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아픔을 치유하는 선율에 대하여
  • 조가희 기자
  • 승인 2014.05.25 05: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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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대생이 사는 법 - 임형섭 학생(작곡전공 3)

▲ 평생 함께했던 피아노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임형섭 학생.
 

  베이스 클라리넷이 내뿜는 선율 속에서 하얀 배꽃으로 상징되는 한 위안부 할머니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쉼 없이 움직이는 바이올린 현 위에선 독일군에 의해 처참히 죽어간 유대인의 살려달라는 외침도 새어나왔다. 역사 속에서 스쳐 간 수많은 희생자의 비명을 이해하고 어루만져주는 한 작곡가는 우리가 잊고 지나간 역사적 문제를 음악으로 승화하고 있었다. 안타까운 역사적 사건들을 주제로 음표를 수놓는 임형섭 학생(작곡전공 3)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봤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사람의 희생이 있었던 사건을 토대로 작곡했다. 대표적인 곡을 소개해 달라.
“<Glorious blood>라는 곡에서 8·15광복과 5·18 민주항쟁 당시의 상황을 담았다. <150M in zion>에서는 유대인들이 학살당하는 상황을 그대로 녹여내려고 했다. <After the pear blossoms dwindled>에서는 위안부 할머님들의 아픔을 담았다.”

-작업한 곡이 연주될 때 하나의 스토리가 전개되는 것 같다.
“어떤 예술 작품이든 이야기가 담겨 있어야 듣는 사람을 매료시킬 수 있다. 역사 속 이야기 중에서 갈등요소가 심하고 이슈화되는 사건들을 고르는 편이다.”

-역사적인 사연이 담긴 곡들을 쓰는 목적은.
“희생자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싶었다. 앞으로 우리 사회에 잘못된 역사가 반복되는 걸 막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리려는 목적도 있다.”

-역사적인 사건들을 토대로 작곡하게 된 계기가 궁금한데.
“평상시 역사에 관심이 많았고, 자료를 찾는 과정에서 희생자들의 아픔이 느껴졌다. 그분들을 위해 저절로 곡을 쓰고 싶다는 욕구가 생기더라.”

-사전 조사는 어떻게 하나.
“책이나 온라인으로 많이 찾아본다. 직접 현장에 찾아가서 느끼려고도 한다. 8·15 광복을 조사할 때는 현충원에 가서 선조들의 무덤 앞에 서 있었다. 희생자들의 아픔이 피부로 와 닿았다.”

 -희생자들의 아픔을 음악으로 녹여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글을 쓰기 전 개요를 짜듯이 작곡도 마찬가지다. 한 곡에서 전개될 이야기를 짠 후 구획마다 눈에 보이는 것처럼 이미지를 잡는다.”

-작곡할 때 염두에 두는 것이 있다면.
“그 사건 속에 있다고 가정하면서 최대한 생동감 있게 상황을 표현하려고 한다. 곡의 주제에 따라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를 다르게 표현하거나 내면묘사에도 신경 쓴다.”

-<Glorious blood>라고 이름 붙인 이유는.
“말 그대로 영광의 피다. 8·15광복과 5·18 민주 항쟁 때 희생자들의 영광스러운 피가 한데 모여 지금의 한국이 존재한다는 가슴 아픈 역사를 알리고 싶었다.”

-<150M in zion>에서 소름 끼치는 소리가 돋보였는데.
“유대인 수용소에서 사람들이 시체 태우는 기계에 끌려가는 장면은 비참하기 그지없다. 일반 연주 기법으로는 충분히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바이올린과 첼로로 특수 연주법을 사용했다.”

-<After the pear blossoms dwin dled>에서 위안부 할머님들을 하얀 배꽃으로 형상화했다.
“위안부 할머님들을 생각하니 자꾸 꽃이 떠올랐다. 배꽃은 젊은 소녀의 모습처럼 깨끗하고 때 묻지 않은 하얀색이다. 사전 조사할 때 다섯 명의 피해자 할머님들이 증언하는 동영상을 많이 봤다. 동영상 속에서 할머니 한 분씩 자신이 겪은 고통을 말씀하시는데 그분들의 증언이 5장인 배꽃의 꽃잎에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곡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어떤가.
“제각각이다. 대다수가 좋고 인상적이라는 반응이다. 어머니께는 설명 없이 곡만 들려줬는데 총소리로 표현한 것을 딱 맞추시더라.(웃음)”

-본인이 작곡한 곡을 직접 들으면 어떤 기분인지 궁금하다.
“곡을 쓴 뒤에 완전히 그 음악에 빠져 산다. 나중에 작곡했던 곡을 다시 들으면 작업할 당시에 조사했던 것들이 떠올라 열정이 생긴다.”

-이 작업만의 매력은.
“사실 작곡 과정이 너무 힘들다. 곡을 쓸 때마다 내가 어떤 틀에 들어가서 진액이 뽑히는 듯 하다. 그래도 완성된 곡이 연주되고 난 이후에 곡을 듣는 행복함으로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역사적인 주제를 선택해서 사전 조사하는 과정도 즐겁다.”

  역사 속 희생자들의 고통이 있었듯 그의 인생에도 절망적인 순간이 있었다. 임형섭 학생의 음악은 고등학교 시절 가장 방황했고 피폐했던 삶의 과거에서도 비롯됐다. 작곡가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의 아픔이 그의 음악 세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들어봤다.

-음악과의 인연은 언제 시작됐나.
“7살 때 우연히 한 연주가가 피아노 치는 모습을 봤다. 그게 뇌리에 박힌 이후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그 연주가의 모습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때 이후로 쭉 피아노를 친 건가.
“대학 입시까지 피아노 전공을 준비했는데 한창 방황하고 나서 입시에 모두 떨어졌다. 정말 죽고 싶더라.”

-고등학교 때 많이 방황했나 보다.
“그 당시에는 스스로 굉장히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다. 음악을 꾸준히 하고 성실한 아이인 척 했지만 속마음으로는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었다. 게다가 친한 친구의 아버지에게 사기를 당하고 죽마고우였던 친구와도 단절되기까지 했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것이다.”

-힘든 시절을 어떻게 극복했나.
“우연히 교회 사모님을 만나면서 종이에 나의 잘못과 힘들었던 것을 쭉 적어나갔다. 모든 것을 정리한 후에 신앙적으로 상처를 극복했다. 그분의 도움으로 지금은 건강한 인간관계와 정상적인 자아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힘들었던 경험이 작업한 곡에도 영향을줬을 것 같다.
“힘들었던 시기를 극복한 이후로 고통을 겪는 피해자들을 위해 곡을 쓰자고 마음먹었다. 아픔을 겪는 사람들에게 역경을 극복해 낼 수 있다는 힘을 주고 싶다.”

▲ 그가 직접 작곡한 악보에는 현란한 음표들이 놓여있다.

  온 에너지를 쥐어짜서 곡을 완성해도 작곡가가 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창작뿐만 아니라 최종적으로 곡이 연출되기까지 신경 쓸 것들이 이만저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궁금했던 점들을 모으고 모아 임형섭 학생만의 작곡 과정에 대해 들어봤다.

-주로 언제 작곡하나.
“깨어있는 동안 한다.(웃음) 안성캠퍼스 호수 벤치에 앉아서 곡을 쓰기도 하고 차로 이동하면서도 한다. 평소 삶이 곧 작업의 연속이다.”

-한 곡을 완성하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개인마다 편차가 크지만 짧은 곡은 2개월 걸리고 긴 곡은 8개월 정도 걸린다. 곡을 쓴 후에는 수정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작곡하다가 막힐 때 해결책이 있다면.
“매 순간 막히지만 그래도 계속 쓴다. 아무것도 못 쓰는 날이 있는가 하면 어떤 날은 엄청나게 많이 쓰는 날도 있다. 막힌다고 생각을 멈추거나 피하지 않는다.”

-작곡한 후 무대에 연주되기까지의 과정이 어떻게 이뤄지나.
“모든 것을 쥐어짜서 곡을 만들면 끝일 것 같지만 사실 그게 끝이 아니다. 작곡가는 자신의 곡을 연주해줄 연주가를 섭외해야 한다. 곡이 원하는 방향대로 연주되기 위해선 연주가에게 따로 요청도 하고 많은 연습도 필요하다. 물론 연습을 해도 무대에 올라가기 전까지 모든 것이 잘 맞지 않는 경우가 있다. 어떤 작곡과 학생은 자신이 쓴 곡과 실제로 연주된 것이 달라서 펑펑 울었다고 하더라.”

-연주자를 섭외할 때 자신만의 기준이 있는지.
“실제로 연주하는 모습을 보는 게 더 좋지만, 추천받은 연주자가 실제로 연주하는 동영상을 본다. 연주 기교가 미숙하더라도 진실 되게 연주하면 섭외한다."

-연주자를 구하는 게 항상 쉽지만은 않을 것 같다.
“어떤 변수가 생길지 알 수 없다. 연주자를 구했지만, 갑자기 연주회 때 연주를 못 한다고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다른 연주자를 부랴부랴 구한 뒤에 겨우 연주를 끝마친 기억이 있다.”

▲ 재작년 10월에 예술의 전당 IBK홀에서 곡이 연주되었다. 사진제공 임형섭학생

  풋풋한 새내기 때 그는 자신이 처음 작곡한 곡을 예술의 전당 무대에서 선보였다. 거기서 그의 행보는 끝나지 않았다. 올해 8월엔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곡을 미국 무대에서 펼칠 예정이다. 신인 작곡가로서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떨쳐 보이는 임형섭 학생이 세계무대의 정상에 우뚝 설 날이 기다려진다.

-<Glorious blood>가 예술의 전당에서 연주되었다고 들었다.
“재작년 국내 콩쿨에서 대상을 받은 뒤 예술의 전당 무대에서 곡을 시연할 기회가 생겼다. 작곡가로서는 첫 데뷔 무대였다. 팜플렛이 나왔는데 유명한 작곡가들 사이에 내 사진이 딱 있더라. 연주를 마친 뒤 무대에 올라가 인사할 때 실감이 안 났다.”

 -<After the pear blossoms dwin dled>가 ICA Composition competi tion에서 우승도 했다.
“국제 콩쿨에 마감 날짜를 하루 넘겨 제출해서 별 기대를 하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Composition winner라는 메일이 왔다. 올해 8월에 미국에 가서 곡을 연주할 예정이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겪은 사건들을 국제무대에서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작업하고 있는 곡이 있나.
“북한 사람들의 인권이 유린당하고 있는 문제로 곡을 쓰는 중이다. 김정일에 대한 말 한마디 잘못하면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간다더라. 반인륜적인 사실을 알리고자 쓰고 있다.”

-앞으로의 작곡 계획은.
“국제 사회에서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음악으로 이슈화해서 알리고 극복방향을 제시하고 싶다.”

-작곡가란 어떤 사람인가.
“시대상을 반영해야 할 의무가 있다. 당장 내 문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당면하고 있는 어떤 문제를 인식하고 이것을 음악으로 알릴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진 양동혁 기자

▲ QR코드를 찍으시면 임형섭 학생의 대표곡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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