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차- 모멸감 품은 대학사회  
2주차-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을’이었다  
3주차- 모멸사회를 똑바로 바라보는 방법
 
오늘을 다시 봅니다. 당연했던 것들, 자연스러웠던 것들, 인식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물음표를 던지면서 말이죠. 심층기획부는 지난 2주간 감정을 다시 보았습니다. 너무 일상적이었던 감정, 그래서 말하지 못했던 감정, 모멸감이 바로 그 대상이었죠. 모멸의 흔적이 남겨진 자국들을 찾았습니다. 그곳에선 사람들의 자존감이 짓밟히고 있었는데요. 청춘예찬도 이미 옛말. 강해지라는 말들에 내 존재 하나 건강히 붙들고 있기 어려운 처지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물음표를 던져보았습니다. 왜, 우리는 모멸을 느끼는 것일까요?

내 약점 드러내기 두려운 불신 사회, 감정들이 쌓인다
위협밥는 자존감, 또 다른 누군가를 누르고 싶다
 
  
 
아래층과 위층 간의 분쟁에 보복상품이 등장했다. 바로 층간소음 때문이다. 대낮 주택가에서는 이웃에게 흉기를 휘둘러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도 있었다. 주차문제 때문이었다. 택시 운전기사를 마구 폭행하는 일들이 한편에선 발생하는가 하면 우발적인 살인도 심심찮게 일어난다. 무시한다는 이유에서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작은 일에도 분을 주체할 수 없다. 감정이라는 것이 본래 충동적이라지만 내 감정 하나 관리가 쉽지 않다. 조금만 건드려도 금세 얼굴이 시뻘겋게 닳아 오르는 지금은 감정의 과포화상태. 우리 사회의 감정구조에 적신호가 켜진 탓이다.  
 
감정은 곪아가고 있다
  ‘나를 무시하나?’
  대화 중에 말이 잘렸다. 분명 별 것 아닌 일인데 찝찝한 감정만이 오래도록 남는다. 갈등의 시작은 언제나 그렇듯 ‘별 것 아닌’ 것들에 의해 촉발된다. 눈덩이처럼 불어난 증오의 처음에는 존중받지 못했다는 모멸의 파편들이 방아쇠를 당기고 있었다.
 
  인정과 감사가 각박해지는 한국사회에는 풀지 못한 감정들이 나부끼고 있다. 김찬호 교수(성공회대 교양학부대학)는 모멸감을 ‘한국인의 일상을 지배하는 감정의 응어리’라 보았다. 우리 사회는 모멸을 주고받으며 오만과 피해의식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 열패감에 젖어들기 쉬운 지금, 모멸의 공격에 가장 취약한 상황이다. 
 
  문제는 속에선 감정들이 요동을 치는데 정작 솔직해지기 어렵다는 것이다. 김찬호 교수는 이에 대해 신뢰가 부족한 사회 분위기를 지적했다. 그는 “충실한 자기 표현을 하기에는 너무나 안전하지 못한 공간이 됐다”며 “있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줘도 괜찮은 관계가 쉽게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약점을 드러냈을 때 불리해지는 것은 자신. 불안한 관계에서 솔직한 감정 표현은 더욱 어려워지게 됐다. 
 
줄 세우기에 오갈 데 없는 자존 
  바로 이 불신의 구조가 한국사회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고도의 압축 성장. 불과 30년이라는 단기 승부에 ‘올인’함으로써 많은 것을 얻었지만 그에 따른 잔해물들이 계층 격차와 불안을 가중시켰다. 이는 곧 한국 사회의 정서 지형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됐다. 이병훈 교수(사회학과)는 “계층이 분명한 사회에 살수록 ‘위아래’를 좀 더 따지게 된다”고 말했다. 자신의 위치보다 높은 사람들에게는 작고 약해지는 반면 낮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쉽게 업신여기는 태도가 밴 것이다. 
 
  신분만 달랐던 과거와 달리 오늘날에는 모든 속성을 비교할 수 있게 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학력은 학벌이 되고 순위는 서열이 됐으며 차이는 곧 차별이 된 것이다. 그렇게 형성된 계층은 열등감과 피해의식의 근원지가 됐다. 이병훈 교수는 “횡적인 것에 대한 가치를 배우지 못하고 종적인 순위 속에서 내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에서 삶의 의미를 찾게 됐다”고 분석했다. 결국 남과의 비교가 결핍에 집착하도록 만듦으로써 사람들의 자존감이 위태로워진 것이다. 모멸감은 이러한 사회적 맥락 속에 배태돼 있었다.
 
존경할 만한가 또는 무시할 만한가
  특히 이 모멸을 가깝게 느끼는 부류는 바로 대학생들이다. 입시 경쟁이니 스펙이니 줄 세우기와 성과주의의 분위기 속에서 제대로 표출할 겨를도 없이 숱한 감정들을 겹겹이 쌓아온 탓이다. 이병훈 교수는 “현재 대학생들이 너무 많은 가위에 눌려있다”며 “감정적으로 피폐하고 불안한 상태에서는 나밖에 보이지 않게 되고 결국 남한테 쉽게 모멸을 주는 분위기가 형성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게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모멸이라는 감정이 자신보다 ‘아래’인 사람들에게 전이되는 것이다. 부당한 대우로 인한 감정을 적절하게 표출하기보단 오히려 나보다 ‘못난’ 사람에게 화풀이 형태로 되갚곤 한다. 그야말로 ‘한강’이 만만한 탓이다. 지잡대니 지균충이니 성형괴물이라는 신조어들 속에서도 끊임없이 만만한 대상을 찾고자 하는 정서가 반영된 것이다. 결국은 ‘너보단 낫지’라는 무시와 경멸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단순히 개인의 특성만으로 옮겨지는 문제는 아니다. 김재휘 교수(심리학과)는 “모멸을 받는 당사자조차도 누군가에게 모멸감을 주고 있을지도 모른다”며 “받는 쪽과 주는 쪽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고 지적한다. 언제든 자존감이 위협되는 탓에 그것을 부지하고 있는 일이 유독 한국사회에서는 어렵다. 왠지 무시당한다는 느낌에 괜한 일에도 덜컥 화가 나기 십상. 모멸은 그렇게 언제 터질지 모르는 파멸의 봉오리를 틔운 채 사회를 부유하고 있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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