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가 『방법서설』(Discours de la Methode, 1637)에서 처음 표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서양 근대철학의 서막을 여는 선언이다. 사실 추론이 아니라 직관이므로 ‘그러므로’라는 표현이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이 발언은 당시 신학 및 종교계의 시선을 벗어나려는 회피기동을 감안하고서도 매우 대담한 발상이다. 데카르트의 프로그램은 인식의 명석·판명한 아르키메데스적 입점을 확보함으로써 기존의 고대적·중세적 세계관을 탈피하여 이성을 통한 확고한 세계인식을 구축하려는 목표를 가진다. 세계의 중심으로서의 인간 주체의 탄생은 이제 되돌릴 수 없는 역사적 필연성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세상의 많은 일이 그러하듯 철학에도 항상 순기능과 역기능이 존재한다. 생각하는 주체에 대한 데카르트의 강조는 한편으로 세계 속에서 인간의 위상을 확고히 하는 긍정적인 측면과 세계와의 단절을 초래하는 부정적인 측면을 동시에 가진다. ‘사유하는 사물’(res cogitans)로서의 자아는 구체적 세계 안에 있는 구체적 인간으로 고찰되지 않았다. 순전히 의식 안에 살고 있는 자아란 사물(res extensa)과의 접촉을 상실하고 만다. 따라서 데카르트로부터 한편으로는 세계 없는 주체, 다른 한편으로는 단순한 객체를 세워 실재를 양분하는 근대적 분열이 시작된다. 이 분열은 ‘구조’와 ‘관계’를 강조하는 탈근대적 치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인간과 세계, 주체와 객체를 이분법적으로 바라보게 하고 있다. 이 분열적 사고가 바로 소위 객관적인 세계인식과 유용성과 폭력성이라는 양면성을 안고 있는 기술 영역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가작성(可作性, Machbarkeit)의 근원지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는 근대화라는 미명아래 진행된 계몽이 스스로 계몽되어야 할 상황에 처한다는 ‘계몽의 변증법’이라는 역설로 귀착된다.

  조금 더 데카르트의 ‘생각’에 대해 살펴보자. 데카르트는 이성의 소유를 인간과 기계 또는 다른 동물을 구별하는 기준으로 삼고 있는데, 이때 이성 개념은 주어진 여건에만 자동으로 대처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상황에 대하여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이러한 능력은 또한 인간으로 하여금 언어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 우리가 데카르트의 이성개념과 데카르트 이후의 수용을 구분할 수 있다면 데카르트의 이성개념은 오늘날 표준화된 과학적·논리적 사유만을 의미하지 않고 아리스토텔레스가 프로네시스(phronesis)로 부르는 ‘실천적 지혜’도 함축하는 것처럼 보인다. 프로네시스는 인간이 직면하는 다양한 상황에서 올바른 일을 하는 것과 어떻게 그것을 하는지를 배우는 능력이다. 데카르트는 사유를 폭넓은 의미로서 감정이나 의지, 요컨대 의식의 전 영역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근대의 이성 개념은 칸트를 통해 이론이성과 실천이성 그리고 (반성적) 판단력의 틀에서 체계적으로 재구성되는데, 각각 지적 능력, 도덕적 능력 그리고 심미적 능력에 대응한다. 그럼에도 근대화와 산업화의 과정에서 인간의 지적 능력에 본질적인 의의를 부여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그것은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다.

  대학교육의 이념에 대한 논쟁이 있지만 대학 교육은 건전한 시민들을 양성하기 위해 기술적 역량들을 단순히 습득하는 차원에서 벗어나 다양한 정신적 층위들을 균형 있게 함양하는 전인교육을 지향해야 한다. 세상이 바뀌었는데 이런 교육이 과연 가능하고 필요하냐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고, 그들의 주장은 어느 정도 정당하다. 그러나 그들에게 바뀐 세상만을 보지 말고 바뀐 인간성도 바라보기를 권유하고 싶다. 과학적 기술과 사회적 제도가 인간세계에서 그 참된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각성된’ 인간에 의한 ‘올바른’ 사용이 전제되어야 한다. 만약 기술과 제도가 오용된다면 인간세계에 엄청난 폐해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냉철하게 사유하고 바르게 실천하며 음미할 줄 아는 전인적 인간은 여전히 우리 대학이 지향해야 할 인간상이다. ‘알파고’의 등장이 사사하듯 앞으로도 인간사회에서 많은 변화가 생겨나겠지만 인간은 여전히 ‘돌봄’이 필요한 존재이고 이때 ‘영혼을 돌보는 학문’의 가치는 더욱 주목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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