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틀그라운드’는 고립된 지역에서 마지막 1인이 되기 위한 서바이벌 슈팅게임이다.
‘배틀그라운드’는 고립된 지역에서 마지막 1인이 되기 위한 서바이벌 슈팅게임이다.

죽창론의 완성―공정한 경쟁이 제공되는 무(용한)정부 사회의 등장

근대인의 숙명; 총체성을 잃어버린 세계에서 단일한 시대정신에 귀결될 수 없다. ‘헬조선’과 ‘죽창’으로 2010년대 한국을 설명하는 담론은 벌써 설명력이 퇴색되었다. 2014년 4월, 한국사회는 안전 시스템의 붕괴를 경험한 후, 보호받지 못하는 세상 속에서 ‘누구나 한방’이라는 역설적인 공평성 속에서 차근차근 혁명으로 나아갔다. 필리버스터, 촛불 혁명, 반-여성 혐오 등 수많은 담론 과잉을 거쳐 겨우 ‘반쪽짜리 인권’이라도 존중하는 정권을 얻어냈다. 그 사이에 대중문화는 서바이벌과 경쟁을 강조했고 사회적 약자들은 어떤 기관에도 자신의 실존을 의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도 다수의 사람은 이 사회가 공정한 과정과 정의로운 결과가 올 것이라고 믿고 있다. 작은 정부와 큰 정부 중 무엇이 우리에게 더 값진 인생을 제공할 것인지에 관한 논쟁은 폐기되어도 좋겠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가장 공정한 경쟁은 바로 무정부 상태에서 시작된다.1)

  <Playerunknown’s Battleground>(이하 배틀그라운드)는 2017년 3월 얼리 엑세스(early access)로 출시된 이후 전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인기를 끈 ‘배틀로얄’ 장르의 게임2)이다. 사전 출시라는 핑계에 기대어 튜토리얼도 없는 불친절한 인터페이스와 고사양 컴퓨터에서도 불안정한 최적화 상태에도 불구하고 배틀그라운드는 순식간에 인기게임의 반열에 올랐다. <리그 오브 레전드>가 몇 년간 지켜오던 PC방 점유율 1위는 2016년 하반기 등장한 <오버워치>가 가져가나 했더니 일 년도 안 돼서 배틀그라운드의 것이 되었다.3) 각종 신기록을 갈아치운 이 게임이 대체 무슨 이유로 인기를 끌게 되었을까? 게임의 목적은 단순히 말하면 재미와 욕망해소다. 자신이 즐기는 게임에서 해소하려는 욕망은 곧 아비투스의 작용에서 기원한다.4) 그런데 한국에서 인기를 끌던 게임은 본래 MMORPG 장르였다. 합리적인 경쟁체제아래에서 퀘스트를 통해 노력에 따른 적절한 보상을 얻고, 길드원들과 연대하여 공공의 적을 처리하는 제2의 인생은 지긋지긋한 현실의 도피처였다. 이것이 오래가지 못한 이유는 게임 안의 경제체계에 현실의 경제 능력이 개입하고부터다. 게임 내의 아이템이 현금으로 수천만 원에 거래되고, 새로운 유저는 헤비유저와 연을 맺지 않으면 원활한 플레이 자체가 불가능한 게임 사회가 구축되면서 사람들은 단 한 판의 경기로 게임을 결정하는 MOBA나 FPS 장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 경향은 점차 보드게임처럼 단순하지만 보유 자산이 개입하지 않는 능력 위주의 게임을 선호하는 방향으로 흘러 배틀그라운드에서 그 정점을 찍었다.

  배틀그라운드는 튜토리얼도 제공하지 않는다. 게임이 시작되면 100명의 인원이 이름 모를 섬에 떨어져서 각자도생으로 무기와 그 부속품, 구급 약품을 구해 점점 좁아지는 안전지역에서 최후의 1인으로 살아남아야 한다. 상대방을 죽이라고 명시한 적은 없지만 승리를 목표로 한다면 불가피하게 적을 사살해야 한다. 총기에는 복잡한 탄도학이 적용되어 있고 연습 기능은 제공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조작법도 스스로 터득해야 한다. 10위 안에 들면 패배해도 결과 창에서는 Top 10이라고 언급하지만 승리 경험으로 인정해주지 않는다.5) 게임의 향방을 뒤집는 유료 아이템도 없고 의상이나 액세서리는 플레이어의 능력치에 관여하지 않는다. 어디서 날아오는지도 모르는 총알에 죽고 다시 플레이하고 이를 반복하게 된다. 이 불친절한 게임은 지금 여기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게임이다.

그 전에도 배틀로얄 장르 게임은 존재했고 지금도 출시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H1Z1>이나 <포트나이트>가 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여전히 배틀그라운드만을 즐긴다. 게임 인터넷 방송 플랫폼인 ‘트위치’에서 <포트나이트>는 배틀그라운드보다 2배 이상 시청자 수를 앞서지만 한국만 놓고 보면 <포트나이트>는 배틀그라운드의 100분의 1도 시청하지 않는 비인기 게임이다. 왜 그럴까? <H1Z1>와 <포트나이트>는 배틀그라운드보다 캐주얼한 기능과 애니메이션스러운 그래픽을 제공한다. 이전 세대가 ‘리얼 버라이어티’에 목을 맸던 것처럼 배틀그라운드는 더 사실적이고, 현실적이고, 이전 세대보다 잔인해진 경쟁체제에 대한 맹신을 자극한다. 이를 처음 플레이하는 사람들은 생생한 총소리와 갑작스러운 죽음에 슈팅 게임보다 공포 게임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한국인들에게 이것은 더 매력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대중문화는 현실의 문제를 대중이 더 익숙하고 당연한 것으로 인지하게 하거나, 현실의 문제로부터 도피할 수 있도록 돕는 양날의 검이다. 배틀그라운드는 죽창론으로 대두된 국가 시스템에 대한 불신과 불안을 위한 도피처이자, 보호받지 못하는 경쟁체제를 가상현실에 구현한 무정부주의-완성판이다.

  ‘존나게 버로우’해라―일그러진 성공 주의의 결과물

  게임 업계에서 ‘메타’는 Most Effective Tactic Available의 줄임말로, 게임 내의 플레이 경향 혹은 경향의 변화를 지칭하는 용어다. ‘존버’는 본래 Starcraft 에서 저그 종족 유닛의 특성인 버로우(burrow, 잠복. 땅을 파고 들어가 은신한다.)를 따 ‘존나게 버로우’해라, 즉 은신해서 상황이 유리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행동하라는 은어이다.6) 배틀그라운드에서 ‘존버 메타’는 게임 운영에 필요한 최소한의 생존 물품만 갖춘 채 안전지역에서 숨어 평균 25분 정도 되는 경기 기간 짧게는 10분, 길게는 20분 동안 숨어서 전투 행위를 최소화해 승리 확률을 높이는 플레이 방식이다. 최근 이슈가 된 비트코인 투자자들 사이에서도 존버는 그들의 심리를 분석하는 중요한 키워드였다. “존버는 승리한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가치변동 앞에 그저 가치가 정점을 찍을 때까지 기다린다면 일확천금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노오력’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문장이었다.

  주어진 목표를 달성하고 합당한 보상을 얻는 게임 시스템을 고려할 때 배틀로얄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존버하는 것은 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존버가 승리를 구성하는 요소 획득을 위한 수단이 아닌 승리 그 자체를 위한 방법이라는 점이 문제다. ‘아무 행위도 하지 않는’ 전략이 플레이어가 선택하는 합리적인 ‘어떤 행위’일 때, 플레이어는 게임을 진행하되 아무 행위도 하지 않는 데 대부분 시간을 쓰게 된다. 이는 두 가지 문제적 상황으로 해석된다. 첫째는 플레이어가 게임을 통해 오직 승리라는 무형적인 ‘경험’을 갈구하는 일 외에는 거의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둘째는 승리 경험을 얻지 못하면 이 행위를 무한정 반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른 장르에서는 게임의 승리 혹은 목적 달성이 능력을 증명하는 게임 레벨이나 자산, 높은 랭킹을 보상으로 제공해 게임 안에서 자아실현을 도와준다. 반면 배틀그라운드는 오직 승리라는 ‘경험’만 제공한다.7) 경험적으로 파산한 청년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승리 경험만을 갈구하는 단순한 욕망에 젖게 된다. 8)9)

  ‘금수저’나, ‘조물주 위에 건물주’ 같은 표현처럼, 한국 청년들은 이미 기득권에 의해 공정한 경쟁이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이들에게 노력은 부담스러운 일이다. MMORPG 게임 안에서도 ‘현질’을 통해 현실에서의 경제 능력이 가상현실에 영향을 끼친다. 이것이 가장 심각한 형태로 나타나는 리니지는 이미 ‘린저씨’들이 기업가의 모습으로 게임을 지배하고 있다. 비트코인의 흥행 요인이 부동산이나 주식처럼 고도의 정보를 요구하지 않아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투기수단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한국사회는 이미 일그러진 욕망을 욕망하는 자신에 관한 반성능력을 잃어버렸다고 할 수 있다. 박근혜 게이트에 대한 전 국민적 공감이 일어난 지점 중 하나가 정유라의 이화여대 부정입학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한국사회에는 공정한 시스템에 대한 불신과 한편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기주의적 성공사례에 관한 무기력한 경험이 이미 팽배한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나 자신에게 그럴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얼마든지 그것을 실행할 의지 또한 있다.

  배틀그라운드를 플레이하는 방법이 존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얼마든지 나가서 적극적으로 적과 싸우는 방식으로 게임에서 승리할 수 있다. 그러나 100명의 인원이 똑같은 조건에서 시작했을 때 한 명이 수 명을 제거하고 승리하려면 압도적으로 뛰어난 무기나 게임 수행 능력을 갖춰야 한다. 이런 플레이에 성공해 승리를 쟁취하는 소수의 플레이어 혹은 이런 플레이 방식을 ‘여포’10)라고 부른다. 여포 지향 플레이어들은 존버 지향 플레이어보다 비교적 능력주의적인 가치관을 갖고 있다. 이들은 공정한 시스템의 존재를 신뢰하지만 공교롭게도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 여포에 실패하고 낮은 순위를 기록하게 된다. 여전히 능력주의를 신뢰하기 때문에 자신이 잘 하면 된다고 믿지만 1등만을 승리로 취급하는 경쟁 사회에서 이들은 늘 실패를 겪고 있다.

  이 때문에 배틀그라운드 역시 공정한 경쟁 시스템을 파괴하고자 하는 일이 발생한다. 슈팅 게임은 주로 에임핵(aimhack, 상대방에게 총을 발사할 때 조준선을 상대에게 맞추는 행위를 도와주는 보조 프로그램) 때문에 곤욕을 치른다. 어떤 플레이어들은 핵 이용자와의 교전에서 승리하기도 하지만 여포 지향 플레이어든 존버 지향 플레이어든 대부분 핵 이용자에게 패배한다. 출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충분한 보안 경험이 없는 게임 개발자들은 핵으로부터 취약하기 때문에 이때 얼마나 기민하게 대처하는가는 이후 게임의 흥망을 결정지을 정도로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 게임 안에서는 규칙을 어기는 일이지만 오로지 승리라는 목표를 위해 존버, 여포, 핵 등 다양한 방법으로 생존에 목메는 세계는 분명 현실사회를 반영하고 있다. 오직 자기 안에서만 누적되는 무형의 경험을 위한 일그러진 성공 주의다.

  핵쟁이 국가를 퇴출해라―경쟁체제 맹신과 제노포빅의 초상

  한국 배틀그라운드 유저들이 지역락(Location lcok, 여러 나라에 게임을 서비스하는 경우 특정 지역 간 서버를 공유하지 않게 하여 특정 지역에서 특정 서버를 접속하지 못하게 하는 정책)을 요구한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티밍(Teaming, 편짜기)을 하거나 핵을 사용하는 악성 플레이어가 대부분 중국인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한국인이 아시아 서버를 이용하면 핑(ping, 지연 시간)에 근거해 물리적으로 가까운 플레이어인 중국인과 매칭될 수밖에 없다. 그 전까지 한국인들은 한국인으로만 구성된 서버를 제공하는 게임들을 주로 즐겨왔다.11) 실제로 중국 플레이어들이 다수 악성 행위를 하여 문제로 지적된 건 사실이지만 이를 중국인의 문제로 일반화하는 것은 비약이다. 인구수에 따른 비율적인 문제라고 보는 게 더 합리적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지속해서 지역 구분을 요청했고 결국 아시아 서버 외에도 코리아 서버가 개설되었다. 여기에는 공정한 경쟁을 해치는 외부인에 대한 제노포비아적 심리가 잠재되어 있다.

  우선 한국인들이 게임 안에서 지역 제한을 주장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근거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민족적인 이유이다. 배틀그라운드의 개발, 저작권은 한국 기업에서 소유하고 있다. 이미 국제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게임에 개입되는 자본을 고려할 때 ‘국산 게임’이라는 것은 무용한 개념이지만 실제로 배틀그라운드 출시 당시 국산 게임이라는 호명은 여러 기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12) 즉 한국(인)의 게임 플레이에 중국인이 개입되는 상황을 거부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공정한 경쟁 가치 훼손이다. 다수의 악성 유저(중국인)가 공정한 경쟁을 망치기 때문에 공정하게 경쟁하는 자국민(한국인)을 위해 안전한 서버를 제공하고, 중국인은 별다른 대안 없이 악성 유저들이 가득한 서버에서 플레이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 두 접근은 게임 제작사가 악성 유저를 완전히 퇴치하지 못한다는 구조적인 실패를 인지한 후, 제노포비아적 관점을 기저에 깔아 일시적인 해결책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최영미(2016)는 이주민을 고객으로 접하거나, 이주민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겪은 갈등상황은 곧 특정 국가 사람을 일반화하여 드러내는 반감으로 이어진다는 현상을 발견한 바 있다.13) 한국인은 다문화 정책이 경쟁에서의 불공정함을 유발하고, 이주노동자, 외부인이 발생시킨 단편적인 문제 상황을 그들의 일반적인 속성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인, 중국 동포에 대한 스테레오타입도 여기에 한몫해 한국 플레이어들은 중국인 플레이어와 함께 게임을 하는 일 자체를 부정적으로 여긴다. 개발사 단위에서 악성 플레이를 차단하지 못한 구조적 문제가 지속되자 배타적이고 제노포비아적인 개인적 의식 문제가 발현된 것이다. 이 때문에 한국인 핵 사용자가 등장한 경우에는 개인의 문제로만 한정하는 모순적인 현상도 나타났다.14)

  일련의 사례들 속에서 플레이어들이 ‘공정한 경쟁 시스템’에 관한 믿음을 갖고 있다는 점도 발견할 수 있다. 악성 유저가 원천적으로 차단되면 원활한 게임 플레이가 가능하다는 믿음은 공정한 경쟁 시스템하에서 자신이 유의미한 성과를 거둘 것이라고 믿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이는 게임이라는 인위적인 가상세계에서 경쟁하는 플레이어들에게 발견되는 보편적인 가치관이다. 이것은 현실 세계의 인식과 관계를 맺을 때 문제가 된다. 악성 플레이어를 차단해도 실력 차이에 의해 승리를 독점하는 이들은 존재한다. 경쟁체제를 체화한 플레이어들은 공정한 경쟁 시스템 형성에 너무 열의를 가진 나머지 이 시스템 자체에 관한 의심을 하지 않는다. 또 타고난 실력 차이로 인한 승리의 독점을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불공정하고 피로한 현실 세계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게임을 선택한 플레이어들은 공정한 경쟁체제가 형성되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한다. 대신 승리하지 못하는 패배감을 해소하기 위해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스트리밍을 시청한다.

  넌 양학15)해도 괜찮아―카타르시스 스트리밍 아나키즘

  유저들은 뒤늦게 깨닫게(착각하게) 된다. 내가 원하는 사회는 아주 작은 정부, 혹은 정부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진짜 실력으로 평가받는 곳이구나. 당연히 이 능력주의적 발상에는 문제가 있다. 현실 사회에서 마주하는 사회적 행위들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인간은 그 자체로 존엄하다는 가치를 수호하기로 계약했기 때문에 각자의 권리는 어떤 경우에도 보장되어야 한다. 게임 플레이어들이 핵을 내쫓을 때의 모습은 마치 공정한 경쟁을 수호하기 위한 ‘법’, 즉 개인 이상의 조정하는 존재를 주창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들이 더 강한 자의 더 약한 자를 짓밟는 모습을 보고 즐거움을 느낀다는 걸 알게 되면 그들이 맺은 계약과 연대가 실은 도덕적이지도, 법적이지도 않은 능력주의적 합의였음을 알 수 있다. 실은 공정한 경쟁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한정된 파이를 두고 싸우는 경쟁체제의 특성상 약육강식은 일어난다. 게임 운영진은 이를 인지하면서도 플레이어가 흥미를 느껴야 하기 때문에 Elo 시스템을 도입해 누구나 자신과 비슷한 실력의 상대를 만날 수 있게 도와준다. 운영진이 곤욕을 치르는 이유는 이 시스템의 불완전성에 있다. 유저들이 자기 수준보다 더 떨어지는 상대를 대상으로 ‘여포’ 행위를 하기 때문이다.

  이 여포는 개인 플레이어 차원에서 핵만큼 피부에 와 닿는 문제는 아니다. 능력주의를 체화했기 때문이다. 특히 배틀그라운드처럼 100여 명이 한 게임에 매칭되는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문제는 스트리밍에 있다. 유튜브가 떠오르면서 크리에이터, 스트리머들은 자신의 게임 플레이 영상을 더 자극적으로 만들어 조회 수를 높이고, 광고수익을 얻는다. 더 멋지고 극적인 플레이를 구현하기 위해 자신의 수준보다 훨씬 아래 단계의 플레이어들과 대결한다.16) 이를 시청하는 사람들은 스트리머의 이러한 압도적인 게임 플레이가 정확한 Elo 시스템하에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요구한다.17)  게임이 현실과 다른 대리만족을 위해 구현한 Elo 시스템이 다시 Elo와 같은 시스템이 없는 현실의 경쟁 시스템―입시, 취업과 유사해진다. 게임은 신자유주의를 재현한다. 이는 사회적 배려계층을 위해 구성된 제도(대표적으로 지역균형입시제도가 있다)에 관한 반감과 맞물려 약육강식의 경쟁체제를 플레이어가 체화하게 한다.

  스트리밍은 소시민에게 불가능한 게임 플레이를 구현하는 데 목적을 둔다. 시청자들은 이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시청자가 스트리머에게 자본을 제공하는 행위는 현실 세계의 신자유주의적 불공정 경쟁체제가 다시 가상공간의 공정 경쟁체제를 붕괴시키는 현상이다. 사실 이 문제를 논의할 때 ‘우리에게 진짜 공정한 경쟁이 무엇인가’ 이전에 선행될 의제는 ‘경쟁이 우리를 더 이롭게 하는가’이다. 현실적으로 경쟁체제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 차선 의제가 ‘더 공정한 경쟁체제란 무엇인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역설적으로, 불공정한 경쟁체제 때문에 자신이 할 수 없는 압도적인 플레이를 스트리머에게 요구하고 대리만족과 카타르시스를 얻으며 가상세계는 이 때문에 불공정한 경쟁체제 쪽으로 더 공고히 완성된다는 것이다. 이는 입시제도에 관한 논의에서 입학사정관제(학생부종합전형)와 대학수학능력시험(정시전형) 간의 견해차를 연상케 한다. ‘어떤 제도가 더 사교육을 유발하는가’라는 논의 이전에 실은 ‘입시제도가 경쟁체제로 이루어지는 게 올바른가’라는 논의가 중요함에도 한국사회는 입시제도를 더 공정하게 하는 데만 관심이 있다. 이 공정함은 물론 근원적인 공정한 시스템에 관한 고찰과는 거리가 멀다. 즉 현실 세계에서도 가상세계에서도 아무런 배경이 없는 자들만 소외된다.

  청년세대가 항상 기성세대보다 진보적이라고 믿는 건 착각이다. 실은 더 진보적이지도 더 보수적이지도 않다. 그저 당장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중요한 이들에게 미래를 보장하는 담론 같은 건 신경 쓸 여유도 없다. 자기 자신의 개인적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이들에게 사회적 약자를 배려한다는 걸 어떻게 납득시켜야 할까. 인제 와서 사실 능력주의는 잘못된 거야, 라고 가르쳐줄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은 한편으로 약자의 위치에 서지만 한편으로는 강자의 위치에 서기도 한다. 이것을 통해 인지해야 하는 것은 관용과 배려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이것이 능력주의를 통해 발현되면서 자기가 더 강한 순간에 ‘뽕을 뽑는’ 것으로 변질되고 말했다.

  카타르시스 스트리밍 아나키즘. 실제로 대부분의 소시민이 원하는 것은 아나키즘도, 약육강식 체제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한정된 자원을 바탕으로 쟁취해야 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도태되고, 대리만족을 갈구한다. 이 욕망이 다시 약육강식 체제의 원동력이 되고 체제는 더 공고해진다. 이 과정에서 사회 구성원들은 자신들이 실제로 원했던 시스템이 무엇인지에 관해 잊어버리고 만다. 능력에, 노력에 의한 결과의 산출이 최선이라고 믿는다. 패배하고, 다시 플레이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승리를 한 번 경험하면 그 맛을 잊지 못해 또다시 패배를 반복한다. 더 이상의 최선이 존재할 거라는 믿음은 없다. 결국 이 지옥 같은 쳇바퀴를 끊임없이 돌면서 “존버는 승리한다”고 무기력하게 중얼거리는 미래뿐이라는 걸 외면한 채로.

  그럴 수 있어, 사실 99등이어도 괜찮은 거지 뭐

  실은 다시 돌아가서 한국사회가 배틀그라운드에 열광한 이유를 찾아볼 필요가 있다. 그건 99등이어도 즐거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1등을 제외한 2등부터 100등에게 주어지는 게임 오버 메시지는 “그럴 수 있어, 그런 날도 있는 거지.”다. 청소년들 사이에서 확산되어 지적된 리셋 증후군(Reset syndrome)은 컴퓨터가 오작동할 때 리셋 버튼만 누르면 다시 시작할 수 있듯 현실에서도 문제 상황을 다시 되돌릴 수 있다고 믿는 심리다. 앞서 배틀그라운드를 존버 지향과 여포 지향으로 구분했지만 실제 게임을 플레이하다 보면 숨죽여서 상대가 지나가길 기다리기도 하고 과감하게 상대와 교전을 시도하기도 한다. 거기에는 얼마든지 재시도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정말로 얼굴도 모르는 100명과 고작 14㎢ 남짓의 섬에 떨어져서 목숨을 걸고 생존해야 한다면 그건 어떤 경우에도 즐거운 게임처럼 느껴지진 않을 것이다. 가상현실의 즐거움은 그것이 우리의 삶을 위협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있기에 가능하다. 비록 배틀그라운드 속에서 발견한 것들은 병폐이지만, 한편으로는 투영된 희망이기도 하다. 엄기호의 말마따나 세상을 리셋할 수는 없다. 하루아침에 이 경쟁체제를 뒤집어버릴 수도 없다. 그래서 합의점을 찾는다면 다만 우리가 원하는 것은 완충지대다. 몇 번의 실패를 딛고 일어서기 전에 잠시 누워 머리를 식힐 수 있는 푹신한 공간 같은.

  국가 단위의 교육 속에서 한국인은 불굴의 의지를 가진 민족이었다. 빨리빨리, 몸을 혹사해가면서 뒤늦게 시작해도 남을 앞서갈 수 있는 기적 같은 민족. 그 기적은 실은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왔다. 완전히 다시 일어날 기운을 잃어버린 자들에게 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그저 ‘생존’이었다. 어떻게 하든 살아 있기만 하면, 혼자 남기만 하면, 여태껏 한 번도 제대로 쥐어본 적 없는 그 승리라는 경험을 얻을 수 있다고 배웠다. 지금 이 순간은 물론 앞으로도 이 생존의식은 한국사회의 필수요소일 것이다. ‘빡겜’해야 살아남는 세상. 연습은 실전처럼. <포트나이트>가 해외에서 인기를 얻는 동안 한국인들이 배틀그라운드에만 목멘 이유는 ‘리얼리티’ 때문이다. “인생은 실전이야 좆만아”가 한때의 유행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제 한국사회는 조금 더 실수와 재시도에 관대해져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잔혹한 경쟁체제에서 최선 대신 차악만을 찾아다니던 한국인은 여전히 상상할 수 있는 멋진 세계보다는 잔인하지만 그나마 완충지대가 존재하는 배틀그라운드에서 만족하게 된 건 아닐까.

  박민규가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 주창하던 삼천포 같은 슬로우 시티의 형태는 이제 그때보다 더 나이브한 주장이 되어버렸다. 개인적 차원에서 경쟁에 목메지 말라고만 할 수는 없다. 1등을 제외하고는 전부 패배자가 되는 시스템에 길들었으니까.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꾹 참고, 이방인을 배척하고, 때로 부정한 방법을 사용하면서까지 이미 개인적 의식상태는 경쟁-기계에 가까워졌다. 요구할 수 있는 건 하나다. 이 경쟁체제의 퍼블리셔인 국가 차원에서의 완충재가 필요하다. 그 완충재는 먼저 “제 인권을 반으로 자를 수 있습니까”라는 외침에 답변을 해주는 정부일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사를 떠올려 보자.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이쯤에서 조금만 더 욕심을 부려도 좋을 것이다. “과정은 안전할 것입니다. 결과는 만족스러울 것입니다.”

1) 여기서 사용한 표현인 무정부는 엄밀히 말해서 개념 오용이다. 이 글에서는 배틀그라운드가 흥행하는 2017년 대통령 탄핵 이후 네티즌들이 자조적으로 한국을 무정부상태라고 지칭한 점에서 해당 표현을 인용했다. 이는 서바이벌이 대중문화 속에서 한 업계 내의 선발, 흥행을 의미하는 수준을 넘어 <배틀그라운드>에서 단독 생존 그 자체를 의미하게 된 상황을 반영하고자 하는 의도이다. 서바이벌이 단순히 룰 안에서의 경쟁을 넘어 생존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할 수 있는 이유는 비록 가상현실이지만 세계관 속에 사람들을 보호, 관리하는 국가라는 구조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2) 일본의 소설 <배틀로얄>를 어원으로 본다. 주로 1인칭 혹은 3인칭 슈팅게임에서 매 판마다 지속적인 리스폰(부활) 없이 방대한 오픈 월드맵에서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처치하고 살아남는 것이 목적인 게임 장르이다.

3) 세 게임 사이의 PC방 점유율 양상에는 경쟁관계 외에도 게임 내부의 운영 등의 다양한 요인이 작용했다.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배틀그라운드의 점유율은 201772.2%에서 8월에는 10%, 11월에는 30%를 넘기며 배틀그라운드가 다른 게임들과 차별화되는 인기를 누렸음을 보여준다. "배틀그라운드 열풍에 '오버워치' PC방 점유율 반토막", <게임메카>, http://www.gametrics.com/news/news01_view.aspx?seqid=32840 (2017.11.30.-2018.05.04 접속).

4) 이동연은 게임의 문화 코드(이매진, 2010)에서 브루디외를 인용하며 게임의 문화적 취향 또한 아비투스의 작용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5) 인게임에서는 1위 기록만 승률(Win rating)에 집계된다. 때문에 대부분의 유저들은 승률이 한 자리 수에 수렴한다.

6) ‘존나게 버틴다라고 보는 입장도 있다. 어원이 달라도 유사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7) 물론 배틀그라운드 안에서도 승리하거나 상위권으로 게임을 마치면 게임 머니와 랭크에 반영되는 점수를 얻는다. 그러나 게임 머니로 구매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의류이며 이는 게임 상의 능력치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심지어 대부분 게임 중 방탄모나 방탄복, 길리슈트를 장착하면서 외형적으로도 드러나지 않게 된다. 게다가 일부 플레이어들은 은신을 위해 악세서리를 일부러 착용하지 않는다.) 랭크 점수는 생존만 하면 되는 배틀로얄 특성상 플레이 시간만 많아도 일정 점수를 확보하기 때문에 다른 Elo 시스템이 적용된 게임에 반해 랭킹이 큰 신뢰도를 얻지 못한다. 배틀그라운드는 실질적으로 그 순간의 승리만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8) 엄기호는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창비, 2016)에서 무기력은 생존주의 시대의 역설적인 생존 전략으로 보았다. 배틀그라운드는 뭔가를 시도하고, 노력에 의한 합당한 대가를 얻는 일이 다 무용해진 사람들의 생존전략으로도 승리를 경험할 수 있게 한다.

9) 배틀그라운드 내 1(승리자)에게 주어지는 메시지가 이겼닭! 오늘은 치킨이닭!”이기 때문에 배틀그라운드 유저들은 ‘1등하다치킨 뜯었다라고 표현한다. 이 점은 한국사회의 폭력적인 육식주의와 수많은 자영업자들의 등장으로 인해 치킨집이 많아지면서 유포된 한국인이라면 치킨을 좋아한다는 푸드 이데올로기를 연상시킨다. 주입되고 왜곡된 욕망에 대한 추구라고 볼 수 있다.

10) 삼국지에 등장하는 장수 이름에서 기원했다. 배틀그라운드 문화에서 처음 등장한 용어는 아니지만, 유튜브나 트위치 등지에서는 이미 배틀그라운드 용어처럼 사용되고 있다.

11) 한국에서 게임 순위 상위권을 유지했던 <리니지>, <메이플스토리>, <서든어택>, <피파온라인> 등은 기본적으로 한국 개발사가 한국에서 서비스를 했으며, 외국 개발사에서 제작한 <리그 오브 레전드><오버워치>는 아시아 서버를 이용하더라도 한 게임에 배틀그라운드처럼 많은 플레이어를 매칭시킬 필요가 없어서 지연 시간에 의거해 물리적으로 가까운 한국인 유저를 만나는 것이 일상화 되어 있다.

12) 국내 게임 커뮤니티 사이트 인벤에서는 "[인터뷰] 스팀 1위 찍은 국산 게임... 블루홀 '배틀그라운드' 개발자를 만나다"(2017.03.29.) 게임 뉴스 사이트 겜플에서는 “[기획] 국산 게임 배틀 그라운드’, 서양 유저 열광 이유는?”(2017.03.29.) 등의 제목을 사용하였다. 출시시기로 추측해보건대 배틀그라운드의 국산강조는 개발사의 보도자료와도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13) 최영미(2016), 제노포비아 현상에 관한 연구, 다문화콘텐츠연구21, 중앙대학교 문화콘텐츠기술연구원, 109-144p.

14) 개인 인터넷 방송 플랫폼 아프리카tv’에서 배틀그라운드를 주 컨텐츠로 방송하는 ‘BJ카이저는 지속적으로 배틀그라운드 플레이어들에게 핵 사용 의혹을 받았다. BJ카이저는 해명하기 위해 컴퓨터 화면을 직접 공개하거나, 해명하는 내용을 담은 영상을 업로드하기도 했으나 결국 플랫폼에서 불법 프로그램 사용으로 방송 활동 정지 처분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한국인 플레이어들은 BJ카이저 개인을 비난할 뿐 한국인의 민족적인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15) ‘양민 학살의 줄임말로, 게임 안에서 실력이 떨어지는 상대에게 압도적으로 승리하는 경우를 뜻한다.

16) 앞선 글에서 배틀그라운드의 랭크 시스템은 무용하다고 설명했으나 전체 범위에서 최상위권 구간과 중위권 구간, 최하위권 구간 사이의 실력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다만 다른 게임처럼 촘촘하지 않을 뿐이다. 본문에서 설명하는 스트리머들은 이미 최상위권 구간의 실력을 가졌지만 더 극적인 플레이를 보여주기 위해 하위 구간에서 플레이한다. Elo 시스템에 의해 게임을 플레이하면 자연스럽게 랭크가 올라가지만 이들은 적게는 열 개, 많게는 수십 개의 계정을 돌려 사용하면서 하위 구간에서의 게임을 지속한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배틀그라운드 파트너 스트리머 눈쟁이가 직접 실험을 통해 지적한 바가 있다.

17) 개인 인터넷 방송은 시청자가 송출자에게 플랫폼을 거쳐 후원하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 이들은 특정한 플레이를 요구하고 거기에 돈을 거는 식으로 스트리머의 행동을 유도한다. 예를 들어, “1(사살)1000원 후원할게요.”라는 식이다. 이렇게 되면 스트리머들은 방송의 흥행과, 수입을 위해 실력이 낮은 구간에서 압도적인 플레이로 다른 플레이어들을 학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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