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밤은 옅은 남색처럼 부드럽기도 하고 흑수정처럼 화려하기도 하다. 사람들에게 서울의 밤은 화려한 네온사인 불빛 아래서 취기를 빌려 하루의 고단함을 털어놓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몰랐던 서울의 밤은 곱고 아름답기도 하다. 골목 구석의 불 켜진 심야식당과 동네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야경, 어둠이 내린 후 바라보는 예술작품이 그러하다. 옅은남색 빛의 고운 서울의 밤에 젖어보았다. 

 
 
주인아저씨가 내놓는
소박한 음식에

배도 마음도
따뜻하게 채우는 곳
 
 
“하루가 끝나고 사람들의 귀갓길이 시작될 때 나의 하루는 시작된다.” 일본 드라마 <심야식당>의 주인공이 건네는 첫 마디다. 흘러가는 밤의 깊이만큼 작은 공간 속에서 사람들의 속 얘기도 깊어간다. 늦은 새벽 찾아오는 손님들의 사연을 어루만져주는 서울의 심야식당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사람 냄새를 맡을 수 있는 ‘ㄴ’ 식당
 
온종일 시끌벅적했던 서촌에 어둠이 내리고 거리를 지나던 사람들도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하며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다. 깜깜해진 밤 서촌 골목의 한구석을 밝히고 있는 가게가 있다. 입구에 붙어있는 빛바랜 종이에 쓰인 글자만이 이곳이 식당임을 알리고 옅은 텅스텐 불빛이 가게 안을 어두침침하게 비춘다. 네 명이 다닥다닥 붙어야 겨우 앉을 수 있는 긴 탁자와 그 뒤에 자그마한 식탁 세 개만이 놓여있는 협소한 공간이 가게의 전부다. 
 
  주방과 식탁 사이에 놓인 사케 병 너머로 주방을 훔쳐보니 그을음 가득한 한쪽 벽에서 주인아저씨가 생선을 튀기는 기분 좋은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를 위안 삼아 뜨끈한 우동 국물을 들이켜면 하루 동안 쌓인 피곤함이 모두 풀리는 듯하다. 요리를 마친 주인이 혼자 온 손님이 앉은 식탁 앞으로 다가와 오늘의 안부를 묻자 손님은 술 한 잔을 건네며 고민을 털어 놓는다.
 
  가게의 단골손님 A 씨는 오늘도 ‘ㄴ’ 식당으로 발을 들였다. “다니던 NGO에 사직서를 냈어요.” 그녀는 맥주를 한 잔 들이킨다. “가끔 날을 잡고 나를 놓아 버리고 싶을 때 이곳을 찾게 돼요.” 고민이 있고 힘들 때마다 혼자 이곳을 찾아 무언의 위로를 받는다.  
 
  넓고 반듯한 카페가 길거리마다 생기는 요즘, 좁고 칙칙하지만 오래된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이곳이야말로 서촌의 진짜 모습이다. 가게 구석구석에서는 사람냄새가 물씬 풍긴다. 아르바이트를 했던 학생이 그려놓은 일러스트 한 장, 한쪽 벽에 손님이 남기고 간 낙서, 주인아저씨의 손 글씨로 붙여놓은 메뉴판이 그러하다.
 
  요란한 클럽 음악을 찾아 하루를 신나게 마무리하는 대신 이 공간에 찾아오는 사회 초년생의 이야기를 듣는 재미도 쏠쏠하다. 퇴근 후 회식 자리에서는 망설여지던 이야기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다. 누구의 목소리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소란스러웠던 술집이 아닌 새벽이 찾아온 조용한 분위기 속에 있자니 서로에게 더 진솔해지는 기분이다. 식당 안에는 자신들이 살아왔던 아날로그 감성을 잊지 못하고 찾아오는 50대와 디지털 세대를 살고 있는 20대가 만나 친구가 되기도 한다.
 
  오밀조밀 모여 앉아 사케 한잔, 우동 한입에 오랫동안 알아 온 친구 사이처럼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를 위로한다. 밤이 무르익을수록 서촌의 공기는 차분해지고 심야식당의 공기는 점점 더 따뜻해진다.
 
친구 집에 놀러 온 듯 편안한 ‘ㅁ’ 식당
 
해가 지지 않은 듯 강남의 밤은 여전히 눈부시고 귀가 먹먹하다. 조용히 이야기 나눌 곳 하나 없어 보이는 시끌벅적한 이곳에도 사람들이 위안을 받을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한다. 
 
  차도의 경적 소리와 술 취한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을 만큼 복잡한 골목을 꺾고 들어가다 보면 덕지덕지 페인트칠이 돼 있는 유리문을 하나 발견하게 된다. 알파벳 대문자 하나 외에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불친절한 가게 앞에서 망설이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면 여행을 좋아하는 주인이 곳곳에서 모아온 소품들에 친근함이 느껴진다. 메뉴가 정해져 있지 않아 이곳으로 향하는 길에는 친구 집에 초대받은 듯 ‘무슨 음식이 나올까’하는 설렘이 가득하다. 매일 바뀌는 메뉴는 그날 장을 봐온 재료로 요리하는 주인 마음이다.  
 
  주인은 “술 좋아하니 술집 하지”라며 손님 옆에 앉아 보드카를 한 모금 삼킨다. 전혀 주인 같아 보이지 않는 그는 ‘손님은 친구다’라는 신조를 지니고 있다. 왕 대접을 받으려면 발길을 돌리는 것이 좋다. 거의 모든 것이 셀프다. 그래서 이 가게를 찾는 손님은 계속해서 찾아오거나 한번 오고 말거나, 호불호가 확실히 나뉜다.
 
  처음 문을 열었을 때부터 3년 동안 꾸준히 발걸음을 들인 한 부부는 3개월 만의 방문이라며 멋쩍게 웃는다. 여행을 즐기는 그들은 가게에 처음으로 발을 들인지 얼마 안 돼 주인과 마음이 맞아 함께 동해바다도 다녀온 특별한 손님이다. 그 인연을 지금까지 이어가는 그들은 여행을 연상시키는 친구 같은 가게의 분위기에 빠졌다. “가게에 왜 메뉴가 없나요”라는 기자의 물음에 남자는 “정해진 메뉴만 만들기 심심하니까”라며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처럼 주인의 마음을 대신 말해준다. 
 
  “깔끔한 곳에서 맘 편히 술 마실 수 있나. 적당히 더러워야지.” 정갈하고 깨끗한 곳이 아닌 편안하고 안락한 분위기를 풍기는 곳. 마치 오래된 친구의 집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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