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캐스터 1세대’, ‘4대 천왕’, ‘3대장’, ‘사이다’…. 20여년 동안 프로야구를 중계해온 베테랑 캐스터 임용수를 수식하는 별칭이다. 1997년 한국스포츠TV에 입사해 SBS, XTM 등의 방송사를 거쳐 현재는 Sky Sports의 대표 캐스터로 활동하기까지 한 번도 마이크 앞을 떠난 적이 없는 그. 트레이드마크인 ‘샤우팅 창법’과 특유의 재치 있는 입담을 무기로 오늘도 현장을 누빈다.
 
 
  야구는 인간미가 있는 스포츠
  우리의 인생과 닮아있어
 
  언젠가 마이크를 놓게 된다면
  사람 냄새 나는 캐스터로 기억되고 싶다
 
 
   “오! 좌측! 멀리 갑니다! 
    간다! 간다! 간다! 
    홈~런! 투런!”
   “3루! 3루! 홈~오오오옴런!”
                      
  임용수 캐스터가 수십 년간 프로야구장을 떠나지 않는 가장 큰 까닭은 본인이 열성 야구팬이기 때문일 것이다. “왜 야구를 좋아하냐고요? 야구에는 인간미가 있잖아요.” 임용수 캐스터는 그 예로 빈볼(Bear ball)을 언급했다. 일방적으로 이기고 있는 경기임에도 상대팀을 고려하지 않고 지나치게 세리머니를 하는 선수에게 날리는 경고로 빈볼이 나가곤한다. 결과보단 배려와 존중을 우선시하는 모습이 야구가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다.
 
  -한창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다고 들었다.
  “지난 3월에 프로야구 시즌이 시작되고 선수들 못지않게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어요. 경기 일정에 따라 함께 움직이느라 이런 인터뷰 약속을 잡기도 힘들어요. 무엇보다 시즌이 돌아올 때마다 급격히 늘어나는 업무량으로 몸이 많이 혹사당하고 있어요.(웃음)”
 
  -중계방송은 보통 3시간 남짓 아닌가.
  “하루에 보통 5경기가 치러지는 데 전 그중 한 경기만을 담당해요. 제가 중계한 경기를 제외한 나머지 경기들을 살펴보고 결과를 스코어북에 정리해야 해요. 한 시즌이 끝날 때까지 모든 구단의 경기 스토리를 파악하고 있어야 하거든요. 프로야구를 중계하고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습관처럼 해오던 일이죠. 그리고 사회·정치·문화 등의 뉴스를 살펴보고 중요한 이슈를 체크하는 등 오전 내내 자료 정리만 해요. 마지막으로 경기 전에 선수와 코치들을 만나서 인터뷰를 하고 나면 본격적인 중계방송이 시작되죠.”
 
  -한 시즌이 끝날 때까지 똑같은 생활의 연속인가.
  “네. 3월부터 11월까지 쳇바퀴 구르듯 반복되는 생활을 해요. 시즌이 끝나면 스프링 캠프 중계를 하고요. 그리고 겨울이 되면 농구 중계도 하죠. 그냥 1년 내내 달린다고 보시면 돼요.”
 
  “이 스코어북을 보면 지난해 10월에 있던 경기도 마치 어제 있던 경기처럼 얘기할 수 있어요. 누가 얼마나 점수를 냈고, 그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갔는지까지. 항상 지니고 다니면서 세세하게 기록해놓으면 나중에 시청자들에게 탄탄하고 정확한 정보를 전달할 수 있죠. 제겐 분신과도 같은 존재예요. 어디 보자, 어제는 선발투수가….”
 
  -지난해는 두산베어스가 우승했었다. 이번 시즌 강력한 우승 후보는 어디라고 예상하나.
  “정말 모르겠어요. 경기 중에 전혀 예상치 못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기 때문에 섣불리 결과를 단언할 수 없어요. 정말 운이 없는 경우에는 상위권을 달리고 있는 구단의 주축 멤버가 부상을 당할 수도 있거든요. 더군다나 지금은 시즌 초반이잖아요. 현재 스코어대로  라면 KIA가 우승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현재 가장 낮은 순위인 구단이 대역전 드라마를 쓸 수도 있고요. 그건 아무도 모르죠.(웃음)”
 
  -그래서 야구가 재밌는 거 아니겠나.
  “그럼요.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 야구의 재미에요. 그래서 다른 종목의 스포츠보다 팬이 많고 열성적이죠. 한 시즌마다 몇 편의 명품 드라마가 탄생하는 것 같아요.”
 
 
  -한명재, 권성욱 캐스터와 함께 스포츠 캐스터 3대장으로 꼽힌다.
  “과찬의 말씀이네요. 아무래도 스포츠 전문 채널 1세대에 속해서 그런 별칭을 지어주신 것 같아요.”
 
  -그렇다. 스포츠 캐스터 채널이 만들어지면서부터 함께 했다. 스포츠를 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저를 비롯한 모든 스포츠 중계인이 그렇지 않을까 싶은데, 어릴 적부터 야구를 비롯한 스포츠를 좋아했어요. 스포츠는 항상 정정당당하잖아요. 그 점이 제게 큰 매력으로 다가왔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스포츠 중계는 ‘쌩 라이브’잖아요. 원고 없이 캐스터가 방송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끌어 간다는 게 가장 흥미로웠죠.”
 
  -혼자서 모든 걸 준비한다니. 방송사고의 두려움은 없나.
  “물론 많죠. 한 번은 방송을 앞두고 목소리가 전혀 나오지 않더라고요. 쉰 소리만 계속 나와 답답하고 당황스러웠죠. 어쩔 수 없이 급하게 다른 캐스터를 섭외하느라 우왕좌왕하고 난리가 났었는데, 방송 10분을 남기고 그림같이 목소리가 터졌어요. 그때 그 일이 있고 나서부터 ‘난 스포츠 캐스터가 천직인가보다’라고 생각하게 됐어요.(웃음)”
 
  -혹시 개인적으로 응원하는 구단이나 선수가 있나.
  “고향이 서울이다 보니까 예전에는 MBC 청룡을 응원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딱히 선호하는 구단은 없답니다. 오랫동안 프로야구 중계를 진행한 사람으로서 아직까지 그런 마음이 남아있으면 안 되죠.(웃음)”
 
  -그럼 어떤 마음으로 중계방송을 진행하나.
  “기름기 쫙 뺀 담백한 중계를 하려고 노력해요.”
 
  -담백한 중계라면?
  “특별한 방법이 있는 건 아니지만 경기의 재미를 그대로 느낄 수 있도록 하는 편이에요. 물론 시청자들에게 생생한 현장감을 전달하기 위해 조금의 연기는 필요하죠. 저는 백번도 더 봤던 홈런일지라도 처음 본 것처럼 말이에요. 하지만 거짓방송은 하면 안 되죠. MSG 듬뿍 들어간 말과 행동으로 자극적인 중계를 하고 싶진 않아요. 최소한 꾸밈없는 중계방송을 지향해요.”
 
  그는 샤우팅뿐만 아니라 톡 쏘는 발언들로 화제를 모으며 ‘사이다 캐스터’라는 별명도 가지게 됐다. 주변에서는 방송국에서 쫓겨나면 어떡하느냐는 걱정의 눈길을 보내곤 하지만 개의치 않는다. “저는 스포츠 방송도 재미를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예능 프로그램을 보는 이유도 재밌기 때문이잖아요. 하지만 인공적인 억지웃음은 되레 반감을 일으켜요. 그 대신 모든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정치·사회·경제에 대해 그냥 얘기하는 거죠. 제가 특별히 정의롭고 대단해서 하는 말이 아니에요. 그냥 모두가 할 수 있는 이야기에 물꼬를 트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돋보이는 샤우팅은 아무래도 성악을 전공했기 때문인가.
  “에이. 아니에요. 성악과 출신이라서 그렇다는 이야기는 다 오해랍니다. 노래할 때랑 말할 때랑 같나요? 다만 가지고 있는 목소리가 워낙 흔히들 말하는 ‘동굴 목소리’라 그렇죠.(웃음)”
 
  -성악을 전공한 이유는 뭔가.
  “성악을 전공하는 누나가 있어서 원래 음악하고 가까웠고 좋아하는 편이었죠. 그러다 보니 가족들이 자연스레 제게도 성악을 해보지 않겠냐고 권유했었어요. 그런데 노래를 좋아하는 것과 막상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건 다르잖아요. 그래서 망설였는데, 가르치는 선생님이 보기엔 제게 재능이 보였나 봐요.(웃음)”
  
  -성악가가 됐을 수도 있었겠다.
  “사실 음악을 좋아했지만 제 전공으로 삼을 거란 생각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원래부터 방송인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예술대 학생으로 진학했음에도 재학 내내 방송사 시험을 공부했어요. 그래서 선배들의 미움 아닌 미움을 사기도 했었답니다.”
 
  -미움이라니.
  “그 당시에는 클래식 전공자가 창작예술을 하는 것만으로도 ‘저급한 사람’이라고 취급을 받기도 했었거든요. 어찌 보면 자기 전공에 대한 프라이드가 단단한 거죠. 아무튼, 막 입학한 1학년이 학과 행사는 물론이고 연습에도 잘 참여하지 않았으니 아무래도 그리 마음에 드는 후배는 아니었겠죠.(웃음)”
 
  -그러면 중앙대에 대한 추억은 많이 없겠다.
  “2학년 때부터 학교에 다니는 마음가짐을 달리했던 것 같아요. 방송국 시험과 별개로 학교는 열심히 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먼저 학과 동기들에게 다가갔어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친구도 사귀고 또 제게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선배를 만나게 되면서 학교를 즐겁게 다녔던 것 같아요.”
 
  -대학 시절부터 방송국 시험 준비를 했으면 일찍이 붙었겠다.
  “그건 아니에요. 중간에 포기했었거든요. 대학에 졸업하고 한 기업의 공연기획자로 취업했어요. 나름대로 흥미도 있고 좋은 보수의 직장이었죠. 그러면서 자연스레 방송인의 꿈이 사라지는 듯했어요. 그런데 제게 운명 같은 일이 벌어졌죠.”
 
  -어떤 일인가.
  “그날도 어느때와 같이 일을 마치고 밤늦게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어요. 한 칸에 몇몇 중년 남성들이 서류가방을 맨 채 술에 취하고 현실에 치여서 졸고 있었어요. 그 모습을 보고 있는데 그 사람들 얼굴에 제 얼굴이 오버랩이 되더라고요. 그때 깨달았어요. 이대로 현실에 안주한 채 살아가다 보면 꿈같은 건 이제 내게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요. 그때 정신이 확 깨면서 다음날 바로 회사에 사표를 냈죠. 그리고 다시 방송국 입사준비를 시작했죠.”
 
  ‘간다!간다!간다! 홈~런!’는 야구팬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그의 대표 유행어다. “캐스터는 표현을 어떻게 할 것인지 항상 고민해야 하는 것 같아요. 사랑 고백을 하는 방법도 엄청 다양하잖아요. 예를 들어 ‘사랑해’라고 단순하게 말할 수도 있지만 ‘매일 안아주고 아껴주고 싶어’라고 표현하면 더 애틋하고 로맨틱하죠. 이처럼 같은 경기일지라도 현장의 분위기를 더 잘 살릴 수 있는 표현을 구현해요. 그러다 보니 저도 저런 유행어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2005년 SBS Sports에서 가장 잘나가던 시절 돌연 프리선언을 했다. 
  “당시 SBS Sports에서 10년 정도 근무했던 상태였어요. 그때 직급이 차장이었는데 ‘내가 현장에서 언제까지 일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이 많았던 시기였죠. 어떤 직종이든 직급이 높아지고 시간이 흐르면 자의반 타의반으로 현장업무에서 손을 떼고 관리자가 되어버리잖아요. 근데 전 현장에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더라고요. 페이퍼를 볼 시간에 시청자에게 어떻게 하면 더 생동감 있게 중계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싶었죠. 그래서 과감하게 프리선언을 했답니다.”
 
  -쉬운 선택은 아니었을 텐데.
  “많이 고민했지만 또 한 번 인생의 승부수를 띄운 거죠. 당시 주변 동료들은 많이 알려진 아나운서도 아니면서 왜 프리선언을 하느냐고 말렸었죠. 그런데 다행히 SBS 측에서 먼저 프리선언과 관계없이 방송은 계속해서 함께하자는 제의가 들어왔고 흔쾌히 수락했죠.“
 
  -정말 임용수 캐스터를 놓치기 싫었나 보다.
  “2011년까지 근무하다 XTM으로 이전했어요. 그리고 2년 후에 지금 활동하고 있는 Sky Sports에 둥지를 틀었고요.”
 
  -현재는 이효봉 해설위원과 중계 파트너로 활동하고 있다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해설을 잘하시는 분이죠. 또 이병규를 비롯한 다른 해설위원과도 함께 하고 있어요. 모두 환상의 짝꿍이죠.(웃음)”
 
  -해설위원과의 ‘케미’를 위해 노력하는 점도 있나.
  “아무래도 전 방송을 이끌어나가는 진행자이고 그들은 전문인으로 구분되잖아요. 그래서 전 경기의 흐름뿐만 아니라 해설위원이 편하게 말을 꺼낼 수 있도록 화두를 던져줘야 해요. 제가 알고 있는 사안이더라도 시청자들이 해설위원의 설명을 들어볼 수 있게요. 그래서 해설위원의 기호, 가정환경, 취미 등을 파악해서 중계방송을 할 때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하려고 하죠.”
 
▲ 임용수 캐스터의 하루는 지난 경기를 정리하며 시작된다.
  -세심하다.
  “아무래도 스포츠 캐스터 일을 수십 년 하다 보니까 자연스레 꼼꼼해진 것 같아요. 매일같이 경기결과를 정리해 데이터화 시키고 또 스포츠를 비롯한 여러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버릇이자 직업병이죠.(웃음)” 
 
  임용수에게 야구란 무엇인가 묻자 그는 더 생각할 여지도 없이 인생의 지침서라고 말했다. “저는 야구를 통해서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배웠어요. 야구는 어떤 스포츠 종목보다 ‘관계’가 중요한 스포츠죠. 투수가 아무리 공을 잘 던져도 타자가 점수를 내지 못하면 소용이 없잖아요. 혼자서는 절대 할 수 없고 가능하다고 해도 재미가 없을 거예요.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죠. 그 누구도 혼자 살아갈 수 없어요. 타인과의 관계에서 사랑하고 나누면서 살아가야 해요. 패배한 팀에게 격려를 보내듯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태도를 가져야 하죠. 전 삶의 방향을 야구를 통해서 배운답니다.”
 
  -스포츠 캐스터로서 가장 뿌듯할 때는 언제인가.
  “별다른 거 없어요. 그냥 ‘캐스터님 재밌게 보고 있어요’, ‘우리 게임 중계는 언제 해주시나요?’ 이런 응원 한마디가 가장 힘이 돼요.”
 
  -어떤 스포츠 캐스터로 기억되고 싶은지 궁금하다.
  “음. 가능한 오랫동안 현장을 누비는 게 마지막 바람이에요. 그리고 언젠가 마이크 앞을 떠난다면 야구를 사랑하는 팬들에게 ‘임용수 캐스터, 그 사람 참 재밌었어’, ‘그 사람은 사람 냄새 나는 중계를 했었던 거 같다’라고 기억되면 좋겠어요. 그거면 충분하죠.”
 
  당신에게 중앙대란?
  “성악과에 입학은 했지만 처음부터 방송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학교에 정을 붙이진 못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초반에는 알고 지내는 동기, 선배들도 별로 없어서 조용히 학교에 다녔어요. 수업을 마치면 바로 버스를 타고 집에 가기 일쑤였죠. 게다가 ‘87년 세대’ 대부분이 그렇듯 연습실과 강의실보다는 최루탄을 마시며 거리에 나가 있던 시간이 더 많았죠. 다시 돌아보니 저 그렇게 성실한 학생은 아니었네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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