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 차도를 가로지르며 뛰어간다. 넋이 나간 채 무심하게 지켜보는 운전자 앞으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잇따라 획, 스쳐간다. 경찰관들과 건장한 조련사들이 함께 맹수를 뒤쫓는다. 그들은 버려진 가축사육장의 철망 속으로 맹수를 몰아넣는다. 그러나 허술한 철망을 찢고 튀어나온 호랑이는 다시 뛰기 시작한다. 다시 추격전! 갑자기 상황이 뒤집힌다. 호랑이를 쫓던 조련사가 호랑이에게 쫓기기 시작한다. 경찰들은 다급하게 방아쇠를 당긴다. 탕탕, 연속된 격발음과 함께 쓰러진 것은 호랑이가 아니라 조련사다. 호랑이는 한참 뒤에야 사살된다.

폴란드에서 발생한 이 사건을 나는 8시 뉴스와 9시 뉴스에서 하루에 두 번이나 보았다. ‘서커스단을 탈출한 호랑이 난동, 끝내 사살돼……’, ‘도망친 호랑이를 향해 쏜 총에 맞고 조련사 숨져…….’ 8시 뉴스가 ‘호랑이 사살’을 중심에 놓았다면, 9시 뉴스는 ‘오발탄에 의한 인명 피해’를 중심에 놓았다. 동일한 사건이 마치 다르게 느껴진다. 당연하다. 어떤 맥락에서 파악하느냐에 따라 한 사태는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건이 별개가 아님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호랑이는 호랑이임을 기억하자. 맹수는 타고난 성질을 지녔기에 그것이 아무리 잘 길들여진 것일지라도 맹수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문화의 자유·자율성은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창작자들의 산물이다. 산과 들을 누비며 살 때라야 호랑이는 그 값어치를 발한다. 그래서 동물원의 호랑이보다 어딘가에 살고 있을 야생의 호랑이를 찾는 것이다. 아이를 ‘덜 자란 어른’으로 보거나 호랑이를 ‘좀더 큰 고양이’로 보는 우를 범해선 안 된다.

본능과 명분의 격투장, 대중매체

문화권력자들은 자신의 말과 목소리, 손짓만을 따르도록 대중을 세뇌한다. 그들은 대중을 하향 평준화시킨다. 인기몰이에 성공한 작품을 모방하는 아류작들을 대량으로 쏟아낸다. 영화만 보더라도 이 경향을 쉽게 가늠할 수 있다. ‘8월의 크리스마스’, ‘편지’가 몰고 온 멜로드라마의 열풍은 아직 식지 않았고, ‘여고괴담’으로 시작된 공포영화의 세(勢)가 아직 시들지 않았다. 문학판에서도 인기작가 ‘신경숙’처럼 사적이고 내밀한 자아의 공간에 칩거하는 소설들이 주류를 이룬다. 사회적인 맥락이나 전망을 뚜렷하게 전개하는 작품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문화권력자들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 것만을 내놓는다. 그들의 보수성은 교묘하다. 대중 추수주의를 부추기는 문화권력자들은 자신들의 걸러낸 상품으로 문화 향유자의 권리를 재단·통제하려 든다.

호랑이를 가두는 일이 사회의 공익 을 위한 처사라는 대의명분과 탈출하려는 맹수의 끝없는 본능이 맞부딪쳐 빚어내는 소동들. 우리는 그러한 일을 매스 미디어를 통해 자주 만난다. 장선우 감독이 연출한 영화 ‘거짓말’의 파문은 그 좋은 실례다. 검열과 표현의 자유. 자본주의는 이 불가피한 길항(拮抗)을 악용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 갈등이 돈이 된다는 사실이다. 돈이 된다면 무조건 엉겨붙어야 한다는 것을, 자본주의에 적응한 자들은 안다. 그러나 ‘서커스단 호랑이 탈출소동’에서 얻는 한 가지 교훈, 맹수를 겨눈 총이 맹수의 조련사를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대중 추수주의에 물든 문화는 단명할 운명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지닌 감염력이란 장난이 아니다. 전염병처럼 육체를 일시에 휘어잡거나 중독증처럼 육체에 서서히 퍼져나가는 것이 대중 추수주의이므로. 이를 극복하는 길은 알맹이 없는 대중의 계몽이 아니라 고민과 모색을 통한 개아(個我)의 발현 밖에는 없다. ‘제대로’ 된 잣대가 필요하다. ‘제대로’ 되었다는 것은 문화의 한 양식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과 문화를 이해하는 자기만의 뚜렷한 관점을 소유해야 함을 동시에 가리키는 말이다. 문화는, 그 다양성과 복잡성을 소화할 능력을 지닌 사람의 것이다.

누가 호랑이를 풀어놓았는가

한 작품은 시대와 사회의 특수한 맥락에 처한 인간의 조건과 긴밀하게 연관된다. 그것이 완전히 자족적인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예술작품의 성패는 작품에 내재한 수성(獸性, 작품의 고유한 성질)과 사회적 맥락을 얼마나 매끄럽게 잇고 있는가에 달렸다. 피에르 파울로 파솔리니나 조르주 바타이유 등 별난 삶을 산 예술가들, 그러나 그들이 남긴 작품은 별나지 않다.

지금 이상(李箱)이라는 호랑이 한 마리를 생각한다. 대중의 몽매주의에 희생된 불세출의 시인 이상 같은 호랑이는 오늘 없는 것일까. 시대는 언제나 길들지 않은 호랑이를 잡아 죽여야만 하는 것인가. 김민수 교수의 ‘멀티미어 인간, 李箱은 이렇게 말했다’(생각의 나무 刊)나 영상문화잡지 ‘트랜스’(씨앗을 뿌리는 사람 刊)에 실린 월터 K. 류의 논문, <이상의 작품에 나타난 활동사진과 공동체적인 동일시>를 읽어 보라. 그러면 식민지 시대의 몰이해 속에 파묻혀 있던 예술가 이상이 얼마나 깊은 고민과 다양한 모색으로 자신의 수성(獸性)을 표출해내는지 알게 될 것이다.

‘서커스단 호랑이 탈출소동’에서 “묻지마!”로 빨간 줄이 쳐진 사항이 있다. ‘누가 호랑이를 풀어놓았는가?’란 물음이다. 서커스단은 동물보호론자들의 의도적인 소행이라고 주장하고, 경찰들은 서커스단의 과실이라고 의심한다. 경찰 당국은 범인 색출에 혈안이 되어 있다. 그러나 열심히 찾아봐라 이 물음이 불문율에 붙여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테니. 자신의 내부에 숨어 있는 호랑이를 모른 척 하는 자들이여, 철망을 찢고 나와 산과 들을 향해 내달리는 호랑이를 누가 풀어놓았는지 먼저 자신에게 물어 보라. 그래,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리는가? 누가 거리에 호랑이를 풀어놓았다고 하는가?

고원효 <문화평론가>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