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이 교육의 영역에서 다루어진 최초의 사례는 현철과 이구영이 1924년 한
국 최초의 배우 학원이라 할 수 있는 `조선배우학교'를 개설하면서 부터이다.
광대들의 천한 짓거리나 사당패의 놀음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았던 당시의
현실에서 나타난 예술교육기관의 설립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후 193
1년 `극예술연구회'라는 연극 강습생 제도가 있었고, 전문학교로서는 1953년
서라벌 예대가 그 최초였다. 그러나 연극이 학문의 영역에서 자리잡힌 것은
1959년 중앙대학을 위시해서 동국대, 한양대에서 1년간격으로 `연극영화학'
이라는 학문적인 아카데미즘의 전통을 이어나가면서 부터이다. 학문적인 이
론의 뒷받침 없이는 어떠한 예술행위도 단순한 모방을 넘어서지는 못하기 때
문이다.

이승규. 그는 중앙대의 창설과 함께 꾸준한 작품세계를 펼쳐나가고 있다.
1939년 공주 태생인 그는 공무원이셨던 부친의 직장 때문에 자주 옮겨다니면
서 성장한다. 이러한 잦은 이사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방랑의 기질과
인간을 한발짝 멀리 떨어져 관찰을 하게 만드는 기질을 만들어 준다. 문학
소년이었던 그는, 한글 교육 1세대로서 왜정 시대의 후유증이 진하게 남아
있었던 당시로서는 자연스레 계몽주의 예술사조를 흡수하게 된 문학 보다는
좀더 대중적인 연극 영화를 생각하게 된다.

때마침 창설하는 중앙대에 입학하게 되고 당시로서는 황무지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극단 `가교'를 만들게 된다. 카톨릭 재단의 후원을 입고 서민들을
계도하기 위해 계몽극을 만들어서 전국을 돌면서 순회 공연을 한다. 기생충
을 박멸하자거나 노름을 하지 말자등의 다분히 구호적인 이슈들을 연극으로
표현하면서 연극이 가질 수 있는 목적성을 깨닫는다.

그가 중앙의 무대에 데뷔한 것은 1968년 명동예술극장에서 올린 이근삼의
`몽땅털어 놉시다'란 작품을 통해서이다. 혼란했던 당시의 사회상을 신랄한
풍자와 위트로서 그린 이 작품은 일주일 공연에 1만명을 동원하는 성과를 거
둔다. 당시 연극인구가 2만명 정도의 수준임을 감안할때 이것은 대단한 숫자
라고 기록된다. 이어서 뒤렌마트의 `노부인의 방문'을 통해서 예술성과 무대
를 활용하는 신선함 등이 화제가 되면서 동아 연극상 신인 연출상을 받는다.
그가 끊임없이 작품을 올렸던 70년대는 경제 개발 5개년 계획과 맞물려 새
마을 운동의 구호처럼 계몽극을 주로 올린 시기였다. 군부대와 부녀 보호소
와 고아원 그리고 전국 각지의 중고등학교를 돌면서 유랑 극단처럼 돌아다니
면서 가난하게 그리고 줄기차게 연극을 하였다. 그만큼 그 시대에 연극을 한
다는 것은 현실의 고통과 담을 쌓고 몰입해야 하는 힘들었던 시기였던 것이
다.

계몽극과 더불어 이들이 관심을 기울인 것은 종교극이었다. 기독교 시청학
위원회 아래에 성주위원회의 도움을 얻어서 종교적인 이야기들을 연극으로
만들어 근근히 생활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이때의 멤버들이 박인환,
최주봉, 윤문식, 김동욱, 김진태 등으로 지금은 어느정도 위치를 확보한
이들이다.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주된 흐름은 연극이 대중을 이끌어야 하는 사명감과
함께 사회에 대해 거침없이 발언해야 하는 현실인식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근삼, 이강백 같은 극작가와의 작업을 통해서 나타난 현실에 대한 발언은 눈
여겨 볼 대목이다.

79년 대한 민국 연극제에서 `개뿔'이라는 작품에서 모든 대사를 삭제한다.
그리고 민중을 해방시킨 예수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대항한
다. 독재자에게 한마디의 말도 없이 90분간을 몸짓만으로 이후 10.26사태가
일어나고 작품의 예감처럼 박정권이 무너진다.
이후 혼란한 현실을 뒤로하고 그는 80년 뉴욕으로 훌쩍 떠난다. 공부를 하
기도 하지만 10년 이상을 머무르면서 아예 정착을 한다. 틈틈히 국내에 와서
연출 작업을 했지만 여전히 그의 주거지는 뉴욕이었다.

그가 다시 국내에 정착한 것은 1994년 `인천시립극단'을 맡으면서 부터이
다. 이후 그의 주된 관심은 비언어적인 방법론에 귀착해 있다. 언어의 장벽
을 뛰어넘는 연극의 본질 즉, 형식미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표현양식을 탐구
하고 있다. 거기에다가 우리 민족 고유의 심성을 보편적인 것으로 끌어 올리
는 작업에 깊이 정착하고 있다.

김 은 균<연극석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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