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조용필'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은 술자
리에서 빠지지 않는 노래 `돌아와요 부산항에'다. 그보다 조금 나이든 세대
라고 한다면, `용필이 오빠'를 연호하는 `오빠 부대'를 최초로 이끌었던 19
80년대의 가수로 기억한다.변화하지 않는 듯이 보이는 장르인 뽕짝 중에서도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가장 오래 동안 `애창'되는(`애청'이라기보다는) 곡
으로 꼽힐 수 있다. 그 노래의 주인공 조용필은 20년동안 남녀노소를 불문하
고 전국민을 사로잡은 가수다. 영원한 국민의 가수.한편 1980년대 조용필의
또 하나의 모습은 아이돌 스타로서의 면모이다. 지금처럼 `10대만의' 가요가
없던 시절, 보다 덜 분화된 젊은이들 전체를 상대로한 조용필의 경쾌한 곡들
의 목록에는 `단발머리', `고추잠자리', 그리고 조용필 4집의 `못찾겠다 꾀
꼬리' 등이 올라있다.조용필을 지금까지 이끌어온 것은 전자일까 후자일까.

`영원한' 조용필과 `일시적인' 조용필. 아니면 이 두 가지와는 또다른 면일
까.조용필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 따르면 그는 단지 `뽕짝' 가수도 아니고
단순한 아이돌 스타도 아니다. 그는 당대 가요의 여러 조류들을 통합하고 서
구의 조류를 주체적인 시각에서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평가받아야 한다는 것
이다.이런 주장에 따르면 그의 음반 중에서도 1983년의 조용필 4집은 최고의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난 아니야'에서는 어린이들에게 동요의 대체재를 선
사했고, `못찾겠다 꾀꼬리', `자존심'에서는 주체적으로 수용된 록 음악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낭만과 젊음을 만끽하게 했고, `꽃바람', `비련'과 같은
성인가요 풍의 발라드 곡에서는 전세대를 아우르는 감수성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 창조적이고 다양한 취향을 포섭한 최고의 `명반'은 당대 한국 대중
가요의 또다른 현실을 보여준다. 다양한 세대와 계층을 포괄하는 여러가지 스
타일의 음악은 결국 조용필이라는 기표 하나로 통합되었다. 그는 심하게 말
하면 `취향의 블랙홀'이었던 셈이다. 그를 통해 한시적으로 봉합되었던 상이
한 감수성의 분열은 다만 지체되었을 뿐이었다.1980년대 후반, 10대들은 `정
상적인' 궤도를 따라 자신들만의 우상을 만들어갔고, 성인들 또한 보다 감각
적인 `뽕짝'에서 가라오케, 노래방 등 자신들의 놀이문화에 걸맞는 가요를
찾아냈다. 결국 조용필은 전세대의 감각, 전국민의 감수성을 독차지하지 않
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한국 대중가요판의 쓰라린 현실을 보여주었다.결국
우리가 흔히 가지고 있는 그의 `일인(一人) 제국'에 대한 `상식적인' 관념은
진실과는 가깝고도 먼 셈이다. 즉 서두에 제시한 전국민이 부르는 뽕짝의 주
인공인 국민가수 그리고 1980년대 등장한 최초의 아이돌 스타라는 두 가지
이미지는 실제로 조용필의 `음악적' 성취를 과소평가하는 측면이기도 하지만
, 그보다 더한 비극은 비난받을 수 없는 두(세) 가지의 이미지가 단일한 것
도, 전혀 별개의 것도 아니었다는 `문화적인' 측면이다.`조용필'하면 떠오르
는 모순되고 충돌하는 갖가지 이미지들은 어찌보면 우리 전세대들이 살아갔
던 시대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국민가수이기도 하고 아이돌
스타이기도 하고 가요의 혁신자이기도 한 조용필 스스로의 말처럼 그는 `80
년대의 희생자'였던 셈이다.

이정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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