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과연 선생으로서 <중대신문>을 평할 자격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학칙개정안 공고를 1면 톱으로 다룬 기사를 접하면서, 우리 학생들은 용감하고 교수들은 비겁하며 학교는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학기를 여는 <중대신문>에서 나는 같은 지면을 빌어 학생들에게 “불편한 ‘사실들’을 직시하는 통찰력과 부당함에 눈감지 않고 권력에 굴하지 않는 뚝심”을 주문한 바 있다. 그래서 더 미안하고 부끄럽다. 지난 호에서 <중대신문>은 자치활동을 우려하면서도 다른 꼭지에서는 유일한 대학생활의 낭만이라 여겨지는 음주문화에 대한 스스로의 책임감을 강조하고, 먼 나라에서 하는 봉사활동의 경험을 나누며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한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동료들에게 “죽을힘을 다해” 기사를 써 달라 주문하는데, 말과 글만 앞세운 나는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 
 
  대학시절을 가만히 돌이켜 보면 최루탄 연기로 매캐한 교정은 늘 내게 가슴 뛰는 곳이었다. 바깥세상은 엄혹했고 현실은 암담했지만 교정 안에 들어서면 비현실적일 정도로 안도감이 밀려오곤 했다. 학보사 기자들은 ‘공식적’ 언론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들을 쏟아 내면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껏 사회를 비판했다. 그들의 기사가 벚꽃 잎처럼 휘날리는 교정을 걷는 나는 행복했다. 아마도 대학이라는 공간만이 보장하는 자유로움 때문이리라. 덕분에 오늘의 우리가 있고 대한민국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 학생들은 어떠할까? 자존감이 바닥에 떨어진 채 학교에 대한 냉소로 일관하는 교수들은 또한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어떤 사람이 되라고 주문할 수 있을까? 
 
  대학은 사회를 보는 창이자, 사회로 통하는 문이며,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실습의 장이다. 기업맞춤형 인간을 직조해 내는 공장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사회와 국가는 이미 기업에 종속된 조직이며, 대학은 그러한 지배구조의 틀에서 붕어빵만 양산하는 도구적 기계에 불과하다. 입시교육의 지옥에서 벗어난 학생들은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비로소 자유롭게 숨 쉬고 사고하며, 자아감을 형성한다. 때로는 실수하고 때로는 작은 성취감을 맛보며 스스로 자치를 배우고,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자질을 습득한다. 인생에서 단 한번밖에 오지 않는 소중한 시간이다. 비록 취업이라는 실존적 장벽이 눈앞에 있지만 학생들은 이 소중한 시간과 공간에서 자율적이며 창조적이고 책임감 있는 사회인으로 성장해 간다. 그러기에 학생들에게 자치권은 소중한 자산이자 권리다. 자치권에 대한 보다 심도 있는 논의가 부재한 지난 호는 아쉽지만 문제제기해 준 것만으로 크게 칭찬해 주고 싶다.
 
  나는 꿈꾼다. 훌쩍 자란 우리 학생들이 노인이 된 나를 찾아와 “그 때 학교를 생각하면 가슴이 벅찰 정도로 행복했다”고 이야기해 줄 날을.
 
사회학과 이나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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