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화보나 시상식에서의 모습은 데뷔 이후 10년 동안 고아라 동문을 대표하는 이미지였다. 화려한 여배우이자 <반올림>의 옥림이로 그녀는 그렇게 대중의 기억 속에 각인됐다. 그러던 2013년 그녀는 90년대를 사는 여대생 나정이로 기성세대의 향수와 신세대의 감성을 불러일으키며 브라운관에 돌아왔다. 여배우의 화려함이 아닌 연기자의 친근함으로 대중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고아라 동문을 만나봤다.
 
 
사진제공 SM엔터테인먼트 
나 아닌 누군가를 
표현하며
배우를 꿈꾸다
 
나정이로 넓혀진
배역의 폭
이제부터 시작이다
 
 다양한 드라마가 촬영되는 일산 SBS 드라마제작센터에선 강남경찰들의 파란만장한 수사기를 연출하기 위해 배우들과 스태프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는다. 차승원, 성지루, 이승기를 비롯한 쟁쟁한 배우들 가운데서 유독 빛나는 홍일점 ‘어수선’ 역을 맡은 고아라 동문. 여러 차례의 전화통화 끝에 그런 그녀와의 인터뷰가 성사됐다. 안방과 스크린을 통해서만 보던 그녀를 인터뷰할 수 있다는 설렘에 기자는 부푼 마음을 안고 일산 SBS로 향했다. 눈 코 뜰 새 없이 빠듯한 촬영일정 틈 속에서 화사한 미소로 기자를 맞은 고아라 동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곳 SBS 드라마제작센터에는 무슨 일로 방문했나.
“얼마 전에 첫 방송을 했어요. 차기작인 SBS 드라마 <너희들은 포위됐다>에서 경찰 ‘어수선’ 역할로 컴백했죠. 극중에서 나오는 강남경찰서의 세트장이 이곳 일산 SBS에 있다 보니 최근엔 거의 매일 일산 SBS로 출근하고 있어요. 오늘도 인터뷰가 끝나면 바로 촬영하러 갑니다.(웃음)”
 
-배우로서 새로 선보인 드라마에 대한 기대감이 클 것 같은데.
“매 작품마다 그래왔지만 이번에도 에너지가 넘치는 연기자들, 제작자들과 함께 일하고 있어요. 특히 이번 드라마는 많은 연기자 분들과 스태프들의 열정이 응축되어있는 작품이에요. 배우들과 제작진의 에너지가 시청자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으면 해요.”
 
-<응답하라 1994> 이후 차기작에 대한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많은 분들이 차기작에 대한 고민이 심할 것 같다고 생각하세요. 그런데 어떤 작품을 하든 고민하게 되는 건 마찬가지예요. 이번 작품에서 제가 맡은 배역이 <응답하라 1994>의 ‘성나정’과 캐릭터 상으로 비슷한 면이 없지 않아 있어요.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을 택하기도 했죠.”
 
-2003년 제5회 SM청소년베스트선발대회를 통해 연예계에 입문했다.
“가수가 꿈이었던 친구가 SM 오디션을 준비하는데 백댄서를 해달라고 저한테 부탁했어요. 제가 중학교 때 학교 치어리더, 릴레이 선수, 학급임원까지 해서 그런지 활동적으로 보였나 봐요. 그래서 친구의 백댄서로 SM 오디션에 나갔다가 우연찮게 발탁됐죠. 친구 따라 강남 간다더니 진짜 그렇게 된 셈이네요.(웃음)”
 
-단순히 오디션에 발탁돼서 배우의 길을 걸어온 건가.
“사실 어렸을 적 꿈은 아나운서였어요. 드라마 <이브의 모든 것>에서 아나운서 역할로 나오는 채림 선배님을 보면서 아나운서의 꿈을 키웠죠. SM 오디션에서 발탁됐을 때도 아나운서가 되고 싶은 꿈에는 변함이 없었어요. 연예인으로서 내가 가망이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고요.”
 
-그럼에도 SM에서 연습생 생활을 하게 된 이유는.
“그때 작은 어머니와 어머니가 아직은 어린 나이니까 도전해볼 만한 것 같다고 말씀하셨어요. 실패를 해도 좋은 경험이 될 거라는 말씀이셨죠. 아무래도 어렸을 적에 제가 천방지축 소녀이다 보니까 그런 끼를 가족 분들이 봐주신 게 아닐까 해요.”
 
-SM에서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 궁금하다.
“사실 저는 교육을 받았다고 할 수 없어요. 2003년 2월에 SM 연습초년생으로 들어갔는데 처음에는 다른 연습생들과 그룹을 맞춰서 춤이나 노래를 잠깐 배웠고 연기레슨을 받기도 했어요. 그런데 제가 지방에 있는 중학교를 다녀서 주말에만 서울로 올라와 연습을 했거든요. 다른 연습생들처럼 매일같이 숙소생활을 하면서 연습을 한 게 아니다보니 당연히 제대로 된 교육은 받지 못했죠. 그때까지만 해도 아나운서라는 꿈 때문에 연습생 일에 치중하진 않았어요. 그러다가 그해 10월에 <반올림>의 ‘이옥림’으로 캐스팅되면서 본격적으로 상경했어요.”
 
-<반올림> 캐스팅은 연기 인생의 출발이었다.
“<반올림>을 찍으면서 꿈이 배우로 바뀌기까지 했어요. 감독님과 작가님한테 캐릭터를 표현하는 방법을 배웠고 옥림이의 마음으로 직접 일기를 써보면서 옥림이가 되려고 했죠. 그런 식으로 제 자신이 아닌 옥림이를 표현하면서 자연스럽게 연기의 맛을 알게 된 것 같아요. 제 모든 게 옥림이의 현실이라 생각하고 최면을 걸라고 하셨던 작가님의 말씀이 지금까지도 기억나요.”
 
-13살의 나이에 처음으로 맞이한 드라마 촬영현장은 어색했을 것 같은데.
“너무 어려서 그런지 딱히 어색함은 없었어요. 그저 감독님과 작가님의 지시에 따르면서 대본에 충실하려고 노력했죠. 그런데 아무래도 첫 연기다보니 혼나기도 많이 혼났고 남몰래 눈물을 흘린 적도 있었어요.”
 
-<반올림>의 성공 뒤엔 아역배우로서의 트라우마가 있진 않았나.
“너무도 몰랐던 나이에 연기를 시작해서 자아에 대한 고민이 있었던 것 같긴 해요. <반올림> 촬영기간만큼은 옥림이의 삶을 산거잖아요. 사춘기 10대들이 겪는 자아에 대한 고민인 건 똑같지만 저는 그 고민을 촬영현장에서 하면서 조금은 남다른 사춘기를 겪지 않았나 해요. 배우로서 하는 고민을 사춘기 때 한 셈이죠.”
 
-본인에게 <반올림>의 ‘옥림이’ 역은 어떤 의미인가.
“인생의 한 부분이에요. 그 나이에만 와 닿는 감정들을 옥림이와 같은 나이였던 제가 표현할 수 있어서 시기적으로 적절했죠. 저랑 같은 연령대 소녀의 감정을 공유하면서 표현했던 캐릭터가 옥림이에요. 많은 분들이 저를 보면 아직까지 옥림이를 떠올리시니 저한텐 정말 뜻 깊은 배역이죠.”
 
-<반올림>을 시작으로 쭉 아역배우의 길을 걸어왔다.
“<반올림> 이후에 다양한 작품의 오디션을 봤어요. 고등학생 때는 김희애 선배님과 같이 출연한 <눈꽃>을 찍고 대학교 1학년 때는 일본에서 영화를 두 편 정도 찍었어요. 그러다가 한국에 돌아와서 <누구세요>와 <맨땅에 헤딩>이란 드라마를 찍으면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죠.”
 
-기억에 남는 오디션이 있을 것 같다.
“일본에서의 오디션은 정말 충격이었어요. <푸른 늑대>라는 영화의 오디션을 보러갔는데 4만 명이나 지원했더라고요. 처음엔 경험 차원에서 오디션을 보라는 회사의 권유에 따라 가게 됐죠. 외국 영화에 출연하는 기회는 정말 드물잖아요. 그런데 제가 4만 명을 뚫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징기스칸의 두 번째 부인 역할을 맡아 몽골초원에서 한 달 동안 촬영했던 건 아직도 잊을 수 없어요.”
  
 
 또래들은 추억을 쌓는 유년기 시절에 남모를 고민으로 아역배우의 길을 걸어온 고아라 동문. 첫 배역인 옥림이를 통해 스타덤에 올랐지만 이후에 어떤 배역을 맡든 옥림이는 그녀의 연기에 굴레로 작용했다. 그러던 그녀는 중앙대 연극영화학부 08학번으로 입학하면서 배우로서의 새로운 막에 접어든다.
 
-아역배우 출신이 중앙대 연극영화학부로 진학하게 된 배경이 궁금하다.
“배우를 준비하는 입장에서 중앙대 연극영화학부는 정말 매력적인 곳이에요. 대선배님들과 필모그래피의 전통은 절대 무시할 수 없죠. 실기면접을 볼 때 중앙대에 너무 붙고 싶은 마음에 눈물을 흘리면서 연기를 했던 기억이 나요.(웃음)”
 
-학교생활에 열성이었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대학생활의 꽃인 1학년 때 일본 활동을 하다 보니 학교생활을 거의 못했어요. 새내기 시절을 제대로 보내지 못한 게 한으로 남았는지 3,4학년 때 학교생활에 정말 열심히 참여했어요. 졸업을 빨리 하게 된 계기도 그것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외국 생활을 하면서 학교생활에 대한 갈망이 더욱 커졌어요. 특히 작품 활동을 하면서 배우란 꿈에 더욱 간절해지다 보니 학업에도 충실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고아라가 나타난 교양강의실은 학생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기도 했다.
“밖에서의 제 신분이 어쨌든 중앙대에선 학생 신분이니까 편하게 학생답게 하려고 노력했어요. 교양수업에서 타과 학생분들과 화기애애하게 조별과제를 했던 기억이 나요. 같은 수업을 듣는 학생분들도 저를 신기해하고 그분들이 신기해하는 모습을 보면 저도 신기했죠.(웃음)”
 
-작년에 졸업하면서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다.
“졸업이 시원섭섭했지만 섭섭함이 더 컸던 것 같아요. 시원함이 20%라면 섭섭함이 80%에요. 사실 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학업과 스케줄을 병행하느라 죽을 맛이었어요. 또 우리 중앙대가 은근히 학점에 짠 대학이 아닌가요?(웃음) 시간은 없고 레포트는 써야 되니까 학교 다닐 때는 막막했죠. 그런데 막상 졸업할 때는 더 열심히 하지 못한 후회가 밀려오더라고요.”
 
-연극영화학부에서 배우에 대한 뚜렷한 목표의식을 키울 만도 한데.
“1학년 때 찍었던 <맨땅에 헤딩>이 종영하고 배우로서의 정체성에 대해 한번 고민을 해보게 된 것 같아요. 배우의 꿈을 가진 건 <반올림> 때부터지만 그 이후로 배우라는 길을 계속 걸어야 되는지 고민을 정말 많이 하기도 했어요. 그러다가 <페이스메이커>를 찍고 정말 좋은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가.
“<페이스메이커>에서 장대높이뛰기 선수 ‘유지원’ 역을 맡았어요. 영화에서 지원이가 하던 고민들이 그때 제가 배우로서 하던 고민들이랑 여러 면에서 겹치더라고요. 극중에서 만호(김명민 분)가 지원이에게 이런 질문을 해요. ‘넌 잘하는 걸 하는 게 좋냐, 좋아하는 걸 하는 게 좋냐.’ 이런 대사 하나 하나가 당시 제 고민과 비슷한 점이 많았죠. 배우의 끈을 놓지 않고 계속 할 수 있었던 건 지원이와 제 마음이 비슷해서 그러지 않았을까 해요. 그래서 이 작품에 더욱 애착이 가요.”
 영화 <페이스메이커>의 한 장면.                                                                                    사진출처 <페이스메이커> 공식사이트
 
 화보나 시상식에서는 여신 이미지의 여배우였지만 연기력으로 대중을 매료시키는 건 쉽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2013년 <응답하라 1994>를 통해 허리디스크에 시달리며 곱슬머리를 한 평범한 여대생 나정이로 안방을 찾았다. 전국팔도에서 올라온 대학생들이 신촌 하숙에 모이면서 벌어지는 서울상경기는 2013년 하반기 최고의 드라마로 떠올랐다.
 
-‘성나정’ 배역을 맡은 건 파격적인 변신을 기대했단 뜻으로 들린다.
“<응답하라 1994> 전까지만 해도 대중들 기억 속에 고아라는 옥림이었던 것 같아요. 사실 많은 분들이 저를 보고 여신이나 인형 같다는 말씀을 해주셨지만 저는 사실 그런지도 몰랐어요. 배우에게 중요한 건 연기인데 너무 연예인으로서의 모습을 보여드린 게 아닌가 했죠. 그전까지 옥림이에 가려졌던 예쁜 여배우 이미지를 벗어내고 싶었어요. 변신에 대한 열망이 간절했죠.” 
 
-‘옥림이’를 벗어나 ‘성나정’이 되기 위한 노력이 따로 있었을 것 같다.
“대본을 보고 성나정에 대해 딱 떠오른 이미지는 사투리를 쓰는 곱슬머리 소녀였어요. 그런데 살을 찌우란 건 감독님의 지시였죠. 제가 생각해도 허리디스크가 있는 사람이 마르면 화면으로 봤을 때 어색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응답하라 1994>를 찍기 6달 전부터 계속 살을 찌웠어요. 살이 잘 안 찌는 체질이라 운동을 끊고 피자, 통닭 같이 기름기 있는 음식을 시도 때도 없이 먹었어요. 그렇게 먹다보니 촬영을 시작할 땐 7kg나 찌웠더라고요.(웃음)”
 
-94학번인 ‘성나정’과의 세대 차이를 줄이기 위한 노력은 있었나.
“94년도의 시대흐름이나 90년대 사회상에 관한 자료들은 다 찾아봤어요. 94년도의 스포츠연예부, 사회경제부의 사건사고를 다룬 기사들을 읽으면서 그 시대에 빠지도록 노력했죠. <마지막 승부>같은 90년대 드라마를 보거나 그 시절의 가요를 들으면서 90년대 감성을 살리려고 했어요.”
 
-드라마가 종영하고 여러 인터뷰에서 ‘쓰레기’가 남편이었으면 한다고 했는데, 이유가 있다면.
“나정이의 마음을 너무 잘 알아서 쓰레기를 선택했어요. 쓰레기가 멋있어서 선택한 게 아니라 첫사랑이기 때문에 선택한 거예요. 만일 첫사랑이 칠봉이였다면 칠봉이를 선택했을 거고 삼천포였다면 삼천포를 택했을지 몰라요. 제가 느끼기에도 이성에 대한 간절함이나 애절함이 첫사랑한테 더 컸을 것 같아요.” 
 
-<응답하라 1994>를 통한 이미지 변신은 배우로서 어떻게 받아들여지나.
“<응답하라 1994>를 찍으면서 그 이전의 제 이미지를 더욱 잘 알게 됐어요. 배우에게 이미지는 배역의 폭을 조절하는 중요한 기능인데 배우로서 다른 이미지가 생겼다는 건 정말 반가운 일이죠.”
 
-작품이 종영했을 때 감회가 궁금하다.
“아직도 <응답하라 1994>에 대한 마음이  강하게 남아있어요. 지금도 감독님을 비롯한 7명의 배우들이 단체채팅방에서 떠들면서 친하게 지내요.(웃음) 20살 때부터 25살까지의 나정이를 연기하면서 저의 이야기를 찍은 것 같기도 해요. 또 다른 저의 대학시절을 표현할 수 있는 작품이었어요.”
 
-마지막으로 대중에게 어떤 배우로 각인되고 싶나.
“믿을 수 있는, 신뢰가 가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관객과 시청자 분들이 제가 출연하는 작품은 믿고 보실 수 있었으면 해요. 그게 제가 생각하는 배우로서의 지향점이에요.”
 
<응답하라 1994>에서 '쓰레기'와 걷고 있는 나정이.                                                  사진출처 <응답하라 1994> 공식사이트
 
당신에게 중앙대란?
“사실 작년에 졸업해서 그때 그 시절이라고 표현하긴 민망하지만 학부시절이 지금도 정말 그리워요. 졸업하고도 교수님이나 후배들을 보러 학교를 찾는데 방문할 때마다 학교 다니던 시절이 생각나 날이 지날수록 모교애가 커지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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