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그렇듯이 지난호 중대신문에도 다양한 내용이 실렸다. 서포터즈 관련 기사는 일간지에 실어도 괜찮을 만한 기획이었다. 일반 학생들이 만나기 어려운 중앙대 동문의 목소리를 전해주는 ‘중대신문이 만난 사람’이나 우리 역사의 이면을 볼 수 있는 유적을 소개한 문화 기획도 주목할 만했다. 하지만 ‘법학관 흡연구역 실태조사’ 기사는 읽을수록 아쉬웠다. 인터뷰 대상 대부분이 익명이었기 때문이다.

‘신문윤리실천요강’에 따르면 기사를 쓸 때 인터뷰 대상자를 밝히게 돼 있다. 실명보도가 원칙인 것이다. 내부 고발자 등 신변 위협이 우려되어 취재원을 보호해야 하거나 실명보도를 하면 명예훼손이 우려되는 경우, 기자가 모든 취재 역량을 다했지만 익명을 요청한 취재원밖에 없는 경우에만 익명을 사용할 수 있다. 이 경우에도 취재원이 왜 익명을 요청했는지, 기자는 왜 이 취재원을 기사에 실을 수밖에 없었는지 기사에 밝히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법학관 흡연구역 실태조사 기사를 보면 대부분의 내용이 인터뷰로 이뤄졌음에도 불구하고 인터뷰 대상자 12명 중 9명이 익명을 사용하고 있었다. 법학관 흡연구역에 대한 인터뷰가 취재원의 신변에 위협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단순히 사안에 대한 생각을 묻는 인터뷰였기 때문에 굳이 익명을 쓸 필요가 없어 보였다. 취재원이 실명을 밝히기 꺼렸다면 실명 공개가 가능한 다른 취재원을 찾아야 했다.

중대신문 홈페이지에서 ‘가명’을 검색해보았다. 동일한 사안에 대해서도 누구는 실명으로, 누구는 익명으로 인터뷰한 기사가 있었다. 반드시 익명을 쓸 필요는 없었다는 방증이다. 무전여행에 대한 추억을 들려준 택시기사를 익명 처리할 이유도 없었다. 특히 1854호에는 교원 연구년과 관련한 법적 사안을 설명하는 변호사까지 가명으로 나왔다. 익명 처리된 전문가의 인터뷰는 신뢰도가 떨어진다. 안 하느니만 못하다. 만약 방송에서 길거리 흡연 때문에 불쾌하다는 인터뷰를 한 사람이나 심도 깊은 사안을 이야기하는 전문가가 모자이크 처리와 함께 음성 변조되어 나온다면 기사에 신뢰가 가기는커녕 웃기지 않겠는가?

익명보도의 필요성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인터뷰도 익명 처리되었다. 기자의 편의를 위해서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익명으로 가득한 기사를 보고 독자는 ‘정말 이런 말을 한 사람이 있을까?’ 혹은 ‘이 발언이 기자 개인의 의견은 아닐까?’라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실명보도는 기사의 신뢰도를 높인다. 누가 어떤 말을 했는지 현장의 목소리를 투명하게 전달할 때 독자들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열심히 뛰어다닌 기자의 노고가 기사에 드러나는 것은 덤이다. 그동안 익명보도에 대해 너무 쉽게 생각한 것은 아닌지 중대신문 구성원들은 생각해봐야 한다. 또한 어떤 내용의 인터뷰에서 가명을 쓸 것인지 기준을 세우기 위한 고민도 필요하다. 
 
 김민준 동문
정치국제학과 11학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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