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전 MOTEL, 이라고 새겨진 붉은 네온사인이 황급히 꺼졌다가 다시 켜진다. 고풍스러운 성 꼭대기에는 만국기가 펄럭거리고, 어두운 벽에서 백조 한 마리가 깜박깜박 날개죽지를 펼치며 붉은 하트를 향해 날아간다. 정문 앞 보기 좋게 조경해 놓은 가시나무 주위에는 조그만 알전구가 반짝이고 있다. 밤마다 나는 이 궁전으로 들어간다. 자동 출입문이 스르륵, 나의 인기척에 환영하듯 열린다.

“이제 와?”

언제나 변함없는 상우의 인사말이 나를 현실로 되돌아오게 한다. 출입문 옆 대기 의자에 앉아있는 그는 스포츠신문에 얼굴을 묻은채다. 어느새 그는 구두소리만으로 나를 알아챈다. 인기척만으로 팔을 벌리는 자동문 처럼.

나는 계단으로 내려오는 지배인을 발견하고 고개를 숙인다. 주름이 칼날같이 선 까만 양복 바지, 크림빛 와이셔츠에 흑색 나비넥타이, 헤어무스로 단정하게 빗어넘긴 머리까지 한결같은 지배인의 모습은 지나치게 단정하다. 지배인은 내 인사를 받으면서 팔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본다.

“좀 늦었군.”

지배인의 힐책을 귓등으로 넘기며 탈의실로 들어간 나는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카운터로 나온다. 카운터 선반 안쪽에는 방 호수가 새겨진 열쇠들이 고리마다 줄지어 일렬횡대로 걸려있고, 검정 표지 숙박부가 선반 위에 놓여있다. 카운터 천장에 매달린 카메라에는, 텅 빈 지하 주차장을 청소하는 상우의 모습을 비추고 있다.

힐끗 출입구에 눈길을 던졌을 때, 커피가 들어있을 하늘빛 보자기를 한 손에 들고 미스 정이 궁둥이를 씰룩거리며 걸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언젠가 미스 정은 팔을 걷어부치고 바닥을 청소하는 상우를 바라보며, 저 모습에 반했지 뭐야, 대걸레질 하는 남자가 저렇듯 멋지다니, 나에게 귓속말로 속삭였었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주차장 청소를 끝낸 상우가 계단으로 올라오며 나에게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물어온다.

“미스 정이 한 말이 생각나서…… 대걸레질 하는 니 모습에 반했대잖아.”

내 말에 상우의 얼굴이 석류처럼 벌게진다. 저 애가 안색을 붉힐 때가 다 있네? 의외라는 생각이 든다. 두 살이나 연상인 나에게 처음보는 순간부터 반말을 지껄이는, 버릇없고 무례하기 그지없는 그였다. 의자에 앉아있는 내 가슴께를, 카운터 서랍장에서 뭔가 꺼내는 시늉을 하며 의도적으로 툭, 건드린다거나, 월경 주기를 귀신같이 눈치채고, 기저귀를 해서 불편하겠네, 놀려댔다. 세상 물정에 밝은 상우가 순진하다는 식으로 나를 쳐다보는 눈빛에도 이미 익숙해져 있는 터였다. 미스 정의 말대로 상우에게는 본능적으로 여자를 자극시키는 구석이 있었다. 아마도 그건 상우의 머릿 속에 들어앉은 생각이 가장 원초적인 것들로 쌓여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요즘에 상우는 점점 더 밀도있게 나를 공격해온다. 남자뒤에서 갑작스럽게 포옹한다든지, 나의 허리 치수가 궁금하다며 큼직한 두손으로 허리를 움켜잡으려 하는 등 나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무섭게 화도 내보았지만 도대체 상우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내가 심드렁해져 있는 동안에는 누나, 누나 깍듯이 대하며 비위를 맞추다가 조금만 틈을 보이면 허를 찌르는 식이었다. 그러나 종종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한 표정이 그의 얼굴에 해사하게 솟아오를 때면 나의 마음은 대책없이 녹아 내려가고 마는 것이다.

띠오띠오 선반 아래 작은벨이 채근하듯 울어댄다. 천장 카메라에 주차장으로 진입하고 있는 차가 잡힌다. 나는 다급하게 상우를 부르고, 얼굴을 들이민 그에게 엄지 손가락을 내민다. 상우는 지하로 곧바로 뛰어간다. 차에서 내리는 두 남녀가 카메라에 등장한다. 양복차림의 삼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는 고급승용차를 몰고 다녔다. 남자의 뒤에 늘씬한 여자가 따라오고 있다. 나는 숙박부를 뒤적거리며 남자의 이름을 찾는다. 넘어가려는 페이지를 난 급하게 잡는다. 그의 이름이 눈에 띈다. 궁전의 단골인, 그들은 두 달만에 온 것이다. 이윽고 그들이 계단으로 올라온다.

“506호실로 가세요.”

남자 뒤에서 천천히 뒤따라오는 여자는 나의 눈을 피하지 않는다. 맨처음 그녀가 이곳을 찾아들었을 때가 떠오른다. 그녀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구두코만 바라보며 어설프게 서 있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가녀린 곡선들은 전체적으로 어우러져 서글픈 인상을 풍겼다. 아래로 내려놓은 가방끈을 꼭 부여잡으며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던 그녀의 모습이 내 머릿 속에 선명히 기억된 것은 아마도 이곳에 갓 들어오고 나서 맞이한 첫 손님이기 때문일 것이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와 나 사이에 닮은 점이라는고는 없는데도, 그녀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그런 느낌을 받은 후로, 나는 이곳을 찾아오는 여자들에 대해 함부로 판단하는 일을 자제하려 했다.

숙박부를 기재한 그들은 엘리베이터 속으로 사라졌다. 둘은 분명히 사소한 일로 다툼을 벌였을 것이다. 긴 시간 동안의 침묵 끝에 누군가 먼저 백기를 들었겠지. 두 달전 506호에는 고함소리가 났다. 507호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올라갔을 때, 506호에서 새어나오는 소리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부터 들려왔다. 평소 입여는 것을 본 적이 없는 그녀의 입에서도 고함이 터져나왔던 것 같다. 눈물이 배어있는 목메인 소리가 방 안의 상황을 충분히 짐작케했다. 나는 카운터로 되돌아와 전화버튼 5, 0, 6을 눌렀다. 남자는 미안하다며 전화를 끊었고 그 후로 항의 전화는 오지 않았었다.

하얀 머리카락이 얼핏얼핏 보이는 초로의 남자가 막 십대티를 벗어나기 시작한 여자와 계단으로 올라왔다. 푸른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여자의 한 손에는 1945년 이후의 자본주의,라고 씌어진 책이 들려있다. 숙박하실겁니까? 나의 깍듯한 인사말에 남자는 고개를 젓는다. 남자는 앞으로 내밀어진 숙박부에 자신의 이름과 주소, 주민번호를 갈겨쓴다. 거짓없이 쓰고 있는 것일까. 이만 오천원입니다. 남자는 지갑을 펼쳐 만원권 지폐 세 장을 나에게 내민다. 309호 열쇠와 함께 거스름돈 오천원을 내밀지만 남자는 열쇠만 받아들고 엘리베이터 앞으로 간다. 눈치빠른 상우는 이쪽으로 오시죠, 라고 말하며 그들을 안내한다. 젊은 여자를 데리고 온 남자는 상우에게 얼마의 팁을 줄까. 309호 손님은 하품하듯 힘겹게 벌려진 엘리베이터 입으로 총총히 들어갔다.

모텔에 오는 연인들은 오로지 섹스를 목적으로 올 것이다. 방금 온 손님처럼 그들은 초저녁에 들어와 자정이 되기 전 나간다. 그들이 가버리고 남은 자리엔 정액이 엉겨붙은 휴지와 하얀 시트 위 군데군데 붙어있을 검은 음모들, 비누 위에는 말라버린 하얀 거품 자욱이 남을 것이고, 급한 육체운동 끝에 배출된 땀을 대신할 생수가 사라졌을 것이다. 계단으로 누군가 뛰어내려오는 소리가 호들갑스럽게 들려오고, 곧이어 상우가 모습을 드러낸다.

“빅뉴스 못들었지?”

“웬 빅뉴스?”

카운터 앞으로 몸을 기대며 상우는 말을 이었다.

“낙원장 있잖아, 걸렸어.”

“뭐가?”

“진수새끼, 요즘 수상쩍다 생각했지. 그 새끼 요즘 돈 좀 쓰더라구. 방에다 몰래카메라를 설치하고 손님들을 협박했나봐. 사실 여기 찾아오는 자식들, 다들 수상쩍은 놈들이라구. 아무튼 그 새끼 그걸 빌미로 돈 뜯다가 어제 잡혀들어갔대.”

그때 자동문이 열리며 젊은 남녀가 들어온다.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움찔한다. 오른쪽 눈썹 아래에 송충이만한 칼자국이 있는 남자의 얼굴은 더욱 험상궂어 보였고, 남자의 전적을 의심하게 했다. 남자의 팔에 매달리듯 기대어 선 여자는 연노랗게 탈색된 거친 머릿결을 손으로 쓸어넘기며 껌을 쩍쩍 씹어댄다.

“얼마요? “

“삼만오천원입니다. 303호실입니다.”

돈을 받은 나는 열쇠를 건넨다. 그들은 엘리베이터 옆에 나있는 계단으로 따박따박 요란한 구두소리를 내며 걸어올라간다.

“그래서?”

나는 상우를 보며 묻는다.

“뭐가 그래서야? 지금 깜방에 있다는거지.”

“그게 무슨 일이래니. 왜 그랬을까?”

상우는 답답하다는 눈길을 보낸다.

“뭘 왜 그래. 돈 때문에 그런거지. 그리고 궁금하잖아, 넌 안 궁금해? 손님들 말야. 다들 지금쯤 홀딱 벗고 누워서 그거하고 있을 거 아냐, 안 궁금해?”

희쭉거리며 상우가 말한다. 상우는 절대 나에게 누나 대접을 하는 경우가 없다.

“시끄러워. 누나한테 버르장머리 없는 말투하고는!”

“누우나는 무슨, 남자품이 그리우면 언제든 말하라구. 내가 기꺼이 상대가 돼줄테니
까.”

나의 부풀어오른 가슴께를 바라보며 상우가 심술맞게 웃는다. 내가 숙박부를 신경질적으로 내리치자 상우는 능청스럽게 나의 엉덩이를 치며 사라진다. 상우의 행동이 농밀해질수록 이상하게도 처음에 느끼던 곤혹스러움은 사라지고 언제부턴가 정말 그와 자면 어떨까, 이상한 호기심이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그럴 때마다 고개를 힘차게 가로젖지만, 처음의 망측한 생각들도 내 또래의 여자들이 저 엘리베이터 속으로 하나 둘씩 걸어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무감각해지는 듯 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은 내가 그를 더 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카운터위에 있는 디지털 시계가 승강기의 굳게 닫힌 은빛 철제문에 흔들리며 매달려있다. 녹색글자 12:03이 비추자 엘리베이터 버튼이 5, 3, 2, 1 불빛을 깜박거리며 문이 열리고 506호실에서 나온 두 남녀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슬그머니 사라져간다.

오늘도 다름없이 506호 손님은 모습을 조용히 감추었다. 자정이 넘으면 줄어드는 빈 방을 따라 열쇠함의 키들도 사라져갔다. 새벽 두 시가 넘기 시작하면 열렸다, 닫혔다 바쁘게 움직였던 자동문은 부쩍 한가해진다. 출출한 배를 야식으로 채운 후, 꾸벅꾸벅 졸다가 어느새 찾아온 새벽빛 속을 향해 궁전을 걸어나간 것이 삼년간 이어온 나의 일상이다.

다르르릉, 전화벨이 울린다. 감사합니다, 궁전입니다. 돈을 삼킨 자판기가 맹숭맹숭한 율무차를 뱉어내 듯, 언제나와 같은 멘트가 나의 입에서 자동적으로 흘러나왔다.

“방금 506호실에서 나온 사람인데요. 방에다 귀고리를 두고 왔는데 좀 찾아주시겠어요?”

506이라는 홋수와 함께 여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나는 습관적으로 디지털 시계의 16:11 녹색숫자를 바라본다. 여자가 언제 나갔었지. 시간의 간격을 가늠해본다.

“아직까지 접수된 물품은 없지만 한번 확인해보겠습니다. 찾게되면 연락을 드리죠.”
연락처를 물으려는 내 말은 그녀의 다음 말에 묻혀버린다.

“아니예요. 제가 잠시 후에 다시 전화할께요. 꼭 좀 부탁드려요.”

수화기를 내리자마자 상우가 한 손에는 면도기를 들고 올라온다. 열쇠걸이에 키를 꽂은 그는 필립스 상표가 붙은 충전식 면도기를 가방에 챙겨 넣는다.

“웬 거야?”

나의 물음에,

“응? 그냥.”

어물쩡거리며 상우는 대답을 회피한다.

그가 차안을 뒤지며 쓸만한 게 있으면 슬쩍한다는 것을, 이미 나는 눈치채고 있었다. 오늘은 면도기라니. 점점 도가 지나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도 문의전화가 없다는 사실
은 신기하지 않을 수 없다.

“나 506호 좀 갖다올께. 귀고리를 잃어버렸대. ”

“습득된 게 없잖아. 아줌마들이 그걸 가만 뒀겠어. 아마 없을걸.”

카운터 밖으로 나온 나는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정삼각형 단추를 누른다. 곧 엘리베이터의 자동 문이 스르륵 열렸다. 정면에 부착된 거울 속의 내 모습이 섬찢하다. 감빛 조끼 복장 위에 진포도색 립스틱을 칠한 내가 맞은 편에 서 있다. 방금 몸을 팔고 나온 여자처럼 보여 진저리를 친다. 나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 카운터 쪽으로 몸을 돌리고 5 버튼을 익숙한 손길로 누른다. 카운터 위에 붙은 디지털 시계가 녹색 숫자로 16:15을 나타내고 있다. 문이 소리나며 닫힌다.

늘 새벽 4시가 넘으면 속이 울렁거린다. 날이 밝아오는 것을 두려워하기라도 하는 양 신체가 요동한다. 엘리베이터 1 버튼이 꺼지고 2 버튼의 살구빛 등이 켜진다. 승강기가 올라가는 기계음이 들려온다. 짧은 시간이 지리하게 느껴진다. 귀고리는 있을까? 새벽은 고요한 나머지 미세한 소리조차 크게 들린다. 모든 사물이 제각각 뭐라고 속삭이는 것만 같고, 살아 움직일 것만 같다. 승강기 안은 온통 벽면이다. 은빛 사방에 내 모습이 비친다. 등 뒤로 또 하나의 내가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천장 위로 뭔가 매달려 있는 것만 같다. 아니야, 착각이야. 고개를 쳐들어 천장을 바라본다. 그곳엔 신경을 곤두세운 채 나를 바라보는 또 다른 눈이 있다. 내 모습이 이리도 낯설다니. 3 버튼이 껌벅인다. 누군가 3층에서 퇴실하려고 하는가. 찰카닥, 승강기가 멈추고 작은 기계음을 내며 열린다. 아무도 없다. 이상하다. 왼편으로 길게 뻗은 복도에 붉은 카펫이 깔려있는 게 보인다. 복도 곳곳에 달린 장미빛 전등이 카펫을 더욱 붉게 비추고, 벽면을 핏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문이 스르륵 닫힌다. 5 버튼에 불이 꺼지며 문이 덜컹 열린다. 조용하다. 카펫을 밟는 나의 발자국 소리만 사각거릴 뿐이다.

긴 복도를 걸어가 506호 숫자판이 달린 문 앞에 선다. 문고리를 돌리며 안으로 민다. 방 안이 캄캄하다. 벽을 손으로 더듬어 전등을 켜자 방안이 환해지며 바닥에 떨어진 이불과 어질러진 침대가 드러난다. 쓰레기통에는 화장지가 아무렇게나 구겨진 채 수북히 쌓여있다. 하얀 시트 위에 길고 짧은, 곱슬거리는 까만 털들이 군데 군데 묻어 있다. 침대 머리맡에서 뭔가 나의 시선을 강렬히 잡아당겼다. 귀고리 한쌍이 순순히 모습을 드러낸다. 이렇게 쉽게 발견되다니. 우러나온 녹차의 앙금이 서서히 가라앉듯 실망스런 감정이 내려앉는다.

한 번 쯤 베개를 잡고 뒤흔들던가, 시트를 걷어봐야 될 줄 알았건만 귀고리는 침대 머리맡에 얌전하게 놓여 있는 것이다. 나는 조끼에 달려 있는 좁은 호주머니에 귀고리를 조심스럽게 넣는다. 전등스위치를 끄고 붉은 전등이 밝히고 있는 복도로 나와서 506호 문을 등 뒤로 잡아당긴다. 단단히 문이 걸리는 둔탁한 소리가 텅 빈 복도에 공허하게 울려퍼진다.

나는 엘리베이터의 벌려진 입으로 들어간다. 1 버튼을 누르자 약간의 진동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내려가기 시작한다. 하강하는 승강기의 작은 진동과 함께 뱃 속이 출렁거리는 듯하다. 엘리베이터를 지탱하는 굵은 줄이 끊어진다면 나도 함께 지하로 추락하고 말겠지. 나는 벽면에 손을 짚고 몸을 기댄다. 금속의 차가운 감촉에 소스라치며 나의 몸이 떨려온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온 나에게 상우는 다짜고짜,

“내 말이 맞지? 없지?”

라며 장담한다는 투로 말한다.

“…… 응? …… 맞아. 없어.”

전화벨이 울리고 수화기를 통해 한층 다급해진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죄송합니다. 아무리 찾아도 안보이네요. 소지품을 한번 잘 찾아보시겠어요.”

“아니예요. 분명히 있을텐데요. 침대 머리맡에 놓아둔 게 기억나는데, 나올 때 깜박 잊
고 챙기질 못했어요. 저한테 무척이나 소중한건데 어떻게 찾을 수 없을까요?”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더 애처로워지며 간절해지는 듯하다.

“글쎄요, 손님이 말씀하신 곳도 제가 확인해 보았는데 없더군요. 그러면 다시 한번 찾아보고 발견되면 보관해놓도록 하겠습니다.”

“그거 다이아몬……. 아니, 개인적으로 무척 중요한 거예요. 찾아주면 사례는 충분히 해드릴테니 각별히 부탁드려요.”

나는 순간 귀가 번쩍 띄였다. 그녀가 얼버무릴려고 했던, 다이아몬드라는 말을 나는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귀중품은 잘 챙기셨어야죠. 이미 그 방에는 다른 손님이 투숙했습니다. 사실 이런 곳에서 잃어버린 물건을 되찾는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죄송합니다. 나중에라도 발견된다면 저희 업소에서 보관해 놓겠습니다만.”

나는 너무나도 침착하게 그녀에게 훈계까지 하고 있었다.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앙칼진 살쾡이가 발톱을 세우고 있는 장면을 순간적으로 보았던 것도 같다. 평상시 사소한 거짓말을 하더라도 쉽게 얼굴이 발개지고 몸이 떨려오던, 천성이라고 믿었던 기질이 여태껏 스스로를 속인 듯 하다. 나의 어디에 이런 면이 있었던가. 그러나 이러한 일면이 희열로 되돌아오는 것은 어떠한 연유인가. 더 이상 어둠속에서 발견되는 내 눈빛에도 놀라지 않을 자신감이 생겨난다. 귀고리가 탐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난 액세서리를 즐기는 편은 아니다. 허나, 마름모꼴의 다이아몬드가 어둠속에서 숨죽이며 곱게 앉아있는 모습은 나의 내면에 숨어있던 야릇한 감정을 자극해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면서도 나는 그녀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 귀고리를 주인에게 돌려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엘리베이터 은빛 철제에 내 눈빛이 둔탁하게 충돌했을 때 난 어떠한 결심도 하지 않고, 다짐도 하지 않은채 이미 스스로의 욕망을 억누를 수 없었다. 온몸이 떨려왔다. 그러나 그녀의 전화가 왔을 때, 난 너무도 침착하게 응답하고 있었다.

곱빼기 우동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운 상우는 계속 꾸벅꾸벅 졸더니 이제 아예 코까지 곤다. 지배인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사복으로 갈아입고 가방 끈을 손에 둘둘 말아 상우의 옆구리를 툭 건드린다. 상우는 양팔을 들어 기지개를 펴며 잘 가, 라며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인다.

출입구의 자동문이 열리고 밖으로 나오니 새벽 공기가 차다. 나는 몸을 움츠리며 외투의 깃을 바싹 올리고, 뒤돌아섰다. 쉬지 않고 달려가는 전동차처럼 궁전은 부지런히 깜박거리고, 벽면에 부착된 백조는 여전히 붉은 하트를 향해 날개짓을 멈추지 않고 있다. 날갯죽지를 활짝 벌려 날개를 위아래로 계속 움직여도 백조는 왜 아직까지 하트에 다다르지 못할까. 백조가 바지락거리며 날개를 치는 모양이 공허하게 느껴진다. 달려도 달려도 계속 원점에 머무르고 마는 순환열차처럼 부질없는 파닥거림인가. 전원스위치를 꺼둘 걸. 중얼거리는 내 목소리가 허공에 하얀 입김으로 머물다 금세 사라진다. 거리를 채우고 있던 어둠이 어느새 점차 걷어지고 있다.

밤거리의 궁전 주변을 돌면, 급하게 움직이는 전광판과 네온사인으로 가득한 거리가 번화하다. 화려하다 못해 천박한 기운이 번들거리는 골목. 낮이 되면 허연 달처럼 창백해지는 거리를 보며 처음에 가졌던 생경스러움은 점차 사라져갔다. 나도 어느새 이 밤거리에 젖어있는 것일까.

아직 새벽은 가지 않았다. 내 방 창으로 모래 벌판이 보인다. 트럭들이 등을 치켜들며 일제히 모래를 쏟아부었을 때, 그것은 그저 모랫덩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한 알, 한 알 모래가 쌓이더니 사막이 생겨난거다. 어느날 오후, 눈부신 햇살이 모래에 와 부딪히고 그것은 금빛 사막이 되어버렸다. 멀리 펼쳐져 있는 언덕배기 끝에는 왠지 그 너머로 태양이 떠오르듯, 알 수 없는 내일이 떠오르고 말 것 같은 두근거림이 찾아왔다. 사람들은 이곳에 사막이 있는 걸 거부했다. 굴삭기가 요란한 기계음을 내며 움직이고, 고철이 쩌렁쩌렁 부딪치며 울리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합판으로 얼기설기 겹쳐놓은 사무실 지붕 위에 폐타이어가 드문드문 얹혀져 있는 풍경. 나도 그랬다. 이곳에서 낙타를 보기전 나도 사막을 거부하고 있었다. 늦게까지 잠을 설치며 창 밖을 바라보고 있으면, 중천에 떠오른 해가 온 세상을 기막힐정도로 밝히고 있을 때가 있다. 오후의 무수히 많은 화살같은 햇살은 사막의 셀 수 없는 모래 알갱이들에 가 꽂히고 다시 나의 눈을 겨냥한다. 눈부셔서 제대로 눈을 뜨지도 못하고 있을 때, 가끔 그곳에 낙타가 보였다. 낙타는 길게 자란 털 사이로 눈이 가려진 채 가는 다리로 하염없이 거닐고 있다. 누굴 태우고 있었을까. 낙타등에 내가 올라타려고 하면 낙타는 엉덩이를 크게 흔들며 거부한다.

사막너머로 아직 달아나지 않은 별들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사막 저편으로 수십 개의 십자가가 보였다. 붉고 하얀 십자가. 내게 있어 그건 꼭 무덤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의 시선 속에, 그것은 어둠 속에 갇힌 둥근 도시의 묘비처럼 보이는 것이다. 왠지 불길한 덫처럼 느껴지고 가슴이 갑갑해져 왔다. 언제부터 일까. 무수히 많은 저 불빛들 하나하나 욕망의 씨앗을 담고 있는 듯하다. 내 안에도 언제부터인가 나도 모르는 씨앗이 심어졌는지도 모른다. 작고 단단한 작은 알갱이가 내 깊숙한 곳에 또아리를 틀고 앉아있는 것만 같다. 누군가 나를 할퀴면 나의 내부에서는 또 다른 내가, 두터운 껍질을 찢어발기고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은 것이다.

다이아몬드라고 했다, 여자는. 나는 지갑을 열어 귀고리를 꺼내본다. 달랑, 달랑. 고리 모양 금줄에 마름모 무색보석이 창으로 내리치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흔들리고 있다. 그 빛살을 지켜보며 나는 아득한 꿈 속으로 달려갔다.

다음 날, 궁전으로 가는 길에 나는 금은방 앞에 서서 쇼윈도 안을 들여다보았다. ‘금은 매입합니다’ 유리칸막이에 부착된 글귀가 나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진열장에는 진귀한 보석들이 주목을 받지 못해 권태로운 듯 놓여있다. 흑진주와 백진주, 천연양식 진주가 사각 케이스에 조화롭게 배열되어 있고, 세공된 금파호박 반지, 팬턴트, 귀고리 삼종 셋트로 어우러져 둥근 불빛 아래에서 우아하게 자태를 뽐낸다.

안에 들어와서 보시죠. 인상좋은 아저씨가 반쯤 열려진 문 사이에 서서 나를 보며 말했다. 상점 안으로 들어선 나는 초승달 모양의 유리 선반으로 다가섰다. 군청색의 엠퍼러 샤파이어 반지, 보랏빛 환타스틱 자수정 반지와 루비 외에도 여러 보석들이 서로의 맵시를 견주고 있다.

“이건 다이아몬드인가요?”

나는 팔각형 무색 보석이 박힌 반지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닙니다. 그건 브릴리언트 캐럿입니다. 다이아몬드는 이겁니다. 1캐럿이죠.”
다이아몬드라고 가리킨 그 보석은 그저 깔끔하고 단순한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화려하지 않네요. 이건 루빈가요? 가격이 다른 것에 비해 싸네요.”
붉은색 루비 귀고리 앞에 일만 이천원, 작은 가격표가 붙어있다.

“그건 모조루비입니다.”

하나하나가 화려하고 세밀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어서 특별한 어떤 것이 인상깊게 다가오지 않았다. 나는 가짜와 진짜 보석을 구별할 자신이 없었다. 오히려 모조가 더 진품같고 값비싸게 보였다. 그녀는 이것들 속에서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있을까. 나는 지갑에서 귀고리를 꺼내 보석상에게 내밀었다.

“이거 다이아몬드라고 하던데…… 선물받았거든요. 근데 돈이 좀 급하게 필요해서. 혹시 팔 수 있을까요? 꼭 금만 매입하시나요?”

“아닙니다. 다른 보석도 팔려고 내놓는 분이 있으면 삽니다. 다만 흠집이 많이 나 있으면 가격을 많이 쳐드릴 수가 없어요. 그럼 잠깐 볼까요.”

그는 선반에 놓인 돋보기로 귀고리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근데, 이건 모조입니다. 다이아몬드가 아니군요.”

“네?”

나는 놀라 반문하며 주인을 쳐다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다이아몬드라고 했다, 그녀는. 그녀는 이것이 다이아몬드라고 믿고 있었다. 궁전으로 가는 길, 나는 그녀에게 이 보석을 돌려주고 싶은 강렬한 유혹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의 연락처를 받아두지 않았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일주일 후, 여자가 왔다. 남자가 여느때와 다름없이 숙박부를 기재하고 여자와 함께 엘리베이터 속으로 사라져갔다. 나는 5, 0, 6 전화버튼을 누른다. 수화기에서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귀고리를 찾았습니다. 연락처를 몰라서 연락을 못했습니다.”

“지금 바로 내려갈께요.”

나의 말이 끝나자마자 여자는 재빨리 대답한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여자가 나타났다. 나는 귀고리를 내밀었다. 여자의 얼굴이 먹구름이 걷히 듯 환해졌다.

“찾게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고마워요. 저, 이거는 사례금이에요.”

그녀는 바지 주머니에서 지폐를 내밀며 말한다.

“아니,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고마워서 그래요.”

사양하려던 나의 말을 그녀가 가로챈다. 소중한 물건을 되찾은 그녀는 환한 웃음을 거두지 못한다.

“선물받은 건가 봐요?”

나는 조심스런 말투로 묻는다.

“네. 이렇게 비싼 건 처음이거든요. 사실은, 이거 진짜거든요.”

여자가 마름모꼴 귀고리를 흔들어보인다. 여자의 의심없는 목소리가 나를 혼란에 빠지게 한다. 자신감있는 여자의 대답이 그것은 진품일 것이며, 보석상 주인이 혹시 순간적인 판단오류를 범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다 문득 여자의 밝은 미소가 공허하게 느껴졌다.

“정말 이쁜 귀고리군요.”

여자는 고맙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엘리베이터 속으로 들어갔다. 닫힌 엘리베이터 문이 답답하게 느껴진다. 나는 현금을 한 장, 한 장 세어본다. 십만원이다. 사례금치곤 많은 액수였다. 푸른 세종대왕의 모습을 바라보며 불쑥 허망한 감정이 치밀어올랐다. 나는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띠오띠오 선반 아래 작은벨이 울면서, 주차장으로 진입하고 있는 차가 카메라에 잡혔다. 지배인은 요즘 어디를 다니는지 자리를 제대로 지키는 법이 없다. 화장실에 갔다왔는지 바지를 추켜올리며 나타나는 상우에게 나는 엄지를 내민다. 상우는 곧바로 지하로 뛰어간다. 청춘의 남녀가 계단으로 올라온다. 그들에게 열쇠를 건넨다. 그들은 엘리베이터 오름단추를 누른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3에 켜진 불빛은 움직이지 않는다. 엘리베이터가 고장난 것 같다며 그들은 손을 잡고 계단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마침 상우가 지하 계단에서 올라오는 것이 보인다.

“상우야! 엘리베이터가 고장났나봐. 3층에서 멈췄어.”

상우는 카운터 아래에 있는 공구세트를 챙겨 3층으로 올라간다. 지배인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십분쯤 흘렀을까. 상우가 내려왔다.

“사람 불러야겠는 걸. 원인을 모르겠어.”

“이거나 붙여놔야 겠다. 사람은 내일이나 올 수 있을걸.”

나는 서랍에서 푯말을 꺼내 꼭대기에 접착테이프를 붙이고 상우에게 건넨다. 상우는 엘리베이터의 굳게 닫힌 문 한가운데에 ‘점검중’ 표시판을 붙인다. 자동문 밖으로 익숙한 형태가 눈길을 잡아끈다. 나는 눈을 끔벅거리며 크게 치켜뜨고 초점을 맞추려 미간에 힘을 준다. 지배인과 미스정이 손을 잡고 걸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지배인의 거동이 요즘 수상쩍다 싶었다. 둘은 언제부터 가까워진 것일까.

밤참을 먹은 지 삼십분도 안돼서 지배인과 상우는 카운터 안쪽에 놓인 쇼파에 몸을 기대며 자고 있다. 디지털 시계가 05:40을 나타내고 있다. 나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조심스럽게 상우를 깨운다. 하품을 하며 눈을 비비는 상우에게 나는 쉿, 하며 검지손가락을 입에 갖다댄다. 그리고 상우의 손을 잡아 조심스럽게 카운터 밖으로 이끈다. 맥박이 미치도록 뛰고 있는 게 느껴졌다.

“나를 원해?”

내가 새벽 기운에 졸리운 듯 허스키한 목소리로 속삭이자 상우는 놀란 듯 상우는 눈을 동그랗게 뜬다.

“으응? 그, 그럼.”

“파라다이스 알지? 퇴근하고 506호로 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응? 만 반복하다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핸드백을 어깨에 메고 카운터 안 벽에 부착된 백조의 전등 스위치를 내린다. 상우에게 손을 흔들며 자동으로 열려진 출입문 밖으로 나온다. 또각또각 울리는 구두소리를 세다가 나는 뒤를 돌아본다. 궁,전 붉은 글자가 느릿느릿 깜박인다. 새가 사라졌다. 어둠에 가려 하얀 백조의 날개짓은 멈추었다. 내일이 오더라도 뜨거운 심장에 백조의 날개가 닿는 일이란 없겠지. 금방이라도 순백의 백조가 어둠 속에서 날아오를 것만 같다. 그러나 벽면은 조용히 숨죽이고 있다.

나는 파라다이스 출입문 앞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진정 파라다이슨가. 힐끗 출입구 계단에는 노랑 빨강이 섞인 비로드가 깔려 있었다. 출입구를 밀며 들어섰을 때, 딸랑, 문 위에 달린 종이 흔들린다. 카운터에서 인기척에 설잠을 깬 젊은 남자가 벌떡 일어선다. 그의 눈빛이 낯설지 않다.

“506호 방으로 주세요.”

나는 506호 여자가 사례금으로 준 돈 일부를 꺼내 남자에게 내민다. 젊은 남자가 내미는 키를 받아들고 나는 엘리베이터의 오름단추를 누른다. 기다렸다는 듯 자동문이 열리고, 나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선다. 승강기가 올라가는 소리가 울린다. 2, 3, 5. 파라다이스도 4층은 없군. 숫자판에 차례대로 불이 들어오다, 5의 불빛이 꺼지고 문이 덜컹 열린다. 엘리베이터가 오르락내리락 하며 움직일 때 내 뱃속에는 알 수 없는 쾌감이 퍼져온다.

나는 복도를 걸어가 506호 문을 연다. 벽면에 붙은 키꽂이에 열쇠를 넣자 실내가 드러난다. 달칵, 문을 닫으니 갑자기 정적이 맴돈다. 나는 고요한 방 안으로 들어간다. 장미 무늬 벽지의 방, 창가에는 자줏빛 거튼이 조용히 내려앉아 새벽 기운을 감추고 있다. 나는 시트가 겹겹히 깔려있는 침대에 앉는다. 앞쪽에 놓인 화장대에 붉은 갓이 씌어진 전등이 보인다. 발에 감촉되는 카펫이 까끌까끌하다. 방 안에 알 수 없는 분위기가 감도는 듯하다. 이렇듯 냉정할 수 있는 자신에게 놀라움을 느낀다. 나는 묶은 머리를 풀고 입었던 옷을 하나씩 벗어던진 후 욕실로 들어간다. 샤워기를 틀자 따듯한 물이 쏴아 소리를 내며 뿜어져 나온다. 하얀 거품이 풍성하게 일도록 온 몸에 비누칠을 한다. 그리고 뜨거운 물줄기를 느끼며 비눗기를 씻는다. 나는 거울 앞으로 다가간다. 김이 서린 거울면을 닦아낸다. 손등이 스친 자리가 선명하게 드러난 거울면에 내 모습이 비친다. 송글 내 얼굴에 땀인지 물기인지 물방울이 맺혀있다. 나의 눈동자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두려움과 알 수 없는 기대감에 내 동공이 울렁이고 있다. 목욕실에서 나온 나는 방으로 돌아와 거울 앞에 선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어깨 위로 뚝 뚝 물방울이 떨어진다. 거울 앞에 선 나는 몸에 두른 하얀 수건을 걷으며 붉은 등을 켠다. 온 방 안이 타오르는 듯하다. 벽지는 장미빛으로 물들고, 새하얀 시트도 나의 몸도 붉게 물들었다. 내 눈과 전라로 서있는 여자의 눈과 마주친다. 여자는 타인처럼 나를 응시하고 있다. 그녀의 눈빛이 도발적으로 흥분되어 있다. 난 뒤를 돌아보았다. 조그만 탁자 위에 찻주전자와 두 개의 잔이 놓인 쟁반 하나가 놓여있을 뿐이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상우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다시 커다란 수건을 몸에 두르고 문을 연다. 상우가 어둡다며 불을 키려고 하자 나는 그의 손을 저지하며 침대 앞으로 이끈다. 그의 옷을 하나씩 벗기자 단련된 근육이 나타난다. 상우와 나는 눈이 맞춘다. 그리고 동의하듯 주위를 두리번 거린다. 어떤 시선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재빨리 방안을 훑어본다. 볼테면 보라지. 우리는 연인처럼, 타인처럼 서로의 몸을 탐닉해나갔다. 카메라 앞에 선 배우처럼 행동을 오버하기도 한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듯 그를 올라타고 그는 참지못하는 욕망을 나에게 쏟아부었다.

상우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서둘러 옷을 입고 등 뒤로 506호 문을 닫으며 나온다. 길게 나 있는 복도를 걷는다. 새벽은 조용하다. 카펫을 밟는 구두 소리가 사박사박 텅 빈 공간에 튕겨진다. 나는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벽을 더듬으며 내림 단추를 누른다.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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