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다이어트는 콩글리시다. 음식물의 소화 내지는 식이요법을 뜻하지만 주지하다시피 대한민국에선 ‘살을 빼라’는 의미로 통한다. 물론 콩글리시라는 이유만으로 ‘다이어트’라는 사회문화적 현상을 문제시할 이유는 없다. 글로벌 언어로서 영어의 지역적 변용은 숙명 아니겠는가. 원래 뜻이 무엇이건 우리에게 다이어트는 몸무게를 줄인다는 뜻일 따름이다.
 
   
 
출산하는 몸으로부터의 해방
다이어트에 대한 사회학적 접근의 첫 걸음은 이 현상이 역사적 산물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데 있다. 우리들 대다수는 어떤 대상을 원래 그런 것, 즉 자연적인 것 쯤으로 여기고 그러려니 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봐도 세상에 원래 그런 것 따윈 없다는 게 분명해진다. 인간사 모든 것에 역사적이지 않은 게 없다. 단지 우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애초의 기원을 잊어먹을 뿐이다.

서구의 다이어트 문화는 주로 1930~40년대부터 본격화됐다고 한다. 여기서 질문을 던져보자. 왜 하필 1930~40년대고, 이건 대체 무슨 의미를 나타내는 걸까. 다이어트가 주로 여성에게 강조되는 생활 윤리라는 점을 떠올린다면, 여성의 몸에 대한 미적 판단의 시선이 이즈음부터 혁신적으로 바뀌었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전에는? 각종 누드화 등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여성의 몸에서 매력적 요소는 주로 풍만한 바디감에 있었다.

이쯤이면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다이어트 역사의 시작이란 성적 매력에 대한 사회적 판단의 기준이 ‘풍만’에서 ‘날씬’으로 변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물론 이런 변화가 단지 미적 취향의 변화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우리들 대다수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다이어트는 성차별 문제를 동반하는 사회적 현상이자 산업적 이해관계를 초래하는 경제적 사안이며, 각종 신체·정신적인 부작용과 고통을 맛보게 하는 의학적 문제이자 이 사회에서 안녕한 삶을 지속할 수 있게 하는 자존감의 문제다.

아름답고도 건강한 몸의 표준이 마른 몸이 되었단 사실은 여성들에게 부과되던 사회적 윤리가 바뀌었다는 점을 의미한다. 과거 전통사회에서 여성의 몸이 주로 출산을 위한 도구였다는 점을 상기하도록 하자. 냉정히 말해 여성의 몸은 인구 재생산을 위한 도구로 기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컨대 여성 개인의 운명은 가문의 대를 잇느냐 잇지 못하느냐에 따라 결정되지 않았던가. 공교롭게도 그 당시 신체적 아름다움의 판단 기준 역시 주로 몸의 생물학적 기능이 중심이었다. 사회의 체계적 질서가 인간의 시각·촉각적 감각에 영향을 주더란 말이다.

지금에는 섣불리 상상하기 어렵지만 다이어트 문화가 만들어졌다는 건 일정 정도 해방적 견지를 지닌 사건이었을지도 모른다. 비록 내용만 다른 신체 관리 기법에 불과했을지라도, 다이어트 문화의 등장으로 여성의 몸을 재생산·번식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이 성차별 그 자체로부터의 해방, 나아가 신체의 해방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분명하다.
 
상징적 자산이 되고 있는 몸
다이어트는 여성만의 문제는 아니다. 의미가 왜곡됐다고 하지만,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1960년대까지 다이어트는 서구의 과학적이고 분석적인 섭생을 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애초에 이 말의 유행은 몸을 어떻게 체계적으로 관리할 것인가 하는 관심에서 유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몸에 대한 관심이 건강 문제와 관련이 깊었다는 것은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산업화 드라이브가 걸려 있는 마당에 건강치 못한 몸을 지닌 노동력은 분명 권장할 만한 사안이 아니다. 위생과 보건이 중요한 사회정책으로 부각되고, 임금노동자들에게 금욕주의적인 태도가 강조되던 것도 바로 이러한 사정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몸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언제나 일관적이고 뚜렷한 것만은 아니다. 1970년대에 이르면 다이어트는 비만에 대비되는 말로 사용되기 시작한다. 단지 건강 문제가 아니라 미용 문제로도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말인즉슨 노동 규율이 잡힌 몸과는 다른 종류의 몸이 나타났다는 뜻이다. 이 당시에 있었던 ‘다이어트족’이라는 명명은 특정한 사태를 가리키는 징표였을 것이다. 노동하는 한국인이 아닌 다른 종류의 한국인이 등장했다는 발견. 이제부터 몸은 노동을 위해서만 소비되는 게 아니라 여타의 다양한 상품적 목적으로도 소비되기 시작한다.

주지하듯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사달이 시작된다. 몸이 단지 노동을 위한 것이었다면 모든 사태가 매끄러웠겠지만, 몸에 부과되는 사회적 이해관계들이 모순적으로 중첩됨으로써 몸이라는 전장(battlefield)은 혼전 양상을 띠기 때문이다. 다이어트하는 몸은 애증의 시선을 받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중적으로 노동하는 몸은 타율적이지만 국가 발전에 기여한다. 미용하는 몸은 날렵하지만 엄숙하지 못하다. 반대로 노동하는 몸은 건강하지만 복종적이다. 미용하는 몸은 허영 덩어리지만 시각적 쾌감을 제공한다.

게다가 오늘날에 이르면 몸을 관리한다는 건 더욱 복잡한 문제가 된다. 다이어트하는 사람에게 대체 왜 하냐고 물어보면 십중팔구 돌아오는 대답은 몸이 가벼워지기 위해서라고 한다. 몸이 가벼워지면 뭐가 좋은 건가. 그러면 생활 자체가 달라진다는 답이 돌아온다. 물론 이러한 대답 뒤에 타의로 살을 빼는 건 아니라는 자기 방어 기제가 숨어 있는 게 분명하지만, 어쨌든 자기 자신을 위해 다이어트를 한다는 논리는 주목해볼 만하다.

우선 이상하지 않은가. 몸을 가볍게 한다는 개인적 목적들이 천편일률적이라는 역설 말이다. 생활이 달라지면 인생 자체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 평범한 사실에는 다이어트한 몸이 지금의 경쟁 사회를 버텨낼 육신 그 자체이자 때로는 더 나은 삶을 약속할 상징적 자산이 되기도 한다는 진실이 숨어 있다. 게다가 오늘날처럼 서비스업이나 문화산업 등 이른바 굴뚝 없는 산업이 커질수록, 거기서 교환되는 감정과 이를 담보할 몸의 문제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사안이 될 수밖에 없다.
 
비극을 부르는 부조리극
다이어트에 대한 대다수 언설들이 부조리극 내지 비극으로 끝을 맺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일 것이다. 우리들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몸에 대한 규범적 이상과 실제적 현실의 괴리를 통해 다이어트라는 문화적 현상을 접하곤 한다. 완고한 사람들에게 다이어트는 쓰잘머리 없겠지만, 현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한 가운데 떨궈져 있는 사람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절실한 문제가 된다. 어느 틈엔가 다이어트는 사전적 의미나 애초 의도와 달리 사회적 생존을 위한 전략적 기술의 목록에 등재돼버렸기 때문이다.

어디 우리들 생물학적 인간만의 문제일까. 기업이나 정부 등에서도 다이어트라는 용어는 조직의 체계적 선순환을 강조하는 은유로 사용되곤 한다. 이런 사실들에서 얻을 수 있는 팁은 오늘날 다이어트라는 말은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적의 효과를 내고자 하는 비용-편익의 경제학적 행동 윤리를 가리키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점에 있다. 다이어트 문화에 건강이나 미용을 초과하는 의미가 있다면 바로 이 지점이 아닐까. 단적으로 말하자면, 어느새 다이어트는 재래의 계급정치나 성정치를 넘어서는 정치의 새로운 지평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대개가 그렇듯이 이번 부조리극도 그 귀결은 비극이 될 것 같지만 말이다.
 
 
김성윤 강사
중앙대 
사회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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