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든 뒤에야 그 향기를 그리워하다
  • 송지환 기자
  • 승인 2018.05.16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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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장의 벚나무가 온전히 녹빛이 되었다. 두어 달 전만 해도 길을 걷다보면 어깨 한 편에 연분홍빛 잎이 얹히었을 터다.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두 해째 보는 참이다. 새로운 사람들을 사귀었고, 또 사귄 만큼의 사람들을 스쳐 보냈다. 바쁘다는 핑계로 집에 연락하는 횟수가 줄었다.

 지금 걷는 기숙사 옆 가로수 길은 고등학교 때 기대했던 것과 완전히 같지도, 다르지도 않다. 그럼에도 바쁘게 남긴 발자국을 따라 많은 것들이 하나씩 하나씩 뒤에 버려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흙에 묻어나는 것들이 많아지자 길가의 가로등은 점차 어두워졌다.

‘ 앞만 보고 달려라라고들 한다. 20대가 꽤나 흔히 듣는 말들 중 하나다. 승리와 성공만을 목적의식으로 가지는 경주마가 되기를 원한다. 앞만 보며 외로이 지나간 길엔 얼마 안가 지워질 발굽 자국만이 남는다. 하지만 여전히 도서관의 불은 밤늦게까지 꺼지지 않고, 건물 밖의 재떨이는 빌 날이 없다. 나 또한 불안과 외로움을 안은 채 누군가를 밀치고 당기며 외길을 걸었다. 그 끝이 너무 희미해서 보이지 않음에도, 민들레 씨를 바람에 날리기 좋아했던 꼬마였을 적부터 그저 흘러갈 뿐인 물줄기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지나쳐 가는 모든 것들을 반짝이는 모래성 아래 묻어두었다.

 이제껏 걸어온 길 뒤편에는- 낡은 아파트의 골목 담벼락을 어루만지던 보라색 나팔꽃이 있다. 동이 트기 전의 푸른 별을 머금은 베란다 창문들이 살랑인다. 울음소리가 예뻤던 얼룩고양이의 방울 달린 목걸이가 있다. 나를 안아주길 좋아하던 귀가 처진 늙은 개의 장난감이 있다. 6년 전 아버지에게 선물로 드린 유리구슬엔 먼지가 쌓인 채 아직도 눈이 내린다. 손이 닿지 않을 만큼 멀어진 것들을 뒤로 할 때서야 나는 숨죽여 울었다.

 이른 아침의 9호선 창밖으로 풍경이 숨결처럼 흩날린다. 빠르게 지나치는 장면들 가운데엔 나에게 소중한 것들이 있을 테지만 눈치 채지 못한다. 수 백 번 만난 사람, 수 천 번 맞은 새벽공기라도 언젠가는 멀어질 것이고 추억이 되어 그리워하리라. 함께 밤하늘의 별을 세는 일 없이 앞만 보고 걸어간다면 너무나도 많은 것을 잃을 것이라고 끊임없이 되새긴다. 나는 그럼에도 말하지 못하고 또다시 삼켜버리는 미련함이다.

 운동장의 벚나무가 온전히 녹빛이 되었지만 여전히 수많은 것들이 남겨지고 잊혀져간다. 나는 발 디딜 곳이 깨어졌을 때면 잊은 것들을 뒷주머니에서 꺼내 길의 균열을 메웠다. 그러나 그 흔적마저 잊혀 사라지므로 앞에 놓인 가로수 길엔 항상 금이 가있고 난간은 녹슨 채 그대로다.

 아프고 소중한 것들이, 홍수처럼 불어나는 다른 기억에 밀려 스러져 간다. 앞만 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음에도 발치조차 뒤돌아보지 못한다. 머무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외길을 달리며 정작 내가 무엇을 포기하고 있는지 나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내 마음속에 서린 모든 꽃들이, 언젠가 시간이 흘러 시들고 나서야 그 향기를 그리워할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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