파 위에 한자리 턱 차지하고 누워있는 이 강아지는 로라와 패터슨이 애정표현을 할 때면 ‘꾸르릉’ 거리면서 의사 표현을 아주 확실하게 한다. ‘꾸르릉’의 임팩트도 강하지만 실제로 마빈을 잡는 숏의 양도 상당하다. 이 강아지는 패터슨을 은근히 경계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는 점도 흥미롭다. 편지가 오지 않은 편지함을 매일 기울여놓는 범인은 마빈이고 패터슨은 이 편지함을 매일 바로 세운다. 산책을 갈 때도 리드 줄은 패터슨이 잡지만 가는 길을 선택하는 것은 마빈의 역할에 가깝다. 또한 세탁실의 래퍼를 만나는 첫 앵글에서도 패터슨은 문에 가려지고 보이는 건 마빈 뿐이다. 마빈의 존재와 연기가 <패터슨>만의 감성에 기여하는 부분이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것 같다.

  마치 오늘이 항상 새로운 날인 것처럼

   마지막으로 <패터슨>이 관객에게 주는 의의에 대해 논해보려 한다. <패터슨>은 영화 전반에 걸쳐 예술에 대한 시각을 재조명할 뿐만 아니라 일상이 시가 되는 순간을 발견하는 방법을 제안한다. 영화 후반, 패터슨의 노트가 마빈에 의해 찢기는 극적인 에피소드가 발생하고 패터슨은 파세익 폭포에서 만난 한 일본인 시인과의 대화로 다시 새로운 시상을 떠올리게 된다. 이러한 장면은 사실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에 타당성을 더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발생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느낌이 짙다. 썩 자연스럽지는 않지만, 영화에 반드시 필요한 장면이기도 하다.

  이 장면에서 일본인 시인은 패터슨과 별거 아닌 것 같은 대화를 나누면서도 “아하!”라는 감탄사를 내뱉는다. 여기서 “아하!”란 일상 속에서 다른 세상과 마주하는 순간에 터져 나오는 감탄사이자 일상 속 예술을 찾아내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헤어지기 전 일본인 시인은 “때론 텅 빈 페이지가 가장 큰 많은 가능성을 선사하죠.”라고 말하며 패터슨에게 빈 노트를 선물로 건네고 떠난다. 그리고 절묘한 타이밍을 지나 다시 “아하!”라고 외친다. 이는 패터슨에게 일종의 예술적 태도에 대한 제의를 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패터슨은 마치 홀린 듯이 이에 동의하며 자그맣게 아하라고 읊조리게 된다. 그리고는 다시, 시를 쓴다.

  ‘아니면 차라리 물고기가 될래?’라는 한 소절로 마무리되는 이 시는 차이를 통해 반복되는 메시지를 전하던 영화의 마지막 물음이다. 물고기는 똑같아 보이는 물속에서 자유롭게 부유하며 살아가지만 우리는 그 안의 세상이 늘 새롭다는 것을 안다. 극 중 패터슨은 시인이냐고 물어보던 소녀의 질문과 일본 시인의 질문에 매번 아니라고 대답하곤 했다. 하지만 큰 상실 앞에서 ‘아하!’라고 읊조리며 마주하게 된 일상에는 정적을 뚫고 다시 잔잔한 배경음악이 흐른다. 패터슨은 텅 빈 노트를 펼치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일상의 모든 의미에 대해 써 내려갈 것이다. 물고기에게 그렇듯, 마치 오늘이 항상 새로운 날인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당신에게도 그렇다. 일상에는 별거 아닌 일이 없다.

 

가작 선정자 이예규 학생 interview

 

 

예술이 교차하는 일상

무심코 지나간 골목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인물이 오간 발자취에서 예술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영화 <패터슨>이 예술과 일상의 관계를 찾은 이예규 학생(간호학과 3)과 이야기를 나눠봤다.

  - 영상비평 분야 가작으로 선정된 소감은.

  “비평문을 처음 써봐서 평론적으로 미흡한 점이 정말 많았는데 귀엽게 봐주신 듯해 다행이에요. 심사해주신 교수님들께 감사하다는 말씀 전하고 싶어요.”

  - <패터슨>을 소재로 결정한 이유가 궁금하다.

  “작품이 어렵지 않아 다각적으로 분석 가능한 대상이라고 생각했어요. 공감을 이끌 수 있으리라 느꼈죠.”

  - 영화 주제를 일상의 반복과 차이로 분석한 점이 인상 깊다.

  “영화 속 일상을 단순히 예찬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일상에 ‘별거 아닌 일’이 없다는 사실을 녹여내고 싶었지만 영화 내용만으로는 설득력이 부족했죠. 질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개념이 주제의 밀도를 높일 수 있는 적절한 소재라고 생각했어요.”

  - 해당 영화가 ‘예술에 대한 시각을 재조명한다’고 언급했다. 어떠한 방식으로 재조명하는지 궁금하다.

  “<패터슨>에서는 일상 속에서만 예술이 등장해요. 시상과 일상이 한 화면에 겹치는 장면은 영화에서 말하는 예술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부분이죠. 예술이 반드시 어렵고 진지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본질을 되새기게 한다는 점에서 예술을 향한 시각을 재조명하고 있다고 분석했어요.”

  - 시, 장소와의 연관성, 배우의 연기 등 영화의 정체성을 부각하는 여러 요소를 언급했다. 이러한 특징을 분석한 과정이 궁금하다.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일상과 예술의 관계라는 틀을 잃지 않으면서 영화의 전반적인 부분을 골고루 보여주는 일이었어요. 영화가 패터슨의 일주일을 7연의 시처럼 조명하듯 해당 요소들이 거시적으로 영화를 구성하는 운율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영화 비평을 할 때 감독이 의도한 섬세한 장치들을 알아보고 일관성 있게 의미를 끌어내는 일이 의미 있다고 생각했죠.”

  - 본인이 생각하는 일상의 가치는.

  “일상의 가치는 일상에 익숙해질 때 비로소 보이는 듯해요. 익숙함에 매몰되면 가치 있다고 생각하던 일들이 어느 순간 가치 없게 느껴지기도 하죠. 그래서 끊임없이 변화를 갈구하게 돼요. 큰 변화가 아니더라도 단순히 취미 하나를 시작하거나 때로는 무언가를 포기하기도 하면서요. 이런 미묘한 변화에서 일상의 가치가 무엇인지 찾아가는 중이죠.”

  -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열심히 쓴 글을 누군가 읽어주는 건 행복한 일이에요. 진심으로 감사하다 말씀드리고 싶어요.”

 

심사평

박명진 교수(국어국문학과)

영상 예술에 대한 여러 가지 고민과 접근

본심에 올라온 비평은 모두 4편이었다. 영화 평론으로는 「<주토피아>로 보는 유토피아 속 디스토피아」, 「<기생충>의 시선에 대하여-빈자에 대한 존중의 부재」, 「마치 오늘이 항상 새로운 날인 것처럼」, 그리고 TV 드라마 평론으로는 「‘부부의 세계’가 보여준 현실 여성의 세계」가 본심에 진출했다.

  영화 <주토피아>를 논의한 글은 침착하고 성실하게 작성한 평론이었다. 영화 속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문제를 끈기 있게 분석한 점은 인상적이었지만 작품에 대한 해석이 다소 기계적으로 진행됐으며 영상비평에서 사용하지 않는 문장들이 보여서 아쉬움으로 남았다.

  영화 <기생충>에서 계급의 갈등 문제를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시킨 글은 필자가 세간의 평들에 휘둘리지 않고 새롭게 해석하려 한 점이 좋았다. 그러나 <기생충>이 명확한 선악 구도를 취하지 않았고 감독이 빈부 격차의 원인에 대해 불투명하게 처리했다고 비판한 부분은 어느 정도 치우친 견해로 보일 수 있었다. 매스컴에서 자주 언급되었던 문제의식과 용어들을 자주 사용한 것도 평론의 참신함을 약화시킨 원인이 됐다.

  소위 막장 드라마라고도 알려진 TV 드라마를 선정하여 꼼꼼하게 분석하려 한 글도 인상적이었다. 다만 글 속에서 너무 많은 이야기를 나열한 점이 평론 전체의 통일성과 집중도를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한 주제를 일관성 있고 깊이 있게 분석했더라면 좋았을 듯하다.

  짐 자무쉬의 영화 <패터슨>을 논의한 「마치 오늘이 항상 새로운 날인 것처럼」은 영화에 대한 정밀한 분석, 글쓴이의 철학적 성찰, 안정된 글쓰기 등에서 좋은 인상을 줬다. 다만 몇 군데 평론에 걸맞지 않은 문장이 보인 점은 아쉬웠다. 그럼에도 침착하고 고른 호흡으로 글쓰기를 했다는 것과 영화를 통해 자신만의 사유와 고민을 풀어나간 점이 돋보여서 해당 작품을 가작으로 선정했다.

  아마추어 작가들임에도 치열한 문제의식을 갖고 평론에 도전한 투고자 모두에게 격려와 위로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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