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니 온전한 북어를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제사용으로 쓰이던 북어는 항상 배가 갈라져 북어가 북어인줄도 몰랐죠. 떡 벌어진 입 안으로 속을 본 것도, 말라버린 눈알을 긁어본 것도, 까끌까끌한 지느러미와 몸통을 만져본 것도 태어나 처음이었습니다. 

 
  생애 처음 북어를 만져본 소감부터 이야기하자면 시인의 말처럼 정말 ‘자갈처럼 죄다 딱딱했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시인은 북어를 보고 현대인을 생각했다지요. 그것도 비판 감각을 잃어버린 모습 말입니다. 1면에다가 북어 사진을 올려놓겠다고 선포해놓고 막상 북어를 마주하니 시인의 상상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죠. 
 
  인문학 열풍에 대한 왈가왈부를 떠나 북어처럼 굳어버린 오늘에 인문학은 단비같은 존재라는 건 확실합니다. 하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인문학 2주차, 인문학에 대해 알면 알수록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사람에 대한 학문’이라지만 결코 한 사람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 나도 혹시 북어였던 것일까.’ 철학자들의 깊은 사고를 담기에 기자의 부족한 지적능력을 탓해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인문학은 대중들에게 여전히 어렵고 힘든 학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는 융합적 사고도, 인문학적 상상력도 말짱 도루묵입니다. 저는 다시 <북어>를 떠올립니다. 시인은 북어를 보고 현대인을 생각했다지요. 사실 대단한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북어를 보고 현대인을 떠올리기는커녕 우리 삶에 하늘 한 번 쳐다볼 여유조차 없죠. 시를 쓰는 것은 둘째 치고, 제대로 시를 음미해 본 적도 까마득합니다. 과거를 반추해보면 그나마 문학적 감수성이 가장 뛰어났던 학창시절조차 빨간 줄긋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얼마나 중요했던지, 근대 문학에 나오는 ‘님’이 ‘조국 광복’임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뿐일까요. 옛 성현들의 가르침은 시대 순서대로 외워야 했고, 역사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기에 ‘입시’라는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았죠. 
 
  답이 있는 인문학을 배우며 자란 우리는 답이 없는 인문학 앞에 한 마리 북어가 된 듯합니다. 풀이 해답이 없으니, 어렵고 먼 것으로 느껴지는 것이죠. 이제 와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으로 자극해보지만 이미 굳어버린 감성은 묵묵부답입니다. 오늘 하늘은 어땠습니까. 주위 사람들의 얼굴은 또 어땠습니까. 인문학적 소양을 갖춰야 한다고 말하기 전에 우리 사회에 인문학적 토양이 충분히 깔려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역설적이게도 최승호 시인은 자신의 시가 수능에 출제됐지만 모든 문제를 틀렸다고 합니다. 그는 일간지 인터뷰에서 “작가의 의도를 묻는 문제를 진짜 작가가 모른다면 누가 아는 건지 참 미스터리”라며 쓴 소리를 했다고 하죠. 그는 ‘지금 이 순간’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말합니다. “어린이가 덜 자란 어른인 게 아니라 어른이 계속 자라나는 어린이일 뿐이죠.”
 
  밤의 식료품 가게에서 북어가 입을 커다랗게 또 다시 부르짖고 있습니다.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짖고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또 다시 북어가 될 것입니까. 
김영화 심층기획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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