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사관을 극복한 조선 향촌과 하부구조 해명(김용덕, 사학과 명예교수)

한국사에서 민중의 모습은 무엇인가. 해방후 한국사학계의 과제는 일제에 의해 널리 퍼진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주체적인 사관을 성립하는 것이었다. 민중의 모습을 끊임없이 연구하여 주체적 사관성립에 단초를 제공한 김용덕 교수. 사실 김교수가 중앙대 김호일 교수와 함께 ‘향촌사회연구회’를 주도 했던 1983년만 하더라도 ‘향청’이나 ‘경제소’에 대한 연구는 미흡한 실정이었다. 그러나 김교수는 향악 연구로 조선시대의 민중생활사의 일부인 촌락과 자치조직의 연구를 지속적으로 행하였고 ‘향청연구’는 조선사회의 기층구조와 하부구조의 실상을 밝히고자하는 주체적인 시각에서 지속되었다.
결국 김교수의 끊임 없는 관심은 신분제 사회라는 조선사회의 한계 때문에 문헌위주의 하부구조에 관해서는 문헌 연구가 어렵다는 한계를 현지답사와 자료수집에 의해 극복하였고 마침내 향악에도 ‘향규’ ‘향약’ ‘동계’ ‘주현향약’ 등 서로 다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밝혀냈다. 또한 ‘촌재’의 존재를 밝혀냄으로써 이른바 중앙집권적인 지배 구조 이외에도 하부구조가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주지시켰다. 그리고 그의 저서 ‘향청연구’(78년 한국연구원 간행)는 지금가지 전공자를 비롯한 연구자에게 고전으로 널리 읽히고 있다.

민요연구로 민중의 목소리 ‘복원’ (임동권, 민속학과 명예교수)

'북에 고정옥 선생이 있다면 남에는 임동권 선생이 있다’고 할 정도로 임동권 교수의 업적은 민속학 분야에 뚜렷한 궤적을 남겼다. “50년대는 임동권 교수의 독무대였습니다” (김선풍, 문과대 민속학과 교수)의 말처럼 민속학 연구하면 임동권 교수의 업적을 빼 놓을 수 없는 것이다. 사실 고정옥, 주왕산, 손진태의 연구를 제외하고는 모두 자료집 출간으로 귀결되었던 40년대의 연구는 많은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50년대 임동권 교수는 기존의 이론위주의 방법만이 아니라 전국 국민학교를 대상으로 하는 민요수집 운동등의 실질적인 ‘육성 담기 운동’과 수집된 자료를 주제별·내용별로 재구성하는 방법으로 학문적인 성과를 구축하였다. 그의 노작 한국민요집(전7권. 집문당 간행)은 총면수 4천3백여 페이지에 수집된 민요도 4천3백여편이 넘는 대작으로 꼽히고 있다.

한국문학 평론계의 거장
(백철, 문과대 국문학과 교수)

“백교수님은 한국 평론계의 거성입니다. 평소 성품은 소탈하셨지만 비평을 할 때에는 냉담하시면서도 매서운 필치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백교수님의 제자였던 이명재 교수(문과대 국문학과 교수)는 이렇게 백교수를 한국문학사상 가장 강직한 평론가였다고 말한다.
전통문학의 기반 위에 서양문학의 장점을 부가하여 경쟁하려던 백철교수, 한국문학을 세계문학으로 바꾸기 위해 비평의 강도를 늦추지 않았다.
일본 나프맹원으로 활동하다 귀국 후 백교수는 제3차 카프 검거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루는 등의 과정을 겪으면서 마르크스주의 문학에서 인간탐구 문학으로 전향하기도 한다. 한국의 주체적인 비평세계를 연구하는 그의 정열은 중앙대 교환교수 시절 미국의 하버드대에서 세계적인 석학들에게 인정받기도 했다.

서지학의 대가
(심우준, 문과대 문헌정보학과 교수)

“공부하나로 평생을 사신 분이죠. 심우준 교수님이 오심으로써 중앙대 서지학이 최고가 된 것입니다” 이두영교수(문과대 문헌정보학과)가 말하듯 심교수는 서지학 분야의 대가로서 중앙대의 명예를 드높인 석학이다.
1988년 ‘해외소재 한국 고판본 조사연구’라는 방대한 작업을 시도. 심우준 교수는 이 연구 결과로 ‘일본방서지’(한국정신문화원 간행)를 펴내 국·내외 학자로 하여금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이는 일본의 관내성 서륙부와 동양문고, 국립국회도서관, 경융대학 등 일본내 15곳의 자료보관실에서 무려 4백60여종의 한국판 활자본과 목판본을 수록함으로써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 없던 1백여종 이상의 책과 일본에만 있는 4백여종, 우리나라에는 있지만 질적으로 문제가 제기되는 6종을 집약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민중의 시각으로 한국경제를 본다
(유인호, 정경대 경제학과 교수)

한국의 자본축적에 있어 외세에 의존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인가? 유인호 교수는 ‘아니다’라고 맞섰다. 일제의 식민지배는 경제성장 이면에 민족수탈의 악재가 위험수위에 달하였고 60년대의 경제성장은 외채부담면에서는 외자도입현상에 다름아니다는 것. 유교수에게는 고도성장의 맹신주의에 빠져있던 70년대 역시 민주적 권리가 봉쇄되고 부정과 부패가 자본축적에 이용되는 용서받을 수 없는 시대에 불과하다. 그가 주목했던 것은 가시적인 경제성장이 아닌 민중과 민족을 위하는 경제성장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사상이 반영된 것이 84년 쓰여진 ‘민중경제론’(평민사간행). 그의 민중적인 입장은 한 사회에서 직접적인 생산자이면서도 그것을 향유하지 못하는 피억압자의 한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다. 이러한 이론이 파시스트 정권하에서 허용되는 것은 무리일 터. 유인호 교수는 김대중사건과 연관되어 8년 가까운 시기를 옥중에서 보냈다.
그러나 “감옥에서 나온 후 다시 중앙대에 복직하시면서도 학문적 성향은 변함없으셨지요”라는 박승교수(정경대 경제학과)의 말처럼 그의 선비정신은 변하지 않았다. 유인호 교수의 “먼 훗날 민족과 역사를 거울로 열심히 살아간 사나이로 남을 수만 있다면 무엇을 바랄 것인가”라는 말은 제자들의 가슴속에 살아남아 사후 몇 년이 지나도록 이어지는 추모행렬로 나타나고 있다.

한민족 춤사위로 민족의 특질 파악
(정병호, 예술대 무용학과 명예교수)

“임동권 박사가 국문학의 측면에서 민속학을 정립한 사람이라면 정교수님은 민속예술 부분에서 민속학을 정립한 독보적인 사람입니다”라고 김긍수 교수(예술대 무용학과 교수)는 말한다. 사실 ‘무용은 사치스러운 것이다(?)’ 의문부호가 찍혀지는 이 말은 정교수가 한국무용을 연구하던 시기의 통념이었다. 당시 정교수가 주목한 것은 민속무용 속에 꿈틀거리는 서민의 모습 이었다. 계층상의 차별이 존재하기에 자료수집은 어렵기만 했다. 그러나 현장을 찾아 민속문화를 발굴하고 그 특성들을 체계화 한 것만 30년.
‘한국의 민속춤’,‘춤추는 최승희’ ‘한국의 민속무용’ 등 총 25권에 달하는 저서와 논문은 당시 학계의 흐름을 ‘우리것’으로 되돌아오게 하였다. 정교수의 연구 결과 이방매(승무·살풀이 춤), 박병천(진도 씻김굿), 공옥진(일인 창무극·병신춤) 등의 기능보유자들을 인간 문화재로 지정하고 소리춤, 봉산탈춤 등을 무형문화재로 선정하게 했다.

한국근대번역문학의 ‘횃불‘을 밝혀
(김병철, 문과대 영문학과 명예교수)

“그동안 20년의 세월이 흘러 나의 젊음과 기력은 4권의 책으로 변해버렸다. 말하자면 나는 반생을 이 책 속에 불 살라 버린 것이다”
김병철 교수는 한국영문사연구를 위한 선행 작업, 번역문학자를 위한 작업, 유실되기 쉬운 자료를 보관하려는 작업을 위해 ‘한국번역문학사 연구’(75년 을유문화사)를 간행함으로써 이미 학계에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중앙대의 석학이다. 김교수가 이 책을 지은 것은 한쪽 시력을 잃은 상태. 이후의 연구성과를 집약하여 서양문학이입사연구를 펴내기까지 자료조사만 10여년이 걸릴 정도.
현재까지 그의 연구는 지극히 단편적인 논의가 진행되었던 50년대 초부터 6·25동란으로 흩어졌던 비교문학연구 논의가 다시금 불기 시작하는 70년대를 지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비교문학 연구자에게 중요한 지침이 되고 있다. 실증성을 바탕으로하는 체계적인 자료정리를 이루어 냄으로써 비교문학은 물론 한국문학에 중요한 궤적을 남기고 있다. 김교수는 말한다.
“일제시대라서 우리말을 통해 세계문학을 읽을 수가 없었어. 하지만 일본말로 된 것을 정리하면 안되잖아”라고.

위생약학의 시발점
(손동헌, 약대 위생제약학과 명예교수)

“일본의 이따이이따이 병이나 미나마타 병을 손교수에게서 처음 들었어. 지금은 고등학교에도 나오지만 당시로서는 알 수 없었거든”이라는 유목상 교수(문과대 국문학과 명예교수)의 말처럼 20·30년 전만 해도 생소한 병이 환경에 의한 병이었다. 환경에 대한 인식 자체가 부재하였던 것이 당시의 학계 풍경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을 앞서간 것이 손교수의 위생약학연구. 국내 뿐 아니라 연수와 공동 연구로 잦은 일본행을 자처하던 손교수는 일찍이 환경분야와 약학분야를 접목시키는 노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홍문화 교수는 “손교수는 우리나라에서 위생약학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열렬히 주장하며 약학대학의 분과 중에서 위생약학과를 신설하려 했다”며 자신의 연구를 중앙대학의 발전과 함께 생각했다고 개탄한다.
이제 환경 문제는 더 이상의 중요성을 언급하는 것이 진부할 정도로 부각되고 있다. 그리고 손교수가 조력하였던 위생약학 분야 역시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은 해가 거듭될수록 분명해 지고 있다.

전통음식문화를 ‘세계 속으로’
(윤서석, 생활대 생활영양학과 명예교수)

우리가 먹는 죽의 종류는 얼마나 될까. 윤교수에 따르면 흔히 즐겨먹는 흰죽, 잣죽, 호박죽에서부터 붕어죽, 연뿌리 가루죽 등 전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죽에 이르기까지 31종류에 달한다. 어찌보면 무슨 죽의 종류를 연구할까 하겠지만 사실 윤교수가 연구하는 분야는 음식문화 중에서도 전통음식 문화이다.
음식문화에 대한 연구는 생활사적 측면의 작은 연구로 여겨져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윤서석 교수의 음식문화연구는 역사적 자료를 바탕으로 고유식품의 종류별 구분과 조리법의 해설까지 다양한 분야를 집대성 한 노력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고 기존의 관념들을 깨는데 큰 역할을 했다.
실제로 음식문화 분석을 위해 역사적인 기록들과 고고학적인 발굴조사는 물론 외국의 음식문화에 대한 방대한 내용들은 한국식품사 연구(85년 신광출판사) 간행으로 이어졌으며, 식품사를 전공하는 학생은 물론 비교문화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널리 읽혀온지 오래다.
또한 평민을 위한 생활기술을 뜻하는 제민요술(1993년)은 윤교수와 뜻을 같이 하는 학자들의 연구 결과로 한국 고대 음식 문화를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초파리 진화 설명 진화된 학문 이끌어
(이택준, 자연대 생물학과 명예교수)

유전자 조작 식품의 위협에서 복제인간에 이르기 까지 이제 생물의 진화 문제는 과학계의 관심만은 아니다. 현대의 진화 연구는 형태상의 문제를 넘어 행태, 지리, 발생학 등의 다양한 통합의 문제로 연구 영역이 넓어 졌으며, 초파리는 세계적으로 1천50종 이상의 다양한 종을 가지고 있어 진화학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쓰여왔다.
초파리 교수로 불려온지 30년. 마침내 이교수는 최초로 13종의 초파리 신종을 발견하고 한국산 초파리 115종을 분류, 그 특징과 목록을 체계화 시켰다. 이러한 노력은 원시종과 파생종을 명확히 밝히게 하였으며, 그 가치는 이미 국내외에서 인정받은 바 있다.
더욱이 이교수가 쓴 ‘초파리의 진화’(93년 중대 출판부)는 국내에서는 유일한 것으로 당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주요한 명저로 꼽히고 있다. 그의 연구는 단순한 초파리 연구가 아니라 생물진화를 설명하는 단초를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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