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전 씨는 화덕에 몸을 던졌다.

  전 씨는 평화마을에 있는 낙원파이 가게 제빵사였다. 들숨에 야근을, 날숨에 2교대 근무를 하며 재료를 옮겨 반죽하고 굽기를 반복했다. 점심은 공장에서 나오는 무말랭이에 조밥, 저녁은 집에서 가져온 주먹밥을 먹었다. 뼈가 닳도록 일하고 제대로 끼니를 챙기지 못한 사람들은 무말랭이보다 시들시들했다. 짧은 점심시간에는 억지로 공을 차고 놀아야 했다. 하루, 한 시간도 쉴 수 없었다.

  마을에는 유명한 파이 거리가 있었다. ‘낙원옆에 행복’, ‘행복뒤에 천국’, ‘천국건너서 사랑이런 식으로 가게들이 촘촘히 박혀있다. 그래서 마을은 파이 가게 직원 천지였다. 한 집안의 가장부터 학교를 못 가는 젊은이까지 파이를 만들었다. 파이를 굽지 않는 이들도 가족과 친구를 통해 매일 파이 냄새를 맡았다. 마을과 주민들은 파이가 있어 살아갔다.

  직원들은 열심히 일한 만큼 돈을 받지 못했다. 쥐꼬리 월급보다 파이 자르고 남는 부스러기 월급이라는 표현이 적절했다. 전 씨와 생각이 같은 몇몇은 함께 분노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 몇몇을 제외한 대부분은 현실을 고민하고 항의할 힘조차 없었다. 뜻을 모은 이들은 사장실에 찾아갔고 협상을 원했지만, 사장은 가게가 어렵다. 파이를 키워야 한다. 더 많이 구워야 한다.”만 반복할 뿐이었다.

  해가 갈수록 굽는 파이가 커지고 양이 늘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의 삶은 나아질 줄 몰랐다. 출퇴근하는 길은 칙칙하고 매캐해졌고 길가에 듬성듬성 자란 풀들은 작고 못생겨졌다. 나비를 대신해 떠다니는 먼지와 안개 덩어리에 가려지는 시야가 익숙했다. 월급은 여전히 파이 부스러기였다.

  전 씨는 직원들을 지키기 위한 법의 존재를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정당한 대가와 업무환경을 보장할 법을 직원들과 사장에게 알리고, 대통령에게 호소하는 편지까지 썼다. 전과 달리 엄청난 군중이 모여 빼앗긴 인간다운 대우와 정당한 대가를 되찾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변화는 없었다. 여전히 파이 제빵사보다 그가 굽는 파이만 중요했다.

  전 씨는 절망했다. 꿈쩍 않는 현실보다 하나 남은 선택지에 절망했다. 여느 날과 같이 출근해 파이를 다 구은 전 씨는 화덕에 몸을 던졌다. 그 순간 평화가 흔들렸다. ‘낙원의 진면모가 드러났다. ‘평화낙원을 관망하던 이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파이를 대신해 화덕에 들어간 제빵사가 주목받은 첫 순간이었다. 세상은 드디어 변하기 시작했다. 파이 가게 직원들의 최소 월급과 노동시간이 결정됐다. 무엇보다 자신 그리고 우리의 권리를 더 적극적으로 요구했다.

  제빵사의 죽음 이후 50년이 흘렀다. 전보다 나아졌지만 여전히 문제투성이다. 안전장비도 없이 불길 앞에 서있고 성희롱을 당하고 월급은 제 때 못 받기도 한다. 그래도 우리는 문제를 바로잡고자 목청껏 외친다. 마을에 파이 가게 직원이 한명이라도 있다면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전 씨를 떠올리면서 말이다.

 

유서진 사회부 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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