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와 의료뿐만 아닌 이젠 바둑과 법률까지, 만능 인공지능의 시대가 도래했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영역도 가능케 하고 심지어 인간보다 뛰어난 추리력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처럼 점점 발전해 가는 과학기술에 따라 직업은 만들어지고 사라진다. 그러나 오랫동안 사람의 곁에 남아있을 업이 있다. 소방관이다. 1%의 가능성으로 때론 그마저 없어도 무거운 장비를 맨 채 불길 속으로 뛰어든다.
 
 
  심재빈 소방서장은 매일이 전쟁터와 다름없었던 31년 동안 불길을 적으로 삼고 최전방에서 싸워 왔다. 어떤 이의 은인이 되기도 하고, 또 어떤 날에는 미안함과 부채감에 시달렸다. 그렇게 30여 년을 소방관으로 살며 두려운 날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오른쪽 태극마크를 어루만졌다. 

  -정년 퇴임을 앞두고 있다고.
  “소방공무원으로서 일한 지 벌써 31년이 됐네요. 내년이면 법적 정년퇴직 나이인 60살인지라 곧 공직을 떠나게 된답니다.”

  -마음이 싱숭생숭하겠다.
  “제 인생의 절반은 국민의 안전을 지키며 살아왔잖아요. 개인적으로 상당히 의미 있는 삶을 살았다고 자부해요. 또 부족할지 몰라도 최선을 다해 공직자로서 일했기 때문에 아쉬움이나 여한은 없습니다. 마지막 남은 1년의 기간에도 경기도민을 위해서 봉사하고 싶어요.”

  -지금은 소방서장직을 역임하고 있지만 현장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열혈 소방관이라고 들었다.
  “2013년에 소방서장으로 진급하게 됐는데요. 직장 생활 대부분은 현장업무를 했죠. 물론 지금도 큰 재난이 발생하면 활동복으로 빠르게 갈아입고 출동해야 해요. 사실 소방공무원이라는 직업이 현장하고 떼려야 뗄 수가 없답니다. 편의상 현장 업무와 행정 업무로 구분한 것이죠. 모든 소방공무원은 항시 대기 상태라고 보시면 돼요.”
 
  실제로 심재빈 소방서장과 인터뷰를 진행하는 도중에도 무전기가 여러 울렸고 긴급 출동 방송이 흘러나왔다. “기자님 많이 놀라셨나 봐요? 저는 30여 년을 소방관으로 살다 보니 어느덧 이런 출동 방송들이 익숙해졌어요. 자연스러운 일상이죠. 아무리 신중한 회의를 하고 있더라도 어떤 말을 하는지 다 들린답니다. 하지만 사고의 규모에 따라 출동하는 대원들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모든 대원이 움직이는 건 아니에요. 인터뷰 계속해서 이어가셔도 돼요.(웃음)”

  -지금도 어딘가에는 소방관의 손길이 필요한 이들이 있다.
  “그렇죠. 매 순간 어딘가에서 위험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요. 광명시만 해도 작년 기준으로 하루에만 화재가 1.8건, 구조 8.9건, 구급이 42.4건이 발생했어요. 만약 경기도에 있는 모든 소방서의 활동 기록을 더 한다면 어마어마하겠죠.”

  -긴장의 연속이겠다.
  “여차하면 현장으로 바로 출동해야 하니까요. 개인 자가용에도 화재현장에서 입는 방화복을 싣고 다니는 걸요.(웃음)”

  -정말 ‘24시간 대기조’다.
  “근로기준법에 따라서 3교대를 하고 싶지만 현실이 녹록지 않아요. 소방관의 수요는 인구수에 비례하잖아요. 특히 경기도 인구는 약 1만3000명이기 때문에 많은 소방관이 필요하죠. 조금씩 소방관 수가 증가하고 있지만 시민들이 만족할만한 인원을 아직도 확보하지 못했어요. 그러나 재난은 때를 가리지 않고 발생하기에 대원들의 업무 부담이 클 수밖에 없죠.”

  -소방관은 개인의 삶을 보장받지 못하는 거 같다.
  “아쉽지만 점차 발전하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점차 복지국가로 나아가고 있잖아요. 복지국가의 첫발은 ‘국민의 안전’이니까요.”

  -그랬으면 좋겠다. 안 그래도 ‘소방관 국가직 전환추진’은 숙원 정책 아닌가.
  “소방공무원은 지방직이기 때문에 각 지방의 경제 수준에 따라 차이가 있어요. 제 근무지역인 경기도는 화재 현장에서 목장갑을 끼게 되거나 장비를 사비로 구매해야 하는 열악한 상황을 겪지 않았어요. 하지만 아직도 몇몇 지역의 근무 환경은 열악하더라고요.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다행히도 많은 국민이 관심을 보여주셔서 점차 나아지고 있어요.”
 
▲ 오랜 시간 쌓은 풍부한 경험으로 빠르게 현장을 진두지휘하는 심재빈 소방서장.
  소방관은 지난 3년 연속 존경받는 직업군 1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그들이 겪는 처우나 현실에는 아직도 어려움이 많다. “소방은 장비가 없어서는 결코 안 되는 업무잖아요. 또 험하게 사용하기도 하고요. 한겨울에 화재가 발생하면 1만톤의 물을 싣고 예열 없이 빨리 달려야 해요. 그러다 보면 엔진이 금방 고장 나게 되죠. 장비를 아끼려다가 골든타임을 놓치면 누가 책임지나요.”
 
  -실제로 골든타임이 지나 수습할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많나.
  “‘만약 우리가 골든타임 내에 사고 현장에 도착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생각을 소방관이 된 후로 줄곧 해왔어요. 골든타임을 놓쳐서 더 큰 피해를 가져왔다 거나 더 많은 인명을 살리지 못했다는 자책은 어쩔 수 없는 거 같아요.”

  -한국의 차량문화 때문에도 불편한 점이 많다고.
  “저희가 더 열심히 하는 게 우선이겠지만 차량문화의 문제점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모세의 기적’이라고들 하잖아요. 실제로 그런 기적이 일어났으면 좋겠는데…. 우리나라 교통법상 소방차는 중앙선을 넘을 수 있다는 특례법이 존재해요. 하지만 ‘착한 사마리안 인의 법’은 존재하지 않죠. 혹여 교통사고가 나게 된다면 모든 책임을 소방서에서 져야 한답니다. 그래도 성숙한 사회의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어요. 계속해서 안전에 대한 국민의식도 발전하고 있으니까요.”

  -발전하고 있다는 걸 피부로 느끼나.
  “네. 실제로 소방캠페인을 요구하는 기업이나 관공서 및 단체가 늘어났어요. 또 형식적으로 진행됐던 옛날과 달리 실질적인 대피 방법을 배우고자 하고요. 아무래도 ‘4ㆍ16 세월호 참사’ 이후 안전에 대한 생각이 변화한 거 같습니다. 많은 국민이 큰 트라우마를 겪었잖아요. 우리나라가 이렇게 안전 불감증이 심하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죠. 숭고한 희생이 남긴 아픈 상처이자, 슬픈 교훈입니다.”
 
  화재 현장에선 누군가의 영원한 소방 Hero, 열혈 소방관이지만 또 누군가에겐 엄마, 남편, 아들, 딸이기도 한 그들. 타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위험에 노출하기에 가족들은 하루가 멀다고 불안을 떨칠 수가 없다. 때때론 오늘의 동료를 내일이면 보지 못할 수도 있기에 지휘관은 대원들의 생명도 지켜야 한다. 그렇기에 더 무거운 책임감을 지고 현장으로 출동한다. “지휘관은 시민들뿐만 아니라 대원들의 생명도 지켜야 합니다. 그렇기에 이중의 책임감을 지게 돼요. 그래서 더 고독하고 경험이 많이 필요한 자리죠.”
 
  -소방관은 체력, 정신력, 노력 삼박자를 모두 갖춰야 한다고 들었다.
  “맞아요. 특히 지휘관이 되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해요. 오랫동안 쌓은 경험도 요구되지만 다양한 사건·사고들을 공부해야 하거든요. 불이 났을 땐 뭐부터 해결해야 할지 항상 마인드 컨트롤 하는 거죠.”

  -그러면 감정적인 동요가 덜 한가.
  “그것보다는 현장에서 빠르게 최선의 방법을 생각해낼 수 있죠. 소방관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현장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뛰쳐나온 경험이 있어요. 화재로 인해 건물이 붕괴하기도 하니까요. 이런 돌발사태를 막기 위해 지휘관은 구조 가능 시간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재빠르게 판단해야 합니다.”

  -지금도 소방관으로서 첫 출동이 기억나는가. 
  “글쎄요. 아무래도 소방관복을 처음 입었을 때 어설펐던 점이 많았겠죠. 하지만 겁은 없었던 거 같아요. 오래 군대 생활을 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집단생활, 단체행동에 익숙했거든요. 그리고 군인과 소방관이 하는 일에 공통점이 많잖아요. 애국심이 투철해야 한다던 지, 무언가를 상대해야 한다던 지…. 아무튼 소방관은 제 적성에 딱 맞는 거 같네요.(웃음)”

  -천직인가. 
  “그런가 봐요. 한평생 소방관이란 딱 한 가지 직업만 가졌으니까요. ‘천생 소방관’이 따로 없네요”

  -언제부터 소방관이 되고 싶었나.
  “처음에는 투철한 직업의식이 있었던 건 아니었어요. 그냥 소방공무원이라는 직업이 제게 열려 있었고 자연스레 선택한 거였죠. 하지만 직장생활을 하면서 많은 전율을 느꼈어요. 화재 현장에 도착해 불을 진압하고 생명을 구하면서요. 수억과도 바꿀 수 없는 희열감을요.”

  -대단하다.
  “그래도 꼬맹이 시절부터 용기 있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어린이치곤 겁이 없었거든요. 맨손으로 닭을 잡을 정도로요.(웃음)”

  -평소 달변가로 유명하다고 하던데.
  “워낙 성격이 외향적인 편이라서 그런가 봐요.(웃음) 안 그래도 오늘 기관장 모임에 다녀왔어요. 광명시장, 경찰서장 등의 각 기관의 장들과 만나서 유대관계도 쌓고 필요시에 서로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협력하는 거죠. PR이 중요하다고들 하잖아요. 매사에 광명소방서를 위해서 PR을 하다 보니 말 잘한다는 이야기도 듣네요.”
 
 
  그는 84년에 중앙대 경제학과에 입학했지만 97년에 학사모를 벗었다. 입학에서 졸업까지 장장 13년이란 세월이 흐른 것이다. “본래부터 대학을 늦은 나이에 갔어요. 27살에 중앙대 경제학과에 진학했죠. 당시 이미 소방관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어서 야간대학을 다닐 수밖에 없었어요. 늦은 나이에 학업과 직장을 병행하려니 쉬운 일은 아니었죠. 그렇게 졸업을 하기까지 13년이 걸렸네요.”
 
  -경제학과 소방관의 연결고리를 찾기 힘든데.
  “경제학과 소방학은 계보가 조금 다르긴 하죠?(웃음) 제 대학 동기들은 대부분 은행, 증권회사같이 전공과 관련된 직업을 가진 경우가 많아요. 둘의 계보는 다를지라도 경제란 효율성을 추구하는 학문이잖아요. 아끼고, 절약하고 등 직장의 업무에서도 많이 도움이 되는 거 같아요. 특히나 소방서장직을 맡기 위해 꼭 필요한 덕목인 거 같기도 하고요.”

  -졸업하기까지 강산이 변하고도 3년이 걸렸다.
  “그러니까요. 대학 4년 차 때 직장 업무가 너무 바빴어요. 그래서 한 학년을 남기고 직장에 매진해야 했죠. 그동안 열심히 진급도 하고, 결혼도 했답니다. 그러다 아내가 대학을 졸업하는 게 어떻겠냐는 조언을 해줬거든요. 저도 학업에 대한 매듭을 제대로 맺지 못해 아쉬움이 있었고요.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중앙대에 주간으로 재입학하게 돼 1년 동안 채우지 못했던 남은 학점을 다 채웠답니다. 벌써 20년이 지난 일이네요.”

  -중앙대에서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무엇보다 제 졸업식이 가장 인상 깊어요. 제가 중앙대를 졸업하던 날은 집안의 경사였어요. 제 아내와 아기들까지 모두 참석해서 축하해줬거든요.”
 
  참혹한 현장을 자주 목격하는 소방대원들은 흔히 ‘직업병’처럼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증상을 경험한다. PTSD로 인해 자살한 대원들이 현장에서 순직한 대원들의 6배일 정도다. “주변에 PTSD로 고생하는 대원들이 종종 있어 안타까워요. 그럴 때면 서장의 역할이 더 요구돼요. 상사로서 헤쳐 나갈 방법을 알려주고 용기를 심어줘야 하니까요. 뒤에서 서장이 든든하게 지키며 믿음을 준다면 대원들이 더 자신감 있게 활동할 수 있겠죠.”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다면.
  “아마 경기도에서 일어난 큰 재난 현장엔 항상 투입됐던 거 같아요. 많은 인력이 필요하니까요. 그중에서도 ‘궁평항 씨랜드 참사’와 ‘예지학원 화재 사고’는 아직도 잊히지 않아요. 희생자들이 유치원생, 청소년이라 더 마음이 아팠어요. 내 손으로 고귀한 생명을 구했다면 좋았을 텐데, 조금이라도 일찍 갔다면 그들을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부채감이 있어요.”

  -항상 마음에 새기고 있나 보다.
  “소방관의 유니폼 우측엔 태극기가 있어요. 국가대표, 소방관, 군인 등 태극기를 붙이고 일하는 직업이 별로 없어요. 제가 생각하기에 태극기를 붙이는 이유가 두려울 때 태극기를 바라보거나 만져보라는 의미 같아요. 소방관의 임무를 충실히 하는 게 애국이라고 봐요.”

  -애국심이 뛰어나다.
  “저희의 가장 큰 임무니까요. ‘소방공무원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킴을 목적으로 한다’고 소방기본법 제1조에도 나와 있답니다.”

  -소방관을 영웅이라고 부르곤 한다. 곧 영웅직을 은퇴하는데.
  “영웅이라. 소방관도 평범한 시민인걸요. 공직자로서 소임을 다 한 후에는 전원생활을 시작하려고요. 저희 부모님이 혈혈단신으로 월남하셔서 일가친척이 하나도 없었어요. 어릴 적엔 명절에 할머니를 뵈러 시골에 가는 친구들이 정말 부러웠죠. 전 여태껏 수도권을 벗어나 본 경험이 없거든요. 이제 오랫동안 제가 꿈꿔왔던 일을 해볼 예정이에요. 상추와 쑥갓을 키우며 노후생활을 보내려고요.(웃음)”
 
  당신에게 중앙대란?
  “중대신문과 인터뷰를 한다고 해서 지난 제 대학 생활을 다시 떠올려 봤어요. 늦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한 것도 모자라 10년이 넘어 졸업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도 생각나고요. 또 지금까지도 죽마고우로 지내는 대학 동기들과 보낸 젊은 날의 청춘도 기억나네요. 야간 대학이다 보니 이미 직장을 가진 학생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보통의 같은 학년들보단 비교적 주머니 사정이 넉넉했거든요. 매일 수업이 끝나면 학교 앞 돼지 불고기 집에서 우정을 쌓고 어쭙잖게 시국 이야기도 하면서요. 나름대로 파란만장했답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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