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노트’의 L, <쿵푸팬더>의 포, <마이펫의 이중생활>의 맥스, ‘로보카 폴리’의 폴리, <마다가스카의 펭귄>의 데이브 등 수백 수천 개의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은 18년 차 성우다. 영화, 애니메이션, 게임, 시사프로그램 등 어느 것 하나 손대지 않은 분야가 없을 정도다. 그런데 가장 드라마 같은 작품은 영화도, 애니메이션도, 게임도 아닌 ‘엄상현’이었다. 장어집에서 새벽일을 하던 시절부터 대한민국 최고 성우가 되기까지. ‘드라마 엄상현’을 주목하라.

 

 

 

 

 
 
 
 
 
 
 
 
 
 
 
 
 
 
 
 
 

그의 목소리는
어디로 튈 지 모른다
 
“인생의 조연이 되지 말아요”
파란만장 드라마 
감독, 출연, 더빙: 엄상현
 
 
 
 
 
한 퍼즐이 있다. 특이한 점이라면 한 조각, 두 조각, 천 조각이 모여도 완성될 수 없다. 다만 한없이 커진다. 단일 퍼즐 조각은 하나의 작은 그림에 불과하지만 조각이 서로 연결되면서 생각지 못한 놀라운 그림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 퍼즐의 이름은 ‘인생’이다. 스쳐 지나갈 법한 일상의 한 장면이 조금 모이면 경험이 되고 경험이 모이면 삶이 된다. 다양한 경험의 조각이 모일수록 풍요로운 인생 퍼즐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엄상현은 그런 삶을 살고 있었다. 그는 핸드폰을 쥐고 마이크인냥 장난스레 운을 띄웠다. “마이크테스트. 아아. 반갑습니다.(웃음)”
 
  -흔히들 성우를 ‘천의 목소리’라 하더라.
  “에이, 아니에요. 목소리는 하나죠.(웃음) 다만 캐릭터를 표현하는 느낌이 다른 거예요. 같은 목소리를 다르게 들리게 하는 것, 그게 연기죠.”

  -뮤지컬 <명성황후>에 출연하는 등 원래는 연기자로서 활동했다고 들었다.
  “아마 1997년도로 기억해요. 이뿐만 아니라 여러 작품의 조연출을 맡기도 했었죠. 성우를 하겠다고 결심한 건 거의 서른에 가까워서였어요.”

  -늦깎이었나. 쉽지 않았을 텐데.
  “오히려 연기를 했기 때문에 성우를 할 수 있지 않았나 싶어요. 결국은 이것도 연기니까요. 그리고 저는 제 삶이 자꾸 풍성해지는 것에 쾌감을 느끼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전 정말 취미도 온갖 걸 다해봤어요. 윈드서핑, 오토바이, 스카이다이빙, 드론, 조립…. 넓고 얇게 깔짝거리고 있는데 너무 재밌는 거 있죠. 그래서 성우가 잘 맞나 봐요.”

  -그래서 성우가 맞다니.
  “성우는 연극이나 영화배우에 비해 호흡이 짧아요. 연극과 영화는 최소 몇 주, 최대 몇 년 동안 준비해야 하는데 성우는 당장 오늘 할 일을 몇 초 전에 주거든요. 그리고 연극은 한 편 하고 나면 여운이 진하게 남고 가슴이 뭉클해지는데 성우는 작업이 끝나면 ‘수고하셨습니다!’하고 끝이에요. 휘발성이 굉장히 강하죠.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그만큼 다양한 캐릭터가 되어 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해요. 아주 만족하고 있습니다.(웃음)”
 
 
  “어디서부터 말씀드려야 하나…. 아. 대입을 앞두고 진로를 고민할 때부터 시작하면 되겠네요. 전 원래 예술을 전공하겠다는 생각이 단 ‘1’도 없었어요. 그런데 당시 저희 어머니께서 제게 연극을 전공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하시더라고요. 깜짝 놀랐죠. 당시 드라마에선 자식이 ‘저 연극영화학과 가고 싶습니다’ 하면 부모가 ‘뭣이야?’ 하면서 뒷목 잡고 쓰러지는 게 다반사였거든요. 그걸 보며 자랐기에 당연히 연극전공은 사람이 가는 곳이 아닌 줄로만 알았어요. 그런데 어머니께선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야 행복해. 너 연극이랑 영화 좋아하잖아. 잘할 수 있을 거야.’”
 
  -연기도 꽤 잘했다고.
  “잘했다기보단 굉장히 좋아했어요. 학교 다닐 때 배우 이범수 형이랑 친했는데 연기를 맘껏 해볼 수 있는 써클을 만들기도 하고 함께 연극과 영화를 많이 보러 다녔죠. 그냥 보고 즐기는 게 아니라 보고 나서 꼭 학구적인 토론을 했어요. 그만큼 좋아하고 열심히 했죠. 매일 밤샘 연극을 하느라 통금시간을 넘겨서 기숙사에 들어가질 못했으니 말이에요.(웃음)”

  -원래 성우를 하고 싶었나.
  “아뇨, 학교 다닐 땐 ‘성우’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어요. 그런데 졸업공연을 하던 중 선배가 제 연극을 보러 왔다가 대뜸 제게 성우를 하라고 하더라고요. 어리둥절해 하고 있으니 선배가 ‘너 ‘토요명화’ 안 봐? ‘주말의 명화’ 안 봐? 그게 외국 사람이 한국말을 하는 것 같아? 그런 거 하는 사람이 성우야’라고 답답해하더군요. 그리고 성우 시험은 탤런트 시험과 똑같은데 카메라만 없는 거라고 너무 쉽게 말하더라고요. 그래서 전 정말 쉽게 할 수 있는 건 줄 알고 KBS 성우시험을 치르러 갔어요.”

  -글쎄, 만만치 않았을 텐데.
  “전 뭣도 모르고 빨간 파카를 입고 갔는데 정장 입은 사람들이 홀을 꽉꽉 메우고 있더군요. 일단 겁먹었죠. 그런데 그분들 목소리가 정말 TV에서나 나올법한 그런 내레이션 목소리인 거예요. 사람한테서 어떻게 저런 목소리가 나오는지 신기함을 느끼는 동시에 난 안 되겠다는 걸 직감했죠.”

  -시험은 잘 치르고 나왔나.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편하게 봤어요. 성우 마이크도 당일 시험장에서 처음 본 사람인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어요. 그런데 끝나고 내려가는 중에 감독관이 다급하게 부르는 거예요. ‘뭐지?’하고 헐레벌떡 올라갔더니 심사위원이 하는 말이 뭐였는지 아세요? ‘너 떨어졌어!’였어요.”

  -멀쩡히 가는 사람한테 왜 그랬을까. 혹시 붙었다는 말인가.
  “그러니까요. 미치지 않고서야 가는 사람을 불러서 당신 떨어졌다고 말할 리가 있겠어요? 그래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고 집에 왔는데, 세상에 진짜 떨어졌더라고요. 좀 화가 났어요. 근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지금은 부족하지만 다음에 연습해서 또 오라’는 일종의 사인이었대요. 저한테서 어떤 가능성을 보신 거죠.”

  -말뜻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면 좌절만 했겠다.
  “그렇죠. 전 ‘너 같은 애는 성우 한다고 얼씬거리지도 마라’라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 후론 성우라는 걸 아예 잊고 살았어요. 대신 연극을 했죠. 다행히 그땐 연극이 활황기여서 충분히 먹고 살 수는 있었어요.”

  -그렇다면 왜 다시 성우에 도전했나.
  “서른이 가까워 결혼할 때쯤이 되니 장모님께서 고정적인 직업을 원하셨거든요. 광고회사도 찔러보고 에버랜드 입사시험도 준비하던 중 EBS에서 방송 요원 겸 성우시험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완벽하게 성우라는 꿈을 접은 상태였지만 봉급을 준다고 하니 솔깃하더라고요.(웃음) 지원서를 넣으며 ‘KBS도 아니고 EBS라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라는 아주 건방진 생각을 했죠.”

  -연극, 영화 작업도 해봤고 TV에도 나와봤으니 이번엔 좀 쉬웠겠다.
  “그렇죠. 카메라가 두렵지 않았어요. 더더군다나 방송 요원이라는 게 탤런트처럼 출연도 하고 시사프로그램의 사회도 보고 어린이프로그램도 진행할 수 있는 역할이었어요. 당시 저는 뮤지컬을 해서 대본도 금방 외우고 잔 근육도 탄탄하게 있어서 꽤나 적합했죠. 나중에 알고 봤더니 제가 1등으로 붙었더라고요.(웃음)”
 
  -이제 인생 탄탄대로인가.
  “그런 줄만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어요. 오히려 제가 배우 출신이기 때문에 너무 튀는 감이 있었어요. 배우와 성우가 에너지를 쓰는 방식이 달라서인지, 다른 성우들과 제 톤 컬러가 맞지 않더라고요. 목소리가 어울리지 않다 보니 일감도 안 들어오고, 성우실에서 전화를 받는 일만 계속하게 됐어요. 기본급 50만 원으로만 생활을 영위해야 했죠.”

  -저런. 불가능한 일이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데 티끌을 모을 수조차 없었어요. 50만 원으로는 생활을 이어갈 수가 없어서 학교 동기가 운영하는 장어 가게에서 숯불 때고 불판 닦으면서 투잡을 뛰었죠. 아침 8시 40분에 EBS에 출근해서 저녁 6시에 퇴근하자마자 밤을 꼴딱 새우고 아침 7시까지 장어집에서 일했어요. 그러고 바로 8시 40분에 다시 출근하고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당시 살던 집  전세 기간이 끝나서 엄마 친구네 지하에서 신세를 졌어요. 추운 데서 기름도 못 때고 덜덜 떨면서 자고 그랬죠. 힘들었어요, 정말.”

  -시작부터 고됐다. 어떻게 회복할 수 있었나.
  “어떤 작품에 돈키호테 같은 조연 캐릭터가 있었어요. 굉장히 무모하고 변화무쌍하다가도 찌질한 캐릭터인데 PD님이 뉴페이스를 찾고 계셨어요. 마침 놀고 있던 제가 맡게 됐어요. 어떻게 연기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지만 학생 때 비슷한 연극을 했던 경험을 떠올려 하고 싶은 대로 막 했어요. 그런데 너무 좋아해 주시는 거예요. 그 작품 이후로 의뢰가 좀 오더라고요.”

  -다행이다. 하지만 곧 EBS의 전속 계약이 만료됐을 텐데.
  “맞아요. 마침 SBS에서 경력직 성우 오디션이 있었어요. 전 영화 더빙이 그렇게 하고 싶었거든요. ‘주말의 명화’, ‘명화극장’ 등 그런 프로그램 있잖아요. 그런데 잘하고 싶은 마음에 너무 긴장해서 사시나무 마냥 벌벌 떨고 있더라고요. 어디서도 전혀 떨지 않은 저인데 말이죠. 결국은 SBS 오디션 보고 나서 제 동기들 모두 합격했는데 저만 못 갔어요. SBS에서 ‘아톰’을 하기 전까진 그렇게 2년 정도 표류했어요.”

  -‘아톰’에 제의가 들어온 것인가.
  “남자1, 남자2, 남자11…. 이런 식으로 남자들이 떼거지로 나오는 장면을 찍어야 하는데 기존 구성원으로는 해결이 안 돼서 저한테 연락이 온 거예요. 너무 감사했죠. 그런데 생각보단 잘하니까 점점 불러주시고 꽤 중요한 조연도 주셨어요. 나중엔 주연을 맡기시더라고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비중이 높아졌어요. 그렇게 바라던 KBS ‘명화극장’도 하고요.(웃음)”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건 굉장히 짜릿해요. 전 아직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어머 나 진짜 성우 하길 너무 잘했어’라고 생각하죠. 올해로 성우 18년 차인데 아직도 이 일이 좋아요. 퇴근해도 집에 가면 다음날을 위해 미리 그림을 보며 목소리를 맞춰보는 작업을 무조건 세 네 시간 동안 해야 하는데 전혀 괴롭거나 재미없지 않더라고요.”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을 꼽는다면.
  “많은 작품이 있지만 단연 ‘데스노트’를 꼽겠어요. 저는 L 배역을 맡았는데 주인공과 제 케미가 굉장했죠. 그 작품을 할 때는 정말 주변이 안 보일 정도의 몰입감을 느꼈어요. 너무 몰입한 나머지 L이 죽는 날 마치 제가 죽어서 이승을 떠나는 듯한 그런 느낌이 드는 거예요. 게다가 비까지 내렸어요. 성우로서는 태어나서 그렇게 몰입했던 작품이 없었죠.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짜릿짜릿한 소름이 돋아요.”

  -<쿵푸팬더> 시리즈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쿵푸팬더를 이야기하자면 길어요. 처음엔 오디션을 보고 나서 한참을 기다리는데 연락이 없어서 떨어진 줄 알았어요. 그런가보다 하면서 그냥 아내랑 아들이랑 사이판으로 여행계획을 짰죠. 근데 현지에 도착하자마자 당장 내일부터 시작할 거니까 빨리 준비하라는 전화를 받았어요.”

  -모처럼 가족과의 여행인데 타이밍이 안타깝다.
  “그냥 안 한다고 할까 이런 기회가 또 있지 않을까 생각하다가도 사실 너무 하고 싶어서 괴로웠어요. 그런 저를 보는 우리 아내가, ‘어휴 해!’ 하더라고요. 정말 그래도 되냐고 재차 묻는데 여행이야 또 오면 된다고 이해해줬어요. 그날 밤 혼자 귀국했어요. 참 고맙고 미안하죠. 그렇지만 제가 참 많은 걸 배웠던 작품이기 때문에 후회하진 않아요. 처음으로 외국 슈퍼바이저와 로컬리제이션 작업을 했던 작품이거든요.”

  -로컬리제이션이 뭔가.
  “외국 영화를 더빙할 때 각국에 모든 자율권을 줘버리면 자칫 원작을 잃을 수가 있어요. 그래서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슈퍼바이저와 함께 더빙작업을 하게 되죠. 그런데 각국의 억양, 주술관계가 다르기 때문에 당황스러운 부분이 있어요. 우리나라 정서에 맞게 작업하려면 ‘으악!’ 해야하는데 ‘huh~’하면 좀 이상하잖아요. 안 그래요?(웃음) 그런 걸 처음 경험해본 거죠.”

  -슈퍼바이저와 함께하는 녹음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나.
  “파일별로, 한 문장별로, 심지어는 한 단어별로 끊어서 녹음하더라고요. 몇 번에 걸쳐서 다시 하기도 하고요. 그렇게 하면 연기의 느낌이 뚝뚝 끊기지 않을까 걱정됐는데 완성작 보니까 잘 나왔더라고요. 역시 기술이 좋아요.(웃음) 어쨌거나 그런 작업 거치면서 여러 가지 배웠어요. 그 이후로 그걸 통해서 일감이 많이 들어왔죠.”

  -원래 그렇게 끊어서 녹음하나.

  “예전엔 정말 연극처럼 다 같이 모여서 녹음했는데 요즘은 각자 따로 하고 믹싱을 하죠. 그래야 더 섬세한 작업을 할 수 있어서 그렇대요. 그러다 보면 둘이 대화하는 장면을 찍어도 정작 성우는 누구랑 같이 작업했는지 몰라요.”

  -‘로보카 폴리’도 성공적인 케이스 중 하나다.
  “우리나라 창작 애니메이션이죠. 국산인데 심지어 장편 애니메이션 시리즈 작업으로는 첫 경험이었어요. ‘로보카 폴리’의 경우엔 완성작 위에 더빙을 하는 게 아닌 창작과정부터 함께했죠. 그것도 색다른 경험이었어요. 그런데 기자님, 작품을 나열하자면 한두 끝도 없어요. 모든 작품 하나하나가 의미 있고 소중하거든요.(웃음)”
 
  -성우가 천직인가보다.
  “정말 천직인가 봐요. 살아오면서 인생이 바뀔 뻔한 적이 있었는데도 지금 성우를 하고 있는걸 보면 말이죠.”
 
  -인생이 바뀔 뻔했다니.
  “학생 때 실험극을 비판하는 내용의 실험극을 발표한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선생님께서 ‘이건 수정할 것도 없이 대학로에서 바로 공연하자’며 너무 좋게 봐주셨어요. 그리고 뉴욕대에 가서 공부를 좀 더 하라고 조언해주셨죠. 그래서 실제로 미국에 어학연수를 갔었어요.”

  -학자나 배우가 될 뻔 했다는 건가.
  “그럴 줄 알았었죠. 그런데 일찍 귀국하게 됐어요. 몸이 점점 안 좋아지더라고요. 바이러스성 희귀병인데 몸이 서서히 마비되는 병이었어요.”

  -유감이다. 배우에겐 치명적일 텐데.
  “몸의 반이 감각이 없었어요. 처음엔 잘 몰랐는데 다들 제게 뭔가 이상하다고 하는 거예요. 마비가 진행되면서 눈이 잘 안 감기고 입이 잘 안 다물어지기 시작했죠. 병이 점점 악화하면서 타이레놀을 하루에 2판씩 먹어야 했어요. 열이 40도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거든요. 공부를 지속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죠.”

  -치료는 잘 된 건가.
  “귀국해서도 병은 점점 더 심해졌어요. 이제 다리는 아예 감각이 없었죠. 나는 배우인데 몸을 못 쓰게 됐으니 더는 삶의 의미가 없었어요. 죽고 싶었어요. 그냥 죽어야겠다고 다짐했죠.”

  -(….)
  “정말 죽진 않았으니 너무 놀라지 말아요. 막상 죽을 생각을 하니까 좀 무서웠거든요.(웃음) 어쨌든, 굉장히 발랄하고 잘 까불던 아이였는데 그때부터 조용해졌어요. 말을 많이 하면 뭔가 마비된 티가 날까봐 겁났거든요. 그런 걸 보여주기 싫어서 수업이 끝나면 칼같이 집에 갔어요. 졸업 후 뮤지컬을 할 때도 다리에 감각이 거의 없는 채로 연기했는데 한 4년 정도 지나니까 점점 감각이 살아나고 5년째 되니까 완전히 돌아오더라고요.”

  -정말로 다행이다.
  “그런 경험이 훗날 살아나갈 용기가 되더라고요. ‘나 그런 일도 겪었는데 괜찮아 할 수 있어’라면서요. 연기를 한다든가 성우 활동을 하면서 감정을 다루는 작업을 할 때도 소중한 재료가 됐어요. 지난 이야기니까 그것도 소중한 파편으로 두고 싶네요.(웃음)
 
 
  “매 순간의 감정과 경험 모두 너무 소중해요. 사소하고 작은 감정 하나하나도 지나치지 않고 기억했기에 결국 그 조각들이 쌓여서 오늘의 제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여태까지의 여정을 쭉 돌이켜보면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취미로 영화편집 작업을 했던 것부터 시작해서 배우로서 활동했던 경험, 아파본 경험, 하다못해 모피 판매 아르바이트 경험까지 모조리 써먹지 않고 있는 게 없어요. 너무 신기하지 않아요?”
 
  -요즘은 무얼 하고 있나.
  “이렇게 이야기하면 살짝 웃으실지 모르겠지만, 요즘은 공부가 재미있어요. 학생 땐 아무것도 모르면서 겉멋만 들어서 공부를 잘 안 했는데 저도 신기해요.”

  -공부가 재미있다니.
  “지난 2003년도에 대학원 석사과정을 밟았는데 제 성우 인생에서 가장 바빴던 시기라 일도 일대로 못하고 대학원도 대학원대로 놓치면서 어영부영 수료상태로 남겨뒀던 적이 있어요. 그런데 아까 말한 이범수 형의 부탁으로 동아방송예대에서 강의할 일이 생겼어요. 그때 석사 학위도 없는 제가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게 마음에 걸리더라고요. 그래서 지난해에 논문을 끝내기로 했어요. 공부가 이런 쾌감이 있는지는 꿈에도 몰랐어요. 농담이 아니라 방송통신대학에 새로 가볼까 고민도 했죠.”

  -지금은 중앙대에서 공연예술학 박사과정을 하고 있다고.
  “네. 박사 면접 때 교수님들께서 ‘자네는 이미 안정적인 직업도 가지고 있는데 왜 굳이 박사 공부를 하려 하냐’고 물으셨는데 정말 솔직하게 답했어요. 순전히 공부를 더 해보고 싶어서 라고요.”

  -교수를 할 생각인가.
 “아직까진 아니에요. 연극영화학과 교수님들을 보면 얼마나 대단하신 분들인데, 전 자신 없어요. 어쩌면 나중엔 다른 공부를 해볼지도 모르겠네요.(웃음)”

  -뭐가 됐든, 당신의 순수한 학구열을 응원한다.
  “감사합니다. 문득 이런 생각도 해요. ‘고등학교 때 이런 공부의 맛을 알게 됐다면 인생이 180° 변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싫어요. 지금의 삶을 너무 사랑하고 만족하거든요. 과거보단 앞으로의 미래가 더 궁금하죠.(웃음)”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다양하게 많이 보라는 말을 하고 싶어요. 경험의 성격과 분야가 정말 달라서 연관이 없어 보이는 것도 전혀 연관이 없지 않더라고요. 오히려 생각지도 못했던 경험들이 현재의 나에게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하는 걸 깨달았을 때 그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정말 소름이 끼칠 정도예요. ‘세상에! 그때 그 경험이 이렇게 쓰일 줄이야!’ 그러니 마음 놓고 저지르세요.(웃음)”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