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석동에 뜨거운 뙤약볕과 함께 여름이 성큼 다가왔다. 기자가 신문사에서 맞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 여름이다. 카메라를 매고 캠퍼스를 돌아다니던 수습기자도 어느덧 한 부서의 부장이 돼 마지막 칼럼을 쓰고 있다.

  2년 동안 신문 만드는 매주 주말마다 신문사의 불은 밤새 꺼지지 않았다. 고단한 신문사 임기 동안 나를 버티게 했던 것은 매주 일요일 아침, 소주 한잔 걸치고 자취방에 들어가서 하는 샤워였다. 주말 이틀 밤을 새면서 기름진 머리를 따뜻한 물에 감고 몸을 닦는다. 무엇보다도 마치 옛 중국 요순시절의 허유처럼 귀를 깨끗이 씻는데 공을 들인다.  

  옛 중국 요 임금은 허유에게 왕위를 권한다. 그러자 허유는 더러운 이야기를 들었다며 강물에 귀를 씻는다. 몇 마디 말을 들었을 뿐인데 마치 정말 귀에 더러운 것이 묻은 양 행동하는 것이다. 그 옆을 지나던 범부는 자신의 소에게 더러운 귀를 씻은 물을 먹일 수 없다며 한 술 더 뜬다.

  매일같이 취재를 하다보면 일주일에 수십개의 인터뷰를 하게 된다. 너무나도 많은 말을 듣고 그만큼 많은 말을 해야 한다. 기자로서 당연한 일이지만 가끔은 사람으로서 힘들 때가 있다.

  어느날 신문사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전화건 이는 당신이 겪은 불쾌한 일에 기사화를 원했다. 기사화 불가 결정이 이미 났음을 전한 대가는 컸다. 말이 끝나마자 ‘그래도 니가 기자냐’부터 시작해 30분 가까이 폭언이 이어졌다. 대화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조용히 듣던 기자의 인내심은 ‘니가 멍청해서 머리가 안돌아간다’는 말에서 끊어졌다. 한창 실랑이 끝에 전화를 끊었다. 분노로 벌겋게 달아오른 귀가 간지러웠다.  

  순간 인터넷에서 떠돌아다니던 대한항공 조씨 일가의 모습을 마주한 듯 했다. 모욕적인 언사는 그렇다 치고 육두문자까지 이어지는 그들의 폭언 앞에서 피고용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매달 월급을 받기 때문에 날아오는 컵을 맞고도 귀를 찢을 듯한 고함을 듣고도 아무 말 하지 못했다. 그들이 느꼈을 무력함과 굴욕감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다.

  우리 마음을 더럽히는 때 묻은 말과 몰상식은 우리의 일상 속에 만연하다. 교육의 현장에서 막말과 성희롱을 일삼는 일부 교수, 부하에게 폭언을 남발하는 일부 고용인, 인권을 깔아뭉개는 2차 가해자. 더 가까이는 매주 기자에게 당당히 기사 사전 검열을 원하는 취재원까지. 교수로서, 기자로서, 상사로서 가지는 지위는 그들의 말에 힘을 실는다. 그 힘으로 인해 발화자의 말들에 더 더러움이 묻기도 더 맑게 느껴지기도 한다.

  일요일 새벽에 샤워를 하면서 귀를 씻는 기자의 행위는 일주일 내 들은 말 중 귀에 묻은 더러움을 씻어내고 더 많은 목소리를 듣기 위함이다. 깨끗한 귀는 더 맑은 소리를 마음에 담아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또한 매번 귀를 씻으면서 되돌아본다. 혹시라도 나의 말에 때가 묻어있었는지. 시커먼 나의 말 때문에 지금 누군가 귀를 씻고 있지는 않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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