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이 영화를 만든 건 일종의 속죄 의식이에요.’ 조정래 동문(영화학과 92학번)은 올해 많은 사랑을 받은 영화 <귀향>의 감독이다. 지난 2002년 위안부 피해 할머님들을 만나 뵌 뒤 남성으로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느꼈다는 그. 한번 상영될 때마다 한 분의 ‘넋이 돌아온다’는 의미로 <귀향>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영화가 나오기까지 숨겨진 뒷얘기와 <귀향>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들어 보았다. 
 
▲ 사진제공 제이오엔터테인먼트
 
<귀향>은 마음으로 만든 영화
피해자 수만큼
20만 회 상영이 목표
 
처참한 일본군 ‘위안부’의 진실
세상에 널리 알리고 싶다
 
마포구의 한 사무실. <귀향> 포스터가 걸린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조정래 동문의 아지트가 나온다. 이곳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알리고 많은 이들의 가슴을 뜨겁게 한 영화 <귀향>이 제작된 사무실이다. 조정래 동문은 14년의 기다림 끝에 <귀향>을 세상에 선보였다. 350만이 넘는 국내 관객을 넘어 칸 영화제의 부름을 받아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를 만났다.
 
  -영화 <귀향>이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한창 바쁠 것 같다.
  “다음달까지 각종 강연, 관객과의 대화 등의 일정이 있어요. 최근에는 영화 상영 차 위안부 피해 할머님들을 모시고 미국에 다녀왔고요. 그래도 개봉 시기에 비하면 여유로워요.(웃음)”
 
  -해외 관객의 반응은 어떤가.
  “영화를 보고 나서 깜짝 놀라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진짜 벌어졌던 일이냐고 되묻곤 하시죠. 상영이 끝난 후에는 따로 찾아와 ‘알려줘서 고맙다’,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다’고 말씀하세요. 펑펑 오열하는 미국인도 있었죠. 아직 해외에는 위안부 문제 자체를 모르는 분들이 많기 때문에 더욱 알릴 필요가 있다고 느꼈어요.”
 
  -지난 2월 개봉 후 국내 관객 수 350만 명을 넘겼다.
  “정말 감사드려요.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총 20만여명의 위안부 피해자분들이 계시는데 지금까지 약 10만번 상영됐거든요. 피해자의 넋을 기리는 의미에서 영화를 제작한 만큼 앞으로 10만번은 더 상영하고 싶어요. 오는 8월부터는 일본, 9-11월에는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을 다니며 널리 알릴 겁니다.”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사실 저도 위안부 문제에 대해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사람 중 하나였어요. 거의 모르는 상태나 다름없었죠. 그런데 2002년 위안부 피해 할머님들이 계신 ‘나눔의 집’으로 봉사활동을 갔다가 강일출 할머님의 ‘태워지는 처녀들’이라는 그림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그 후 위안부 피해자 증언집을 통해 알게 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사실은 끔찍했어요. ‘내가 잘 몰랐던 것처럼 대부분 그렇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문제를 알리고자 영화화하기로 했죠.”
 
 
 
나눔의 집을 다녀온 후 그는 뜨거운 마음으로 곧장 시나리오를 써내려갔다. 완성된 시나리오가 세상의 빛을 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위안부 피해 문제를 다룬 <귀향>을 제작하겠다고 나서는 제작사가 없었다. 마땅한 배급사도 찾지 못해 수많은 상영관 중 어느 곳에서도 <귀향>에게 내줄 자리는 없었다. 과연 영화가 무사히 완성되어 세상에 나올 수 있을지. 불투명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시나리오 집필 후 개봉하기까지 14년이 걸렸다고 들었다.
  “2002년 시나리오를 챙겨 들고 투자를 받기 위해 돌아다니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가는 곳마다 번번이 거절당했죠. 당시 저를 비롯해 꽤 많은 감독님이 위안부 관련 영화를 제작하려고 시도했지만 대중성, 흥행논리 등에 밀려 실패했다고 알고 있어요.”
 
  -제작이 여의치 않을 때 어떻게 버텼나.
  “꾸준히 한국 음악을 해온 터라 공연을 하며 제작비를 벌었어요. 당장 영화를 만들지 못하더라도 ‘언젠가 꼭 만들리라’ 생각하면서 위안부 문제를 알릴 수 있는 영상을 꾸준히 제작했죠. 그동안 <두레소리>, <파울볼> 두 편의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고요.”
 
  -마음 한편에는 항상 <귀향>이 있었나 보다.
  “맞아요. 누군가는 저한테 기승전 ‘귀향’이라고 하더라고요.(웃음) 상황이 여의치 않아 두 편의 영화를 만들기도 했지만 결국 그 모든 게 <귀향>을 위한 준비였다고 봐요. 제가 처음 나눔의 집에서 받았던 느낌과 위안부 문제를 처음 접했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었으니까요.”
 
  -마침내 지난 2월 <귀향>이 개봉했다.
  “영화를 위해 후원해주신 7만5000여명이 넘는 분과 일인 다역을 맡아가며 고생한 스태프, 배우들. 그 외에도 많은 이들의 재능기부까지. 헌신적으로 도와주신 분들이 있었기에 <귀향>이 제작되어 세상에 나올 수 있었죠. 아마 감독은 저이지만 영화를 후원해주신 한 분 한 분 모두 각자 자신이 직접 일군 영화라는 애착을 갖고 계실 거예요. <귀향>은 ‘마음으로 만든 영화’라고 생각해요.”
 
  -이렇게까지 관심과 성원을 받을 거라고 예상했나.
  “사실 이건 정말 기적이에요. 다른 말로는 표현을 못하겠어요. 개봉 당시 ‘적은 상영관 수에 속상하진 않냐’는 질문에 ‘감사하다’고 답했어요. 영화를 제작할 때는 1-2개 극장에서라도 상영되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이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을까’ 싶은 정도로 막막할 때마다 기적처럼 도움의 손길이 이어졌어요. 결국 어마어마하게 많은 분이 봐주셨죠.”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저도 명확히 이해하기는 힘들어요.(웃음) 하지만 분명한 건 <귀향>을 통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회적 공감을 느낄 수 있었어요. 지난 합의안에 대한 불만과 이 문제만큼은 바로 잡아야 한다는 국민의 열망이 <귀향>으로 표출된 것 같아요. 마음 한편에 자리 잡은 문제의식이 영화 관람으로 이어진 거라고 생각해요.”
 
  -촬영하면서 가장 유념한 부분은 무엇인가.
  “증언을 바탕으로 한 영화이기 때문에 ‘얼마나 현실감 있게 보여주느냐’가 첫 번째 과제였어요. 당사자에게는 고통스러운 기록인 만큼 피해 할머님들은 물론 당시 평균 피해 연령대가 16세인 점을 고려했을 때 10대 연령층도 함께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게 두 번째였어요. 자극적인 내용에 치우쳐서는 안 되지만 실제로 자행된 일본군의 무차별적인 폭력 사실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었죠.”
 
  -매 장면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어느 하나 힘들지 않은 장면이 없었어요. 배우와 스태프들 모두 촬영하면서 많이 울었죠. 특히 배우들은 세트장에 들어가기만 해도 심리적으로 굉장히 힘들어했어요.”
 
  -어린 배우들이 감당하기엔 힘들었을 것 같은데.
  “그렇죠. 다들 어린 친구들이었기 때문에 촬영과 함께 정신과 전문의의 심리상담을 병행했어요. 그런데도 많이 힘들어했죠. 하지만 피해를 알리려는 배우들의 의지가 컸어요. 촬영 전 나눔의 집에 가서 할머님들을 만나 뵙고 증언록을 읽으며 다들 마음 아파했죠. 대본 연습과 리허설을 수차례 반복한 터라 막상 현장에서는 거의 NG가 없을 정도로 잘해줬어요. 보통 친구들이 아니에요. 저는 그 친구들을 제가 모시는 ‘신’이라 불러요.”
 
 
 
<귀향>은 정민(강하나) 중심의 과거와 은경(최리) 중심의 현재를 넘나든다. 불운의 사건으로 눈앞에서 아버지를 잃고 신기를 갖게 된 은경은 우연히 영옥(손숙)의 한복집에 방문한다. 그곳에서 위안부로 끌려간 정민의 ‘괴불 노리개’를 발견하고 그를 통해 과거 위안부 피해 소녀들의 참혹한 실상과 아픔을 보게 된다.
 
  -위안부 피해 소녀들과의 매개자 역할을 하는 ‘은경’이라는 인물이 흥미롭다.
  “작가이자 연출가로서 주인공 한 명을 꼽자면 바로 ‘은경’이에요. 아픔을 겪은 은경을 통해 위안부 피해를 입은 소녀를 안아준다는 구조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은경을 연기해줄 배우를 찾는데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은경 역시 성적 피해를 입은 여성이다. 어떤 의미가 있나.
  “여러 의미가 있는데 우선 위안부가 과거만의 일이 아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아직도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가 사회에 만연하고, IS같은 테러 집단에는 성노예가 존재하죠. 마지막에 등장하는 일본군의 모습도 아직 사회에 이러한 문제가 남아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의도에요. 위안부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다는 의미도 있어요.”
 
  -중앙대 무용학과 출신의 배우 최리가 은경 역을 맡았다. 어떻게 캐스팅하게 됐나.
  “2011년 개봉된 <두레소리>라는 영화를 찍을 당시 ‘국립전통예술학교’의 학생이었어요. 당시 고등학생이던 그 친구에게 은경 역을 제의했고 거절당했죠.(웃음) 대학을 붙고 나서 그 친구에게 다시 연락이 왔어요. 결국 은경 역을 진심을 다해 소화했죠. 눈빛이 남다른 친구예요.”
 
  -한편 인간성이 상실된 상황에서 일본군 ‘다나카’와의 교류가 눈에 띈다. 다나카는 어떤 인물인가.
  “다나카라는 캐릭터는 할머님들의 증언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인물이에요. 들어와서 ‘자신이 있는 동안은 좀 쉬어라’ 말하기도 하고, 어떤 어린 일본군은 품에 안겨 펑펑 울다 나가기도 했대요. 일본군 역시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인 거죠. 다나카를 통해 당시 일본군이 처한 상황과 전쟁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황폐해지는지 보여주고자 했어요.”
 
  -결국 모두가 전쟁 속 피해자라는 건가.
  “그렇죠. 일본군 성노예 시스템은 굉장히 잔인해요. 소녀들은 하루에 많게는 50명 정도의 군인에게 시달리고 그러다 결국 죽임을 당해 교체되죠. 끔찍한 실상에도 일본군들은 마치 화장실 가듯 또 줄을 서 있어요. 입장권을 내듯이 군표를 보여주고요. 한마디로 ‘죄책감을 거세시키는 시스템’이죠. 이런 시스템을 만든 일본 제국주의의 A급 전범들은 반성의 기미 없이 대대손손 잘 살고 있어요. 부끄러운 역사임을 아니까 자꾸 부정하는 거예요.”
 
 
‘가시리 가시리잇고/버리고 가시리잇고/날 더러 어찌 살라고/버리고 가시리잇고’ <귀향> 중간에는 맑은 목소리로 ‘가시리’가 울려 퍼진다. 위안부 피해 소녀들의 넋을 달래는 무속의식 장면에서도 전통 악기가 어우러진 장단이 관객의 귀를 사로잡는다. 조정래 동문이 국악계에서는 판소리 고수로 더욱 유명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영화의 음악이 예사롭지 않음을 이해할 수 있다.
 
  -국악에도 일가견이 있다고 들었다.
  “맞아요. 국악계에서는 국악인으로 많이 알려져 있죠. 학창시절부터 관심을 갖고 활동을 해서 무형문화재 판소리 고법을 이수하기도 했어요.”
 
  -그래서인지 <귀향>의 음악이 남다르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정말 뿌듯해요.(웃음) 아무래도 학창시절부터 꾸준히 국악에 관심을 갖고 활동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귀향>에도 국악의 요소가 스며들었죠.”
 
  -영화학과에 진학하게 된 계기는.
  “중 고등학교 때 연극반 활동을 오래 했어요. 당시 선생님께서 연출을 권해주셔서 영화학과에 진학했지만 처음부터 영화감독이 돼야겠다는 생각은 아니었죠.”
 
  -어떻게 마음을 잡게 됐나.
  “93년도에 본 영화 <서편제>가 결정적인 계기였어요. 입학하고 나서 1년간 방황하다 우연히 <서편제>를 봤는데 너무 좋아서 극장에서 5번이나 봤어요. <서편제>를 계기로 국악에 푹 빠졌고 전통 문화적 요소가 담긴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이끌리듯이 판소리와 북을 배우기 시작했죠.”
 
  -전통문화에 관한 관심이 남다른 것 같다.
  “그런 것 같아요.(웃음) 국악을 할 때면 정말 행복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전통문화를 알릴 수 있는 콘텐츠를 고민하게 된 거고요. 어떻게 보면 <귀향>을 만들기까지 깊은 인연이 된 것 같아요. 나눔의 집으로 판소리 봉사활동을 갔다가 위안부 할머님들 얘기를 알게 된 거니까요.”
 
현재 그는 ‘제이오엔테인먼트’를 설립해 전통 콘텐츠 제작에 힘쓰고 있다. 영화 <귀향>은 제이오엔터테인먼트의 세 번째 작품이다. 우리 고유의 것에 대한 사랑과 순수한 정의감으로 똘똘 뭉친 그의 다음 발자취가 더욱 궁금해졌다.
 
  -요즘 관심을 갖고 있는 소재는 무엇인가.
  “우리 사회 ‘소통’의 문제예요. 특히 가족 간의 소통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봐요. 요즘 많은 이들이 타인의 슬픔에 공감한다거나 애통해하는 기본적인 인간 감정이 안타까울 정도로 메말라가고 있는 것 같아요. 세월호 사건을 보면서도 ‘이제 좀 그만하지’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하잖아요. 그런 걸 볼 때마다 충격을 받죠. 제대로 된 진상 규명을 하고 애도해야 하는데도 아직도 해결이 안 되고 있잖아요. 피해 당사자들만 울부짖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어요.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위안부 문제를 정치적인 문제로 보는 이도 있다.
  “이건 정치적 문제가 아니죠. 위안부 문제를 정치적 사안으로 가두려는 사람들이야말로 굉장히 정치적이라고 생각해요. 특히 사회 지도자층이 그렇게 반응할 때는 정말 이건 아니다 싶죠. 위안부 문제를 경제와 엮어 그만하자고 한다든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임에도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태도는 정말 문제라고 생각해요. 잘난 사람이기 전에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춰야죠. <귀향>을 통해 건강한 논의가 일어나고 관심이 실제 해결로 이어진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아요.”
 
  -<귀향>을 통해 메시지가 잘 전달됐다고 생각하나.
  “네. 많은 분이 공감해주셨다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영화를 보고 난 관객들이 가장 많이 해주신 얘기가 ‘고맙다’는 말이었고, 그 다음으로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라는 거였죠. 제가 2002년 나눔의 집에서 느꼈던 마음을 함께 나누게 된 것 같아 값진 성과를 거둔 것 같아요. 막연했던 위안부 문제의 실체를 아는 것이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시작이 되지 않을까 해요.”
 
  -다음 작품이 궁금하다.
  “조선시대 천민 집단이었던 광대의 이야기를 다룰 생각이에요. 광대야말로 우리 전통음악의 계승자이자 창작자거든요. 멋진 국악 가락과 함께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20대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무엇보다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귀향>도 20대 연령층이 정말 많이 봐주셨거든요. 후배 여러분께서 보여주신 관심과 국민의 힘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가 앞으로도 전 세계에 울려 퍼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당신에게 중앙대란?
 
“뜨거운 학창시절을 보낸 곳이에요. 영화학과 학생회장도 맡고 국악에 빠져 실컷 판소리와 북을 배우러 다니기도 했죠. 관심사가 비슷한 친구들과 어울리며 신나게 꿈꾸던 학창시절은 너무도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중앙대에서의 학창시절이 있기에 지금의 제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멋진 후배 여러분들도 세상에 나와 실컷 소통하고 마음껏 원하는 것을 시도해보는 학창시절이 되길 바랍니다. 항상 응원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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